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Art & Ideas 3
새러 시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아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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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야, 영혼의 거울]과 함께 지난 화요일 공부모임 세미나 교재였다. [고야, 영혼의 거울]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고야의 생애와 화풍, 시대의식과 근대 미술계에 대한 영향을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고야, 영혼의 거울]은 고야의 그림과 동판화를 중심으로 고야의 미술가로서의 삶과 작품활동을 설명하였고 평생의 절친한 친구인 ’마르틴 사파테르’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고야가 매 시기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 책은 고야의 작품과 증거 자료를 토대로 추론할 수 있는 ’고야의 인간성’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고야의 드로잉, 유화, 프레스코, 태피스트리, 판화 등을 에스파냐의 미술 전통이라는 맥락 속에서 파악하며 고야가 유럽 전역에 미친 엄청난 영향과 20세기 미술에서 고야가 갖는 의미를 추적하면서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와 새로 발견된 이 복잡미묘한 예술가의 다양한 초상화들도 소개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실로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다양한 수식과 평가가 주어졌다.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젖힌’ 위대한 예술가, 이것은 앙드레 말로가 [토성, 운명, 예술, 그리고 고야]에서 한 말이다. 고전주의를 주류로 삼았던 예술이 고야라는 커다란 걸림돌을 만나면서 그 흐름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저자는 "고야를 거치면서 고전주의적 조화가 파탄에 이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고야가 17~18세기의 현실 속에서 통찰한 ‘근대’는 차라리 지옥과 천국이 공존하는 카오스였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어둠. 그곳, 이성과 합리성의 이면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인간의 광기와 야수성이었다. 민중은 세계 질서를 앞세운 나폴레옹의 야욕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고, 이를 바라보는 귀머거리 고야에게 세상은 온통 소리 없는 절규였다. 유럽의 중심부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변방의 깨어 있는 예술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질서 속의 혼돈이었던 것이다. 궁정화가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고야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창작 활동이 결국은 가장 사적이고 음울하고 불가사의한 ‘검은 그림’ 연작으로 마무리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래 그림은 ’검은 그림’ 연작 시리즈)
 



 
 
-------------- * 새러 시먼스는 누구인가? --------------
영국 애식스 대학 미술학과의 전임강사이며, 에스파냐 낭만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권위자이다. 저서로는 [고야: 후원자를 찾아서]와 [플랙스먼과 유럽, 윤곽 일러스트레이션과 그 영향]등이 있다.  


이 책은 모두 9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불확실한 출발]에서는 스페인 아라곤과 마드리드,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그림 수업을 받던 시절의 고야를 다룬다. 젊은 시절 고야는 화가로서 출발했지만 스페인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고야는 아카데미에서 2회 연속 낙선한 후, 25세가 된 1770년 당시 여느 미술 지망생들처럼 미술과 예술의 본고향이자,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의 본고장인 로마로 홀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고야는 대가들의 예술작품과 고전주의의 현장을 직접 접하고 그림 수업을 받으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연구하고 연습하였다.

2장. [궁정생활과 궁정예술]에서 고야는 부르봉 왕실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고 궁정에서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는 업무에 종사하면서 미술가로서의 본격적인 공식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고야는 로마에서 돌아온 후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와서 ’엘 필라르 성당’의 프레스코화 ’코레토’를 그렸고(1771년) 스페인 왕가와 미술계에서 촉망받던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동생 ’호세파 바예우’와 결혼한다(1773년). 결혼 후 1775년 고향을 떠나 마드리드로 상경하였고 그 해에 ’산타 바르바라’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 취직하여 멩스와 바예우의 감독을 받았다. 그는 1780년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아래)>를 제출하여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마드리드에 온 처음 몇년 동안 피나는 노력과 인상적인 초기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고야의 잠재적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1780년에는 이미 화려한 옷과 보석을 구입하고 사냥에 몰두하면서 유복한 화가로 성공적인 인생을 기대할 수 있었다. 고야는 귀족 후원자도 만나게 되면서 개인적인 그림을 그릴 여유도 일부 확보했다. 왕가와 후원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고야는 또 한편으로는 신중하고 내성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고귀한 계층과 비천한 계층을 양쪽 다 냉철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고야는 이후 몇 년간 굴욕과 실패, 고난과 질병에 직면하게 된다.

