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 - 잊혀진 제국 발해를 찾아서, 오래된 책방 11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1
유득공 지음, 정진헌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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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훑어보던 중 책 뒤쪽에 몇 가지 유형의 ’고전’이 소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고전으로 소개되어 있는 책들 중, 문득 [발해고]가 눈에 띄었다. [열하일기]나 [죄와 벌]과 같은 책들은 많은 곳에서 ’고전’ 또는 ’인문고전’으로 소개되어 있는 [발해고]는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만 사놓고 아직 읽어보지는 못함...ㅋ)
 
어떤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 책을 ’우리 사학사에서 최초로 발해사를 체계화시킨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의 저작이 완역’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실제 [발해고]는 1784년(정조 8)에 지은 것으로 한국 최초의 발해사이다.
 
[발해고]는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책 수십 종을 참고하여 발해((渤海, 존속 기간: 698년 - 926년))의 역사를 기록하며, 발해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포함시킨 책이다. 저자인 유득공은 이 책에서 고려가 발해사를 우리역사에 포함시켜 남북국사를 쓰지 않았던 점을 통렬히 비판했다. 발해고의 서문에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아 고려가 끝내 약소국이 된 것 ... 참말로 한탄스럽다”고 썼다. 그러면서 고려 또는 고려 이후의 한반도 국가들이 발해의 영토를 되찾으려해도 근거가 없어져버렸다고 통탄한다. 
고구려의 후예 국가인 발해가 멸망하면서 만주 대륙은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영토가 되고 말았다. 유득공은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며 민족사의 무대를 한반도로 가두고, 중국의 시선으로 역사를 보던 당시의 풍토를 비판한 것이다.

당시 실학자들에게는 이처럼 기존의 시야를 넘어 역사를 널리 확장해서 보자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는데, 박제가도 이 책의 서문에서 “압록강 밖으로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던 역사를 한탄하며 이 저술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동북공정으로 중국이 우리의 북방사를 자기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고 고대사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상항에서 유득공의 [발해고]는 후손들인 우리가 한 번 쯤 읽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고 만주 땅이 우리 땅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역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밝히고 증명하고 정리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유득공의 저술이 의미 있는 것은 이 저술이 감정적 언사나 주장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당시 실학 시대의 영향으로 옛 문헌에 대한 고증과 나름의 과학적인 지명 추적 등으로 확실한 증거를 통해 이 저술을 완성한 점에 있다.  
 
----------------- 저자 유득공(柳得恭)은 누구인가? --------------------
자는 혜보(惠甫), 호는 영재(泠齋)·고운(古芸)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서족 출신으로, 20대 시절부터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로 불린다. 정조의 지우를 입어 규장각 검서(檢書)로 발탁된 뒤, 제천·포천·양근 군수 및 풍천부사를 역임하는 등 내외직을 오가며 국고·문헌 정리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조선후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발해고(渤海考)]를 편찬하였으며, 우리나라 옛 도읍지를 돌아보고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지었다.
연행을 세 차례 다녀왔는데, 1790년 열하를 다녀온 뒤에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를 지었다. 이 작품에는 연행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예리한 시선과 섬세한 필치로 형상화한 유득공의 빼어난 시들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화이론(華夷論)과 같은 중국중심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주체적 역사의식이 담겨 있어 여타의 연행록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받고 있다.
이외에도 [영재집(泠齋集)], [사군지(四郡志)],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경도잡지(京都雜誌)],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 [병세집(竝世集)], [발합경(??經)], [삼한시기(三韓詩紀)] 등의 저술이 있다. -------------------------
 
이 책은 저자의 유득공과 발해고에 대한 총평, 박제가의 서문, 유득공의 서문, 인용한 문헌, 그리고 [발해고]의 본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해고]의 본문은 발해의 역대 임금, 발해의 신하들, 발해의 지리, 발해의 관직, 발해의 의장, 발해의 특산물, 발해의 언어, 발해의 외교 문서, 발행의 후예로 나누어져 있다. 
<군고>는 역대 왕의 약전과 사적이다. 대조영의 아버지 진국공(震國公)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으로 고구려에 귀순한 사람이라고 했다. <신고>는 열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약 83인의 인물이 수록되었다. 비록 짧은 기록들이기는 하나 사실만 간략하게 적었을 뿐 주자학적인 가치평가나 사론은 없다. 지리는 5경15부62주를 <신당서>와 <청일통지 淸一統志>에 소개된 내용으로 각각 전재했다. 지명마다 저자의 고증은 붙이지 않고 끝에 5경의 위치와, 발해와 신라의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간단한 비평과 고증을 했다. <의장고>는 공복제도, <물산>은 토산물이며, <국어>는 발해의 칭호로, 왕을 가독부(可毒夫)·성왕(聖王)·기하(基下), 명(命)을 교(敎), 왕의 부친을 노왕(老王)이라 했다고 한다. <국서>는 무왕·문왕이 일본에 보낸 것이다. <속국>은 정안국(定安國)에 관한 것으로 마한의 종(種)이라고 보았다.
 
유득공은 발해가 망한 후, 이 지역에는 여진과 거란이 들어왔는데, 고려 정부가 급히 발해유민을 통해 발해사를 편찬해 이 지역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1명의 장군만 보냈으면 쉽게 토문(土門) 이북과 압록 이서지역을 장악했을 것이라 했다. 발해의 국가체제는 <군고 君考, <신고 臣考>, <지리고 地理考>, <직관고 職官考>, <의장고 儀章考>, <물산고 物産考>, <국어고 國語考>, <국서고 國書考>, <속국고 屬國考>의 9고(九考)로 구성했다. 이는 정사(正史)의 세가(世家)·전(傳)·지(志)의 형식을 딴 것이다.


