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2011년 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우리 세대의 청춘과는 너무도 다른 지금의 20대... 
농사꾼의 자식으로, 공장 노동자의 자식으로, 장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돌보는 사람 없이 동네에서 끼리끼리 친구들과 '방목'되어 자라던 이들이 대부분의 우리 세대일 것이다.
그렇게 자란 우리 세대는 20대에 30년 가까이 이어온 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에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왔고 세계적인 경제호황기를 맞이하여 큰 어려움 없이 직업을 선택했고 상당수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를 향유했다.
 
요즘의 20대들은 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시기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평균 1만 달러이고 한창 고도성장기였기에 노동력이 부족하여 '실업'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집안의 아이들도 평균 1~2에 불과하여 우리들 세대와 달리 아주 '귀한' 자식들이었기에 과잉보호되어 자랐고 도시화의 발달로 아이들끼리 어울리기 보다 대부분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또한, 사교육과 부동산 투기에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디어나 일부 학자들은 그 20대들의 차별성 때문에 'Y세대'나 'Z세대'로 분류하거나, 20년만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경험한 '촛불세대'로 분류하지만 그들은 우석훈씨의 정의대로 '88만원 세대'이기도 하다.
 
외형적인 기준이나 잣대로 지금의 20대를 분석하거나 분류시킬 수 있으나, 실제 그 20대들이 그러한 외적인 환경, 가족의 구성,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고 세상을,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얻기가 힘들다.
 
이 소설은 그러한 20대들에 대해서 다뤘다.
이 책은 IMF 이후 변화된 사회의 문제들을 혼자의 몸으로 뚫고 온 혹은 뚫고 가고 있는 청년 세대에 바치는 소설이다. 성공한 삶이라고 주변에 얘기할 수 있는 그때,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스스로에게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청년들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최선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이 세계를 헤쳐 나갈 것인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그리는 슬픈 비망록이 펼쳐진다.
 
저자는 요즘 세대를 이른바 '표백 세대'라 지칭한다. '표백 세대'란 너무 완벽해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흰색 같은 세상에 순응해야만 하는 요즘의 청춘들을 말한다.
저자는 섬?할 정도로 이 시대 청춘들의 모습을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누가 봐도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최고의 자리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된 줄거리다.
또한 자살선언문의 성격을 가진 유언적 잡기(雜記)와 주인공의 현실 세계를 번갈아 배치하여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하도록 만든다.
이 책이 던지는 차갑고도 절박한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것이다.
 
<줄거리> 
 
주인공은 7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상위 10개 대학의 뒤쪽에 위치한 A대학에 입학해서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다. 그는 대학입시를 다시 준비하든 편입시험을 보든 더 상위권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어떤 것을 시작해도 이미 늦어버린 나이라고 생각하며, 미래의 암울한 현실을 깨닫지만 딱히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 후에 전교적으로 유명한 ‘21세기 지도자 장학생’인 세연, 경영학과 동기인 휘영, 후배 병권, 세연의 친구 추윤영 등과 어울리게 된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자살을 준비해온 세연은 친구들을 설득하며 5년 후에 자살할 것을 강요하며, 자신이 가장 주목받는 선구자가 되기 위해서 죽는다. 5년 후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며 표백되고 있던 주인공과 친구들은 우연찮게 한 사이트(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친구들은 5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후에 자살을 한다고 선언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모든 틀이 다 짜여 있는 세상에서 옴짝달싹 할 수밖에 없게 된 젊은 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칭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떤 것을 보탤 수도 보탤 것도 없는 흰 그림인 ‘완전한 사회’에서 청년 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회에 표백되어 가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위치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 사회에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밖에 없다며, 와이두유리브닷컴(www.whydoyotlive.com) 사이트에 자살 선언을 올리고 24시간 후에 자살한다.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꿈이나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청년 세대들의 고달픈 일상과 정해진 채 다가올 미래와 표백되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을 보여주면서 면밀하고 명확하게 우리 사회를 그려낸다.

 
젊은 세대들이 자살하는 세태를 정확하게 그려내며 현실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 사회 청년들의 삶과 일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 때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자살 사이트나 자살 동호회 회원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75년생인 작가가 다룬 20대의 모습이 실제 20대의 고민과 갈등과 선택을 반영하고 있다면, 20대들이 보여주고 있는 탈정치, 탈구조, 탈공동체의 태도는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뚜렷한 이유없는 자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에밀 뒤르켐은 19세기 말 [자살론]에서 '사회적 응집력의 부족'을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바, 현대의 자살현상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표백세대'의 좌절... 그것은 현실세계를 '무궁무진하게 변화가능한 세계'로 인식시켜주지 못하는 사회(가정,학교,정부등)에 대한 그들의 심리적 좌절, 인식상의 좌절이 아닐까?
 
 
* 책 속의 문장 :
-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p.77~78)

-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을 주장했지만, 공산 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과 이 세대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넓은 의미의 선언자다. 누군가가 와이두유리브닷컴을 '부모 덕택에 고생 모르고 자란 배부른 녀석들의 복에 겨운 헛소리'라고 매도하려 들 때 '그 방식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라고 맞서며 우리의 논리를 그 자리에 소개한다면 당신은 선언자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p.182)

-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p.199)

- 자살을 꿈꿔본 적이 없냐고? 왜 없겠어. 그런 건 누구나 밤마다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밤마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창문을 깨고 원룸에서 뛰어내리는 공상을 한다고. 때로는 분노에 차서, 때로는 사는 게 허무해서. 세연이 쓴 선언문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외길로 몰아간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일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선언문 덕에 위안을 받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왜지?). 그러나 내가 그 선언문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었다. 설사 선언문의 내용에 내가 찬성한다 해도, 그 선언문과 실행 지침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행 지침에선 자살을 하려거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하라고 했는데, 나는 적어도 업무에서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성취는 앞으로 영영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p.241)

-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p.332)  

 
[ 2011년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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