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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동안 루쉰과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분들과 글에서 접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법정스님과 리영희선생께서도 루쉰의 작품에 대한 일독을 권한 바 있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 조선 독립혁명가의 위대한 삶]에서 주인공 김산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 읽은 서경식씨의 [소년의 눈물]에서도 그가 젊었던 시절에 접한 작품 중에서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등장한다.
루쉰과 그의 작품에 대해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는 봉건체제와 군벌, 악질지주 등을 비판 규탄했고, 당시 지식인의 무능을 꾸짖었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이 깨우치기를 고대했던 사상가였다. 좌익 성향의 작가그룹에 속해있었기에 냉전체제를 버팀목으로 하는 한국의 위정자들과 보수학자들이 그를 배척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루쉰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지인들 중에서 '성실한 탐구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 하다. 과 선배 한 명이 있고 비슷한 연배의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가 있을 정도다.(몇 개의 독서모임 참가자들은 제외하고...ㅋ) 모두가 '밥벌이'와 인스턴트 메시지, 대중매체, 인터넷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편이다.
가끔 언론 기사에 발표되는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의 결과치는 실제로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20세기 초 혼란한 중국 근대사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루쉰에게 주목하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인터넷 서점의 북카트 속에 루쉰의 작품을 담았음에도 두서 없는 '다독'의 욕심에 밀려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가 8월 초에 문득 더 늦기 전에 나의 독서 분야에서 '고전'의 비중을 높여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지성씨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고전 목차에서 두 권([발해고]와 [새벽에 홀로 깨어])을 고르고 루쉰의 소설집 한 편인 이 책을 구하였고 지난 주에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굳이 고전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루쉰의 생애와 비슷한 시기, 즉 우리 민족의 근대사 과정 중에 작품을 발표했던 이들을 찾아 그들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루쉰은 누구인가? ---------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일찍이 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한 그는 1902년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는 망해 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문학으로 중국의 국민성을 개조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의대를 중퇴, 도쿄로 가 잡지 창간, 외국소설 번역 등의 일을 하다가 1909년 귀국했다.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아Q정전], [고향] 등의 소설과 산문시집 [들풀], 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그리고 시평을 비롯한 숱한 잡문(雜文)을 발표했다.
또한 러시아의 예로센코, 네덜란드의 반 에덴 등 수많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웨이밍사(未名社), 위쓰사(語絲社) 등의 문학단체를 조직, 문학운동과 문학청년 지도에도 앞장섰다. 1926년 3 18참사 이후 반정부 지식인에게 내린 국민당의 수배령을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한 그는 샤먼(廈門), 광저우(廣州)를 거쳐 1927년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잡문을 통한 논쟁과 강연 활동,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와 판화운동 전개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의 현실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
루쉰은 장편의 작품은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중편소설 1개, 단편소설 32개와 짧은 글, 강연, 논술, 편지글은 많았다. 역자는 루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광인일기>와 <아Q정전> 등 10편을 엄선하여 번역서로 묶었다.
작품의 배경은 작품 모두 비슷하다. 공간적 배경은 루쉰의 고향인 '소흥' 일대이고 시간적 배경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이며 1935년에 발표된 작품도 있지만 그런 작품도 역시 신해혁명의 영향아래 놓여있다고 역자는 평한다.
<광인일기 (1918.5)> 주인공이 피해망상증을 앓기 시작하는 시기에 시작하여 점점 증상이 심각해지면서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까지 주인공의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망상에 빠진다. 겉으로는 점점 광기가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반면에 망상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심각한 진실을 담고 있다. 봉건 유교사회가 '식인(食人)'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자신의 누이 동생의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아직 봉건적인 것에 물들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을 구하자고 절규한다. "아이들을 구하라.!!" 작품 속에서는 '사람의 신체를 잡아먹는' 것을 말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사람의 의식을 잠식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식인 사회'는 현대에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역자는 작품의 구도를 봉건적 풍속과 계몽자(광인)의 대립으로 분석한다.
<쿵이지 (1919.4)> 작품은 구시대의 몰락한 지식인인 '쿵이지(孔乙己)'의 비참한 운명을 묘사한다. 그러나 역자는 이 작품을 단순히 봉건 과거제도의 죄악을 폭로한 작품으로 뿐 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쿵이지에 대한 사람들의 학대 행위를 통해 '민중의 왜곡된 공격성', 즉 '민중적 자해'를 고발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약 (1919.5)> 작품은 반청 혁명 봉기에 실패하여 처형당하는 신지식인과 미신에 현혹되어 아들의 폐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자의 피에 적신 만두(인혈만두)를 사서 아들에게 먹이는 민중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역자는 이 작품 역시 '민중적 자해'와 '우매함'으로 해석한다. 봉건사회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받는 민중이 봉건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는 혁명가를 박해하는 데 앞장선다는 이 모순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작품 후반에 혁명가의 무덤과 폐병으로 죽은 아들의 무덤에서 두 사람의 어머니들이 서로 마주치게 함으로써 두 주체가 서로 동일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혁명가의 무덤 위를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을 통해 혁명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희망을 표한다.