[발해고]의 분량은 많지 않고 <의장고> 이하는 더욱 간략한데, 이는 자료부족 때문이다. 저자는 10만의 발해유민이 고려에 귀순했음에도 고려가 발해의 자료를 보존하지 않아 결국 문헌이 산일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자료는 책머리의 인용서목에 따르면 [삼국사기, [고려사] 등 우리나라 책과 [당서 唐書], [오대사 五代史], [요사 遼史], [송사 宋史], [일본일사 日本逸史], [속일본기],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 [성경통지 盛京通志], [문헌통고], [통전 通典], [만성통보 萬姓統譜] 등 22종의 책을 참조했다. 기사에는 일일이 주나 출전을 밝히지 않았으나 고(考)마다 끝에 ’안’(按)이라고 하여 큰 문제에 대한 자료비판과 고증을 달았다. 

 
[유득공은 서문]에서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 저술을 “사史라고 자처하지 못하고 고考라고 한 것은 사서로서 체계를 못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스스로 이 저술이 가진 사서로서의 부족함을 토로한 것인데, 그 부족함이란 유득공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즉 사서가 남겨져야 했던 시점이 한참 지난 후대에 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유득공은 고려에 저술되어야 마땅한 것이 조선 후기에 와서야 씌어진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유득공은 한탄만 하지 않는다. 발해가 언급된 무수한 사서들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참조하면서 발해사를 다시 쓰려 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발해와 관련된 사실史實들은 그의 검증 작업을 통해 체계화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서자 출신임에도 능력을 인정하고 등용한 정조의 배려에 의해 가능했다. 정조는 유득공에게 평생 방대한 문헌들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검서관 직함을 맡겼는데, 이것이야말로 [발해고] 저술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유득공은 수차례 중국을 다녀오며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이론을 만들어 나가는 고증학이라는 선진 문물을 접한 후 그 선진적 방법을 사용하여 [발해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유득공의 한반도에 대한 역사관은 단군 조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792년(정조 16년) [사군지 四群志]에서 단군 조선, 기자 조선, 위만 조선의 ’3조선 시대’를 거쳐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의 4군 시대, 2군 시대(현도군과 낙랑군), 그리고 3군 시대(현도군, 낙랑군, 대방군)를 지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립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3국 시대는 다시 ’남북국 시대’(발해와 통일신라)로, 그 뒤에는 고려로 이어지면서 발행 영토의 대부분을 여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고려의 뒤를 이었으므로 그 뒤로는 여전히 우리의 옛 판도를 모두 보유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득공은 우리나라의 통일은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신라와 발해가 양립했던 남북국 시대 이후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여진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사의식은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자유로운, 한국사의 무대를 북방 만주 대륙으로 확대하여 바라보았던 조선 후기의 역사가인 안정복이나 김정호 등 학자들의 인식 체계에 바탕이 됐으며,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며 우리 역사 인식에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과거의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 대신 ‘남북국(南北國)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1990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소단원을 ’남북국시대’로 변경하시 시작하였고 함). 남북국 시대는 유득공이 최초로 만들어낸 개념으로, 발해를 우리 역사 속으로 편입시킨 개념이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남북국시대’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침탈한 후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통일신라 시대’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사관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1980년대까지 교과서에 사용된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국 역사학계에 일제에 의해 교육을 받거나 일본식 사관에 젖어든 채 한반도 역사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 및 재연구를 진행하지 않은 역사학자들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이승만은 일제 앞잡이들로 구성된 정부관료로 구성되어 있었고 박정희 역시 일본군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곡 그들이 정치권과 학계에서 사라질 때까지 발해는 한반도의 역사로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했다. 이 또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이며, 일제 잔재로서 청산해야할 대상이다.
이 용어가 교과서에도 사용된 것은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발해사를 한반도의 역사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유득공의 역사 인식이 타당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발해고]는 한반도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시키고 한국인의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정치와 역사관에 대해서도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에서 선택, 결정, 실행하는 것들이 500년, 1천년 뒤의 역사와 후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려의 태조 왕건이 발해로부터 유입된 왕족과 신하, 유민들을 통해 ’발해사’를 정리하고 이후 고려가 융성할 때 거란족이나 여진족, 이후 만주에 흩어진 각종 만주족들을 정벌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으면 조선시대 이후의 한반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한국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21세기는 분명 지금과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 뿐 아니라 21세기 현대에도 마찬가지의 교훈이 적용될 수 있다. 현재 이명박 정권과 정당, 사법부와 학자들,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100년 뒤, 1천년 뒤 우리의 후손들이 그 결과를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관료독재, 언론독재, 재벌독재, 기득권독재로 유지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한-미 FTA와 한-EU FTA가 어떤 사회경제적 폐해를 가져올 것인가? 남북 화합이 아닌 남북 대결 구조가 또다시 전쟁을 불러올 것인가? 정치권과 언론계, 사법부와 지식인사회, 시민단체와 국민 개개인은 이런 질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안들을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다양한 계층과 세력들간의 협의와 타협에 기초하여 판단되어야 한다.
 
정조시대 유득공과 실학자들이 제시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 ’경세치용’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폭 넓은 이념적, 학문적 논의와 실험을 폭력으로 짓밟은 조선국의 말로와 조선 민중의 파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2011년 7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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