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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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6>의 부제 : 팍스 로마나

6권은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새로운 최고사령관과 제일인자로 등극한 기원전 29년부터 그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한 서기 14까지를 다룬다.
옥타비아누스는 34살에 지도자로 등극하여 77세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어 40년간 통치하면서 로마를 공화정 체제에서 제정 체제로 확립시켰다.
그가 40년이란 긴 시간동안 최고일인자로 로마를 통치했던 것이 로마를 제정으로 확고히 다지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초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정원을 900명에서 600명으로 줄이고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였다.
반대파를 물리치고 집권하였으나 숙청하지 않은데다가 ’공화정으로의 복귀’까지 선언하였기에 원로원과 귀족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안심하고 환영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제정체제에 가장 중요한 집정관, 최고사령과, 제일인자, 호민관특권 등의 권력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호칭을 얻는다.
아우구스투수 이후의 로마 제일인자이자 황제들은 모두 공식 명칭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이 따라 붙는다.
그는 50만명이나 되는 로마의 군대를 절반으로 감축하여 재정의 부담을 구조적으로 감소시켰으며, 국세조사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틀를 재정비했다.
훗날 ’황제묘(마우솔레움 아우구스타)’를 건립하여 황제들에 대한 신격화를 앞장서서 실현했고 카이사르가 처음 실시한 원로원고 국가정책에 대한 정보공개를 확대 실시하였다.
상설 내각과 국세청과 같은 기관을 창설하고 화폐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근위대를 창설하고 세제를 개편하였고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방위선을 재편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통치시절에 들어서서 로마와 로마의 세력권에 포함된 자치국, 속주국가들은 로마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 시대에 들어선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 군대에 의하여 세력권의 평화가 유지되다는 의미, 즉 자치국과 속주국가들은 내정과 경제에 집중하기만 된다는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카이사르가 시작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이래 로마가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릴 때까지 무려 200년간 지속된다.
그 기간 동안 로마는 ’팍스 로마나’의 책임자로서 로마 군대를 이끌고 가끔씩 제국 내부의 반란, 이민족의 침입, 분쟁조정 등을 치르게 된다.
(여러가지 면에서 20~21세기의 ’팍스 아메리카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작가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야기할 때 ’균형감각’을 제시한다.
그가 카이사르의 제정을 충실히 구축하면서 동시에 반대파인 원로원의 요구도 충실하게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그 양 극단에 휘둘리지 않고 양쪽을 쉼없이 움직이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갔다는 것...
천재적인 자질을 가졌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행정적인 성과를 이룩한 양아버지 카이사르와 비교되면서 로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것에 후한 점수를 준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로마 정계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권력쟁탈전에 뛰어든 안토니우스와의 전투에서 당당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일인자로 당당히 등극할 수 있었다.
그가 안토니우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국내외 정치,외교에서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명장 아그리파 장군과 마이케나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그리파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여주었고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선발한 사람이었고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야망보다 권력자의 성공에만 주력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옥타비아누스는 여러가지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전임 황제인 카이사르가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방위선을 구축한데다가 여러가지 법률과 정책으로 제국의 기틀을 갖추어 놓았고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까지 갖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원로원은 공화정을 담당할 능력을 한동안 상실한 상태였고 로마 시민들 역시 카이사르가 통치한 시기의 전과 후를 겪으면서 제일인자 통치체제가 가장 당시의 로마에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물론,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고 해서 누구나 그 조건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조건이 갖추어진 시대에 맞게 로마를 완벽하게 제정으로 확립시키는 시대에 타고난 것이고 그에 걸맞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수 많은 왕과 집정관, 황제, 장군들 중에서 드물게 후세 역사가들에게 위대한 통치자로 인정받게된 것이다.
그 시대에 걸맞는 지도자가 존재하는 사회는 운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그런 지도자의 출현 자체도 그 사회의 당연한 역량일까...
 
옥타비아누스는 40년간의 성공적인 치세와는 다르게 카이사르처럼 가족사는 불행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듯이 말년에 후계에 대해 상당히 집작하였다.
직계손자 중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일찍 죽었고 게르마니쿠스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는 법률을 제정하면서까지 가정의 소중함을 로마에 심고자했지만,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외손자 아그리파 포스트무스, 외손녀 율리아를 처벌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로마의 제정을 ’제국주의’ or ’독재국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로마의 제정은 근현대 관점에서 당연히 독재이고 제국주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1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로마의 제정을 평가해보면 현대의 평가결과와 다르지 않을까 싶다.







 

[ 2010년 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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