3장. [오만하고 까다로운 사내]에서는 에술적 영감에 사로잡힌 고야와 교회의 비난에 시달리는 고야를 다룬다. 고야는 1774년 첫 아이를 시작으로 모두 일곱 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여섯 아이가 일찍 죽었다. 자식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직업적 야망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고야의 그림은 계속 사실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때 고야는 <이탈리아 화첩>에서 옛 거장들이 폭력성과 추악함을 걸작으로 변형시킨 방법을 시험적으로 탐구했다. 그리고 공적 야심과는 별도로, <교수형 당한 남자(아래)> 등 고야의 작품은 대체로 범죄와 폭력에 대한 병적인 흥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동판화에 대해 꾸준히 실험하고 작품을 만들었다.

1780년부터 시작한 사라고사 ’엘 필라르 대성당’의 예배당의 재장식을 맡은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조수로 참여한 고야는 그 해에 바예우와 그림의 주제와 색채, 방식으로 갈등이 벌어진다. <순교자들의 여왕, 성모 마리아>



4장. [숭고한 초상화가]에서는 고야의 개인 후원자와 고야가 그들을 위해 그린 초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남긴 후원자의 초상화로는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 <돈 안드레스 델 페랄>, <호베야노스 초상>, <후안 멜렌데스 발데스>,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 <프란시스코 카바루스>, <돈 루이스 데 부르봉 왕자의 가족>, <오수나 공작 가족>, <베나벤테 공작부인의 초상>, <폰테스 후작부인>, <알바 공작부인>, <돈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 <마르틴 사파테르>, <마누엘 오소리오 만리케 데 수니가>, <카를로스 4세의 초상>, <마리아 루시아의 초상>, <주세페 바레티> 등이 있다.
고야는 그림 그리는 생애 동안 처음부터 꾸준히 자화상을 그려 남겨놓았는데, 후원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작품 속에 포함시켰다. 고야는 이런 대담한 실험 때문에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고야의 자화상과 초상화에는 그 시대 문화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요소들과 더불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단서를 삽입했다. 
 
5장. [질병과 광기와 마녀]에서는 1790년대 고야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다. 유럽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전파되고 이어진 독재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 사회 전역은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에 이르자 고야에게는 사회 현실에 대한 지적 이해와 궁정화가로서의 공적 의무가 충돌했고(사라테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런 혼돈과 욕망이 드러난다.) 그의 주제는 전보다 훨씬 뚜렷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름>, <겨울>, <성 이시드로의 목장>, <작은 거인들>, <정신병자 수용소>
고야는 1793년 큰 병에 걸렸고 그 결과 청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신체적인 조건에 따라 더욱 자신의 그림에 몰입했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에 파고들었다. 
그는 1798년 ’마녀를 주제로 한 그림 여섯 점’을 완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문학적, 사회적 풍자, 그리고 정치적인 풍자를 담아냈다. 그리고 연이어 1799년 80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동판화집 [변덕 -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을 발간했다. [변덕]은 고야가 처음으로 내놓은 독립적이고 원숙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직업화가로 살아온 30년 동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것들을 모두 재검토한다. 교회, 국가, 궁정, 법률, 의술, 예술, 과학, 거리, 시골생활, 철학, 빈민, 부자, 환자, 젊은이, 늙은이, 결혼 등은 악습과 부도덕과 허영심이 뒤죽박죽된 혼란 상태가 하나의 거대한 테두리 안에 통합된다. 작품의 대개 염세적이고 냉소적이고 고야가 사용한 기법은 복잡하고 최신식이었다. 

