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7 - 악명높은 황제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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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의 부제는 ’악명높은 황제들’이다.

7권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새로운 임페라토르로 등극한 서기 14년부터 다섯 번째 임페라토르인 네로가 암살된 서기 68년까지를 다룬다. 
로마제정의 통치자는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칼리쿨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로 이어진다.
이 닷서 명의 통치자 중 3명이, 7권 기간인 54년 동안에 자살 또는 타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로마의 제정체제는 확고하게 정착되는 동시에 제정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역기능이 반대급부로 나타난다.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로마의 두 번째 통치자인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의 자손이었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하지만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면서 이름마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핏줄로 제정을 이으려는 집념이 강했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인 게르마니쿠스에게 통치자를 물려주기 위한 징검다리 통치자로 지명되어 임페라토르에 등극한 뒤에도 아무런 불만 없이 선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재임 중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인 칼리쿨라를 후계자로 지명해 놓는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정착시킨 로마 제정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고자 하는 데 자신의 임기를 모두 바쳤다.
아무리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당시 로마의 귀족으로 태어난 그로서는 남모를 울분과 분노를 삼킬 수 밖에 없었을 터...
그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채찍질하였고 그래서 말년에 로마 근처 쏘렌토 반도 인근 카프리섬에 쳐박혀 통치자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년의 모습은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반감을 샀다.
 
티베리우스는 동시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와 중세 시대 역사가들에게도 줄곧 나쁜 평가를 받아왔다.
다행히 근대 이후 많은 사적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티베리우스의 통치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이 들어나면서 ’나름 훌륭한 통치자’로 복권되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가 제정을 다지고 로마의 궁극적인 3대 과제 - 방위, 식량, 내정 -에 기여한 것은 큰 편이다.
그는 임기 초기의 군단 봉기를 제압하고 재임 기간 내내 긴축 재정을 실시하여 재정 건전성을 높였으며,
라인 강 국경을 확정하고 방위체계를 구축하고 군사력을 기반으로 동방의 아르메니아-파르티아와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안정시켰으며,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하여 군단기지를 세우고 속주를 재편하면서 방위체계를 구축하고 두 번에 걸친 로마 시내의 화재를 복구하였다.
그리고 근위대 막사를 수도인 로마 부근에 배치하여 근위대 9,000명이 통치자의 보호와 로마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한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족운이 따르지 않았다.
큰아들 드루수스가 35세의 나이에 죽고 가족 중에 반정을 꾀한 자를 유배시키는 등 가족과도 계속 불화가 있었다.
그는 카프리섬의 별장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77세, 23년간 통치...
 
세 번째 통치자는 약관의 나이 24세의 칼리쿨라.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였다.
칼리쿨라는 티베리우스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였고 본인도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는 임기 첫 해를 시민들에게 선심을 써서 인기를 얻을 전차 경주와 체육대회, 검투사 시합으로 보냈다.
물론, 로마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신설(신규 수도 라인 건설 착수), 유지하는데도 앞장섰다.
로마 시내의 화재에 대한 피해를 국가가 전액 보상해 준다.
매상세 1%를 폐지하고 대규모 유흥 선박을 건조한다.
대부분의 정책이 ’인기 영합’에 따랐다.
 
다만, 그는 재정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부유층을 타깃으로 하여 ’국가반역죄’로 자신의 누이동생들을 유배시키고 군단 사령관에게 자살을 명령한다.
사소하고 자잘한 세금항목-땔감세,공창세,짐꾼,상속세갈취-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도 버림받기 시작했다.
결국, 칼리쿨라는 근위대 대대장에게 살해된다.
그의 나이 28세, 3년10개월간 통치...
 
그리고 국방과 외교정책도 실패했다.
특별한 의미없이 게르마니아 원정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유대교도를 차별적으로 대했으며,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왕국과 브리타니아에도 위기의 싹을 만들었다.
 