<고향 (1921)> 이 작품은 이십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고향에서의 상실감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고향에서 어린시절 친구 룬투와 재회하지만 룬투는 봉건사회의 잔혹한 계급적 압박 때문에 의식이 마비된 민중으로 변해버렸다.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어린 시절의 신비감과 일체감은 환멸로 바뀌었지만, 조카와 룬투의 아들이 마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꿈꾼다. 이 작품에서 유명한 문장이 들어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아Q정전 (1922.2)> 루쉰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모순적이고 복잡하고 열악한 민중의 한 사람인 '아Q'의 삶과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는 승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속성을 지닌 하류층 막노동자이다.(물론, 그에게도 어쩌다 한 번씩은 인간적 절실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신승리법'이라는 처세술로 살아가던 그는 그마저도 자신이 경멸하던 왕털보와 가짜 양놈에게 당하면서 파탄난다. 혁명의 소문과 함게 강한 자들이 겁을 먹는 목격하고서 그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자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그는 혁명을 금지당하고 대신 강도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 마지막 순간에 희미한 각성이 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자는 아Q의 비극적 삶을 결정짓는 요소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지배계급 인물들의 가해이고 둘째는 민중적 자해이며, 셋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특히 첫 번째 요소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작품이 최초였다.
<복을 비는 제사 (1924.2)>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샹린댁을 만나고 나서 다음 날 샹린댁이 자살하고 사람들에게 샹린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줄거리다. 선량하고 성실하던 그녀가 어떻게 불행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를 그린 작품이며, 기존의 '민중적 자해'라는 주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역자는 이 작품이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인간적 덕성을 지닌 샹린댁이라는 인물의 부각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력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반성이다.
<술집에서 (1924.2)> 이 작품 역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옛 친구 뤼웨이푸를 만나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줄거리다. 여기서 친구와 주인공은 젊은 시절 추구하던 진보와 변혁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좌절의 늪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대해 동시대 중국 문학인들이 '패배주의'로 규정하면서 루쉰을 비판하였다고 하나 역자는 이 작품이 루쉰의 패배주의라기 보다 우울하지만 정직한 자기 성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누 (1924)> 보수적인 지식인이 주인공으로 유교적 덕목을 고수하며 신문화를 거부하면서도 아들에게는 영어를 배우게 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그는 거지에게서 '비누'를 사는데, 이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거지 소녀의 효행에 감동하는 것이지만 무의식에서는 소녀에게서 성적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학계에서는 보수적 지식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역자는 이를 달리 보면 인간적 진실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린다. '의식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홍수를 다스리다 (1935)> 이 작품과 다음 작품은 루쉰이 타계하기 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우(禹)임금의 치수(治水)신화를 제재로 취했다. '우의 치수'는 여기서 낡은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가치, 관념적이고 허위적인 구정치가에 대한 실천적이고 진실한 신정치가의 승리로 해석된다.
<관문 밖으로 (1935)> 노자(老子)의 출관(出關) 전설을 제재로 취했다. 노자가 공자의 위협을 피하여 세상 밖으로 은둔하는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면서 공자와 함곡관의 관리들을 풍자한다. 역자는 이 작품을 공자에 대한 풍자가 루쉰의 적대자에 대한 풍자로 해석하기 보다 루쉰 자신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해석한다. 즉, '사막으로 가는 신발'과 '조정으로 오르는 신발' 사이의 자신의 갈등이 형상화된 것으로 본 것이다.
역자는 루쉰의 작품이 중국 내에서 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로 루쉰이 단지 중국적인 인물이기라기 보다는 동아시아적 인물이라서 그렇다는 주장을 펼친다. 루쉰이 다루는 작품 속 주제가 중국의 특수성 뿐 아니라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기를 조금씩 달리하고 나중에 좀 더 앞섰던 일본이 서구 열강과 다투면서 중국과 조선을 침탈했다는 점만 빼고는 봉건 유교사회, 농업사회, 왕조시대, 지주계급, 무지몽매한 민중, 빈약한 지식인과 시민계급, 민중혁명의 실패, 서구 열강의 침탈 등의 모습은 3국 모두에서 비슷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역자의 해석에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겠다.
10편의 작품을 읽고 역자의 해석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루쉰의 작품이 20세기 현대사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루쉰이 비판하고 깨우치고자 했던 지식인의 허위의식, 무력감, 민중의 우매함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광인일기>에서 나타나는 '식인사회'는 근대의 사회 현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특히, 21세기 지금의 사회에서도 한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의식을 좀먹는' 사회 분위기와 대중매체, 파편화된 사회, 극도의 이기주의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늘 현재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인지하지 못하면서 '무상급식을 위하여 8.24 투표에의 참여'를 허위의식을 심어주는 관제 언론과 보수단체의 홍보에 설득당하는 서울시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투표 결과 투표율이 얼마나 될 지, 개표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우려스럽다.
광인이 마지막으로 절규한 "아이들을 지켜라!!"는 지금도 여전한 구호인 것 같다...
<쿵이지>, <약>, <아Q정전>, <복을 비는 제사>, <술집에서>는 공통적으로 '민중적 자해'의 모습이 들어있다. 각 작품 속에 표현되는 민중들의 모습이 21세기 현대 민중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지...
<술집에서>에서 나타나는 진보와 변혁에 대한 비관주의, 패배주의의 모습(술집의 분위기와 술집에서 두 친구가 나누는 이야기)은 1980~1990년대를 살아온 이 땅의 486세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이 되는 장면이다. 나 역시 많은 술자리와 모임에서, 동시대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자주 부딪히는 장면이다.
1940년 모택동은 루쉰을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주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위대한 문학가 일 뿐 아니라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규정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중국 내부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와 서구에서까지 그의 작품이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해석되면서 지금은 모택동의 시각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어 있다고 한다.
나 스스로가 루쉰을 이해하고 루쉰의 작품 속에 담겨있는 철학과 사상, 문학적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선집 이외의 루쉰의 다른 작품과 글을 추가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또한 <광인일기>와 <아Q정전>도 몇 번이고 더 읽어야 하고...
그럼에도 한 번 읽은 루쉰의 작품은 인상적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울림이 크니까...
[ 2011년 8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