6장. [사면초가에 빠진 군주제]에서는 18세기 초의 정치적 불안과 그 속에서 예술적 성취를 위해 분투한 고야의 모습을 다룬다. 1799년부터 1808년까지 11년 동안 스페인의 정세는 폭발 직전이었고 결국 1808년 참혹한 전쟁과 경제 파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그는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교회’의 천장화를 그렸고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공식 초상화로 꼽히는 두 점(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 부부의 대관식>과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집단 초상화>) 중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고야는 1800년 미술 애호가들에게 고야를 기억하도록 각인시킨 ’마하’ 두 점을 그렸다.  
19세기 초에 고야의 미학적 관심을 지배한 것은 부정적 가치와 대조법이었다. 고야가 외부 주문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린 작품에서 원시적인 사람과 광기에 더욱 몰두했다. <희생자를 잡아먹고 있는 식인종>
 

7장. [전쟁의 참화]에서는 고야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화가’로 인정받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1808년 5월 2일 프랑스 기병대가 민중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진입했고 스페인군은 교외로 빠져나가 이를 방관하였다. 다음 날인 5월 3일 프랑스군은 봉기를 진압한 후 봉기 참여자들을 공개 처형했고 고야는 후일 <5월 2일>과 <5월 3일>을 통해 민중들의 봉기와 프랑스군의 학살을 그림으로 남겼고 82점의 판화로 구성된 동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통해 
전쟁기간 동안 시골의 참상과 민중들의 영웅적 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전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고야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점령하여 통치하기 시작한 후 식민지 통치자로부터 주문을 받아 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왕족과 종교세력은 반동적인 숙청을 실시하였고 종교재판소는 고야의 ’마하’ 시리즈 두 점과 마누엘 고도이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도 몰수되었다. 

8장. [여파]에서는 전쟁 이후 고야의 작품활동과 공직생활에서 은퇴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1808년 전쟁 후 전쟁 이후에도 고야는 여전히 주요한 궁정화가로 남았고 동시에 과거로 회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그림으로 남겼다. <정어리 매장>, <종교재판소 광경 (아래)> 

그는 판화집을 연이어 제작했는데 1816년 석판화집 [어리석음]을, 1815년에는 동판화집 [투우집]을 발간했다. [투우집]은 작품의 시점이 극적이고 각도가 넓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리석음]은 [변덕]보다 난해하고 [전쟁의 참화]보다 추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래는 ’어리석음’의 판화작품들)
 


고야는 1819년 공직에서 벗어나고 마드리드를 떠났고 시골 별장에서 지내던 중 두 번째 중병에 걸렸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고야는 1820년부터 시골 별장의 벽면에 ’검은 그림’ 연작 시리즈를 벽화로 그렸다. ’검은 그림’ 시리즈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고야가 병적인 몽상가였다는 느낌을 준다. 
1824년 고야는 복고된 왕정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가 세밀화, 석판화, 유화, 자화상 등 마지막 작품활동을 했다.  
 
9장. [후세의 찬사] 1828년에 고야는 죽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영향력은 계속 높아졌다. 고야의 유족이 소장한 컬렉션이 팔리고 판화가 복간되어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고야의 예술은 세상의 온갖 가혹한 현실을 반영했다. 그가 사후에 얻은 국제적 명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런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가 창안한 예술적 기교의 다른 측면들도 화가와 수집가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대형 재난과 인간의 허약함을 물감과 초크와 잉크로 분석한 그의 작품은 존재의 혼란에 사로잡힌 인물을 보여주었고, 밑바닥 사회의 타락한 영혼들과 추방자들, 상궤를 벗어난 도착적인 행동에 지배되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도 후세의 작가와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p.318)고 설명한다.