여기서 작가의 명언 한 마디...
"테러 행위은 문명이 미숙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선거로 낙선시키는 수단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죽이면 정치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미국과 모든 제국, 그리고 독재자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
공식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그는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고 칼리쿨라의 숙부인 명문 귀족 출신이다.
갈리아 속주(리옹)에서 아버지가 총독으로 근무했던 시절...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의 딸이다.
 
근위대들은 칼리쿨라를 죽인 뒤 칼리쿨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어 근위대 병영으로 데려가 ’황제’라는 환호를 받게 한다.
본인도 예기치 못한 등극이었고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고...
다행히 칼리쿨라를 죽인 근위대 대대장 2명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죽음에 승복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살해에 가담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역사가였고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를 절었다고...
그는 통치자가 되기 전에 <에트루리아 역사> 20권과 <카르타고 역사> 8권, 그리고 키케로의 전기를 썼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칼리쿨라의 실정을 뒤처리 했다. 
재정을 다시 건전하게 돌리고 수도공사를 재개하였으며,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최고의 설비로 갖추도록 공사에 착수한다.
또한, 중부 이탈리아의 피치노 호수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바꾼다.
매상세 1%를 부활시키고 구경거리와 검투사 시합을 축소한다.
칼리쿨라가 실패한 방위/외교 문제 - 마우리타니아,유대교,브리타니아- 도 안정적으로 정리한다.
 
제정 체계도 개편한다.
통치자 아래에 ’비서관 체계’를 구축하고 34년 만에 국세조사를 실시하여 징세의 폭을 넓혔으며,
우편제도를 재편하고 원로원에 갈리아인을 받아들이도록 개혁했다.
노예해방 규제법도 신설...
 
클라우디우스도 비서실장인 해방노예 나르키소스와 아내인 아그리파나 사이의 분쟁과 갈등을 겪으며 말년을 보낸다.
그리고 어느날 죽었다. 역사가들은 아내가 클라우디우스에게 독버섯을 먹였다고 말한다.
이?날 네로가 근위대장과 나란히 황궁에 나타났다.
그의 나이 63세, 13년간 통치...
 
다섯 번째 통치자인 네로... 그 유명한 네로...   
 
클라우디우스의 사망을 확인한 네로는 곧장 근위대 병영으로 가서 근위병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는다.
원로원도 재빨리 17세의 네로에게 전권을 부여키로 의결한다.
네로는 근위병들에게 1인당 15,000 세스테르티우스의 증여금을 약속했다.
네로는 원로원 연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돌아가고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하며 사법집행에 관여하지 않고 사저와 관저를 분리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네로에게는 세네카라는 원로원 의원이 한동안 정책을 보좌했다. 근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파나와 갈등이 심했다.
아그리파나는 공석, 사석에서 자신이 네로를 통치자,황제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네로에게도 그 말을 계속 주입했다.
네로가 그녀의 양자 브리타니쿠스를 죽였을 때 권력을 상실할 우려를 하고 맹렬하게 반격하다가 네로에게 살해된다.
네로는 여자 문제로 어머니와 갈등이 심한 끝에 해방노예와 근위대를 시켜 어머니 아그리파나를 살해한다.
 
그 이후 네로의 선정과 악정이 복잡하게 얽혀진다.
세네카의 퇴장과 부루스의 사망도 영향을 일부 미쳤을 것이다.
선정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여 그 후 400년 동안이나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악정으로는 그리스 올림픽을 빗대어 로마 올림픽을 창설하였다가 몇 년 후 네로 사후에 비웃음만 받고 없어졌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와 전투와 외교에 실패하여 분란의 싹을 남겨놓았다.
로마 대화재 발생 후 후속처리에 미숙하여 원로원과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역사적 사실은 로마 대화재 발생시 네로는 로마 시내가 아닌 50km 떨진 해변도시 안치오에 있었다.)
그리고 로마 대화재를 기독교도의 방화로 몰아 200~300명을 처형한다.
임기 말에 황제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20~30명의 원로원 의원과 근위대 간부들이 처형된다. 군단병들의 반란 음모도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그 후 속주 총독 3명이 네로에게서 자살을 강요받았다.
 
