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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ㅣ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평점 :
14권의 부제는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14권은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서기 337년부터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사망한 서기 397년까지의 60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안토니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기독교를 정착,확산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부분적으로 몇몇 황제들이 이를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로마제국의 시스템은 완벽하게 붕괴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로마 전역에 말기 암처럼 자리잡았다.
결국 서기 388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다.
하지만, 이미 그 시기에 로마제국은 사실상 더 이상 기원전 8세기부터 이어온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가 ’로마’일 수 밖에 없었던 시스템, 원로원, 사업체계, 문화, 로마군, 시민권, 외교, 치안, 자치도시, 속주민, 인프라, 다신교 등은 사라졌으니까...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권력을 ’신격화’할 목적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후 죽으면서 아들 3명과 조카들에게 로마 제국을 5개로 나누어 ’몫’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생각과 달리 역시 유일신 체계에서는 ’신격화할 황제’는 한 명이어야 했다.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숙부와 황제인 사촌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누스를 궁정에서 살해하였고 맏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는 3년 뒤 막내 콘스탄스와 내전에서 피살, 막내 콘스탄스는 13년 뒤 로마군 내부의 마그넨티우스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로마식 전쟁을 모르는 이들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휘하의 장병 수 만명을 그 내전으로 잃게되고 로마군대는 결정적으로 취약해졌다.
그리고 사촌이었던 갈루스는 17년 뒤 콘스탄티우스에게 처형당한다.
로마제국이 더 이상 ’로마’가 아니도록 마지막 쐐기를 박은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우스 부자(父子)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제국의 황제 명의의 재산을 기독교 교회에 기증했다.
기독교 사제들에게 공무를 면제시켜주고 인두세까지 면세시켜주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면세받던 기독교 관계자의 범위를 사제에서 교회의 고용인이나 농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확대하였다.
그리고 성직자가 되면 사유재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는 로마제국 내부의 귀족, 부자와 기사계급들에게 재산을 지키고 늘릴 수 있는 ’구원’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성직자가 되어야 함을...
콘스탄티우스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로마의 전래 종교를 배척하기 시작한다.
우선 로마 전래의 신들에게 바치는 공식제의와 기타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고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법률을 공포한다.
그리고 신전을 폐쇄한다. 이 신전은 로마의 신전 뿐 아니라 시리아의 태양신전과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도 폐쇄한다.
신전을 건축 자재로 재활용하는 것을 허가한다. ’재활용’은 ’파괴’보다 치사한 잔머리...
기독교를 열심히 부흥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제국 통치는 엉망이었다.
황궁에서는 궁정관료들의 중상과 비방에 따른 희생이 일상적인 행사가 되어 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장교들이 황제 암살음모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후임 장교인사에도 실력보다 궁정관료나 환관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로마군대와 실력있는 행정가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페르시아와 치른 메소포타미아 전쟁에서 대패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페르시아에서 패한 콘스탄티우스는 부제 율리아누스가 오랜 기간 갈리아와 도나우강 전선의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키워놓은 로마군을 빼앗으려 했으나 로마군대의 반발로 무산된다.
율리아누스의 갈리아 군단은 콘스탄티우스의 결정에 반발하면서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내전이 시작된다.
다행하게도 콘스탄티우스는 내전을 준비하다가 병으로 쓰러지고 서기 361년에 죽었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우스 부자가 기독교를 우대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종교를 인정받고 로마제국의 상대한 재산을 기증받은 데다가 성직자의 면세와 사유재산을 통하여 엄청난 부를 취득,확보한 기독교도들은 ’삼위일체’이나 ’경전의 해석’으로 첨예한 내부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기독교에서는 ’이교’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해놓았으니 기독교 내부의 ’이단’을 처리할 차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단’은 ’이교’보다 더 잔인하고 철저했다.