고야의 작품은 후세의 대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감옥에 갇힌 여자>의 불안과 공포는 들라크루아의 <변덕>과 뭉크의 <사춘기>에 옮겨졌다.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은 석판화 연작에 [고야에게 바친다]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마네가 파리꼬뮨시 총살을 다룬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그릴 때, 피카소가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릴 때 고야의 <5월 3일>을 상기시켰다. 벨라스케스는 고야의 <교수형을 당한 남자>을 다시 그렸고 파블로 피카소는 <눈먼 남자>를 통해 고야를 재해석했다.폴 세잔은 고야이 초상을 모사하였고 살바도르 달리는 <삶은 강남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를 통해 스페인 내란을 환기시켰고 제이크 채프먼은 <시체에 이 무슨 만용인가>를 통해 고야의 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식으로 고야의 예술은 ’보편적 고통에 대한 영원한 깨달음’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 있다. 앙드레 말로는 [토성, 운명, 예술, 그리고 고야]에서 고야를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젖힌 위대한 예술가’로 칭한다. 고전주의를 주류로 삼았던 18세기 말 ~ 19세기 초의 예술이 고야라는 커다란 걸림돌을 만나면서 그 흐름을 바꾸었다는 뜻이고 고전주의가 미와 예술의 결합을 추구했으나, 고야는 오히려 그 둘의 결별을 꾀했다는 것이다.
고야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이면에 인간의 광기와 야수성을 간파하고 폭로했다. 유럽의 중심부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고 있을 때, 변방의 깨어 있는 예술가의 눈에 포착된 것은 그 속에 감추어진 ’혼돈’이었다.
 
 
고야도 천재일까? 공부모임 세미나가 한창 진행 중에 참석자 한 사람이 발언하던 중 ’고야가 천재’였다고 표현할 때, 내 머리 속에는 반 고흐와 함께 ’고야가 천재였나?’라는 생각과 ’도대체 천재가 뭐지?’라는 의문점이 들었다. 반 고흐가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발간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어보면, 고흐가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작품 대상을 연구, 분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물감과 색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고 스케치를 여러번, 기초 붓칠과 완성 붓칠을 계속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 고흐가 원하는 작품 하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은 몇 개월, 어떤 것은 1년 가까운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흐도 그렇고 고야도 그렇고 그들이 그림을 배우고 나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스스로 만족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오랜 기간 훈련과 실수가 반복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즉, 고야와 고흐가 천재라면, 그 천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 자질이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몸 속에서 나타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끝없는 자기 성찰과 대상에 대한 연구,분석 스케치와 물감과 구도와 색채와 색칠과 주제에 대한 수 백, 수 천번의 연습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 수는 의외로 많다. 고야는 77세에 사망했고 첫 작품을 그린 1771년부터 1828년까지 57년 동안 판화집을 포함하여 164점의 작품을 남겼다. 1년에 3점 꼴로 작품을 완성한 셈이다. 역시 일반인들로부터 ’대가’ 또는 ’천재’라고 인정받는 빈센트 반 고흐는 48년을 살았고 고야보다 더 적은 기간 작품활동을 했지만 스케치 포함하여 무려 264점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파블로 피카소는 93을 살았고 그림 13,400점과 700여점의 조각을 남겼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아직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고야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롭게 알았고 그가 후대의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느꼈다. 저자가 고야를 ’근대 미술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근대 미술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은 나에게 어려운 분야다. 미술가들이 어려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미술에 뛰어드는 동기나 미술을 통해 실현 또는 창조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아직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도 <5월 3일>이나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의 참화]와 같은 그림과 판화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동류 화가들에게, 후대의 사람들에게 예술에 있어서도, 삶에 있어서도, 세계관이나 사회의식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나 역시 강렬한 그림 하나로부터 내 생각과 생활, 태도에 영향을 받은 적이 여러번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음악, 만화, 소설, 시 등 예술이나 문학과 관련된 인간의 창작물, 결과물들은 일상적으로, 또 가끔 폭발적으로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 것이다. 콘텐츠 장사나 광고처럼 돈 벌이로도 전락하기도 하고...
  
 
[ 2011년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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