네로와 관련하여 작가의 말...
"존경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존경받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플러스 알파’, 즉 파급효과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심성의껏 해나가면 남들도 알아줄 거라고 믿어 버린다.
유감이지만 인간성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인간이란 존재는,마음 속으로는 남에게 기분좋게 속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재주의 달인이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인에기는 두말할 여지없는 ’신격’으로 자리잡고,세계 역사에서도 제일급 스타라는 사실이 인간성의 이 진실을 증명해 주는 건 아닐까 "
 
네로의 임기 말 갈바 숙주 총독 루푸스가 反네로의 깃발을 들고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오토와 베티가 속주 총독대리 카이키나가 갈바를 지지한다.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과 저지 게르마니아 군단은 중립을 지켰다.
갈바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자 네로의 측근들은 사라지고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네로는 로마 교외로 도망치다가 병사들에게 포위되자 자결한다.
그의 나이 30세, 24년간 통치...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실제 7권의 통치자 4인에 대한 작가의 평가 결과는 부제와 달리 그다지 ’악명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칼리쿨라가 조금 모자란 것 같기는 하지만...
칼리쿨라와 네로가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잊고 자신의 취향을 멋대로 부린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로마의 3대 과제인 방위, 식량(경제), 내정(사회간접자본 포함)을 망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그런 부족한 통치자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개척하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뿌리내린 제정의 시스템 덕에 굳건하게 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쿨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마지막 죽음은 역으로 통치자 일인이 전권을 쥐게되는 제정 시스템은 항상 반란과 암살, 테러를 맞이할 수 있는 구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로마 제정의 한계이기도 했다.
 
다시 작가의 말...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 로마와 유대교 -
작가는 7권에서 로마와 유대교 및 기도교와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길게 정리한다. 
로마는 건국이래 서기 4세기까지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의 종교정책을 유지했다.
전쟁으로 지배한 지역의 신까지도 포용하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위대한 통치자도 신격화한데다가 ’관용’같은 개념에도 신격화를 시도했다.
따라서 로마에는 신부나 목사, 전도사, 제사장과 같은 종교 직업군이 없었다.
다만, 모든 신들의 으뜸신을 유피테르신으로 모시고 1년에 한 번, 그리고 개선식 등에서 집정관이나 통치자가 예를 갖춘다.
즉, 로마인에게는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신이 도움을 주는 정도로 신의 지위에 선을 그었다.
그런 면에서 유일신을 추구하고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유대교나 기독교도는 로마에 적합하지 않았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데 있었다.
패배한 여러 민족 중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유대의 헌법인 모세의 ’십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우상처럼 받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다신교가 지배적인 당시 시대에 살면서 유대교가 그것을 지키려면,
그것도 약자의 처지에서 지키려면 ’선민사상’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예를 들어, 로마와 그 속주, 자치국들이 군사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로마 제국의 방어선을 지키고 전쟁을 치를 때,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군대에 지원하지도 않았고 행정력에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칼리쿨라나 네로처럼 일부 통치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로마 지도자들은 외국에서 다른 신을 모시고 믿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포용하였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통치자들은 유대교도에게는 한 단계 더 자치를 인정하였다.
유대 속주에서 살인이나 일부 죄를 제외하고는 유대교도 자체의 사법 체계도 인정하였고
군무나 공무도 면제해 주었으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갖고 싶은 요망도 인정했다.
(예수는 당시 유대 행정장관인 빌라도가 제대로 로마 법을 집행했다면 사형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는 자신이 신이라고 자처하더라도 사형을 받을 만한 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빌라도는 그런 실정 등의 사유로 행정장관에서 짤리고 로마에 호출된다.)
 
그럼에도 종교 때문에 유대교 내부의 혼사를 장려한 유대민족의 많은 수는 거주지를 도시로 택했다.
그것은 도시에 살아야만이 경제적인 부를 이룰 수 있기 때문...




 

[ 2010년 9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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