서기 361년에 황제로 즉위한 율리아누스는 궁정을 구조조정하고 종교정책을 ’밀라노 칙령’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그래서 후대의 기독교도들에게 율리아누스는 ’배교자’로 불리운다. 그런데 원래 기독교가 아니었다는데 웬 ’배교자’??)
로마군대를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갈리아 지역에 감세법을 실시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가 실패한 페르시아 원정을 개시한다.
하지만, 원정에 실패하고 철수하는 도중에 경호대원에게 살해당한다.
작가는 율리아누스가 일찍 죽지않고 오랫동안 로마제국을 통치했다면 로마제국의 마지막 역사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라 아쉬워한다.
하지만 율리아누스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이미 로마 제국의 운명은 다하지 않았을까?
율리아누스의 후임인 요비아누스가 재임기간 7개월 동안 한 일은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율리아누스가 시행한 법률과 정책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 뒤에 즉위한 황제는 발렌티아누스와 발렌스 형제...
야만족인 게르만족 출신의 발렌티아누스는 즉위 후 10년 동안을 새로운 야만족인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픽트족, 스코트족, 앵글로족, 색슨족, 고트족, 훈족, 사막민족과 전쟁으로 보낸다.
서기 375년 발렌티아누스가 병사하고 발렌스와 발렌스의 아들들인 발렌티아누스 2세와 그라티아누스가 맡는다.
하지만 3년 후 고트족과 치른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발렌스는 살해된다.
그리고 그라티아누스에 의하여 테오도시우스가 동방 황제에 임명된다.
서기 380년 그라티아누스가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령관 막시무스의 공격을 받고 살해된다.
이 때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실질적으로 제국 전역을 통치한다.
발렌티아누스 2세는 서기 392년 데살로니카에서 군대 폭동 중 살해된다.
’배교자’를 응징한 것일까?
테오도시우스는 ’반이교’와 ’반이단’ 노선으로 직행한다.
기독교 이외의 공식 제의 뿐 아니라 사적인 제의도 금지한다.
제단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 향을 피우는 것, 벽면을 꽃장식으로 장식하는 것, 신이나 조상에게 술을 바치는 것도 금지한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탄압한다.
카톨릭 이외의 기독교 종파는 ’이단’으로 규정하여 탄압한다.
서기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을 협박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법률을 통과시킨다.
서기 393년에는 올림피아 경기대회를 완전히 폐지한다.
테오도시우스는 이 것 밖에는 한 일이 없다.
작가는 상당히 지면을 할애하여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서기 330년에 로마에서 명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수도장관까지 자리에 올랐다.
그는 43세에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주 아이밀리아의 장관을 맡았다.
그의 관할도시인 밀라노에서 기독교도간 파벌싸움 -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파 - 이 물리적인 실력 행사를 동반한 항쟁으로 발전했다.
장관인 그가 이 분쟁을 중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파가 암브로시우스가 마음에 들어 신도집회를 통해 그를 주교로 선출했다.
그는 주교 자리를 제공받자마자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는 주교관을 머리에 쓴 직후에 자신의 재산을 기독교회에 기부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는 운이 좋았다. 밀라노는 동방과 서방 황제들이 서로 협의하거나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가는 코스였던 것이다.
그는 주어진 운에 자신의 수완을 발휘하여 크라티아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가까운 관계를 만들었다.
야만족 족장과 교섭할 때, 동료 황제의 특사로, 반란을 일으킨 군단장을 설득할 때 황제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그러다가 테오도시우스의 실책을 빌미로 황제에게 교회에게 참회하도록 요구하여 성공한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가 생각한 ’신격화된 황제’는 ’유일신 아래의 황제’로 격하되기 시작한다.
13권의 부제인 ’그리스도의 승리’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과연 기독교가 애기하는 그리스도가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원했을까?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세 1,000년을 가져온 기독교도들이 하늘나라에 갔을 때, 과연 유일신만을 믿었다고, 죽기 전에 참회했다고 천당으로 보냈을까?
내 생각에 기독교의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그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말짱 도루묵이니까...^^
[ 2010년 10월 0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