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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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의 부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하)’다.
작가는 15권 중 무려 2권에 카이사르를 할애했다. 거의 카이사르 전기 같다...

제5권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기원전 49년부터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승리한 기원전 30년까지를 다룬다.
 
그 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반대판 장군이던 폼페이우스측과 마르세유,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디카리움에서 계속 전투를 치른 후 결국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대파하여 로마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여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 후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파르케나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로 돌아온다.
소아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 원로원에 보낸 편지 내용이 그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였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왕국과의 전쟁을 마친 후 로마 제국의 영토 경계를 확정한다.
북으로는 북해, 남으로는 사하라사막, 서로는 이베리안반도, 동으로는 라인강과 도나우강, 그리고 소아시아와 시리아, 유대왕국까지...




카이사르는 그 이전의 승리자들과 달리 내전에서 승리한 후에도 반대파와 군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편다.
(하지만, 결국 그 관용정책이 불씨가 되어 나중에 살려둔 공화정주의자들에게 암살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원로원과 민회를 권력을 약화시키고 1인 중심의 집권체제를 구축한다.
그는 거부권을 행사하는 ’종신독재관(딕타토르)’, 최고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호칭인 ’임페라토르’와 ’조국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 ’호민관 특권’ 등등....
 
로마의 ’제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페르시아나 이슬람,히틀러, 영국, 미국의 ’제국’과는 체계가 많이 다르다. 그것은 공화국과 제국의 절묘한 줄타기와 같다.
카이사르 당시, 그리고 로마 말기까지도 ’임페라토르’가 곧 ’황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에게만 부여되는 칭호였다. 다만, 카이사르는 일시적으로만 사용되던 ’임페라토르’를 언제나 사용할 수 있게된 것 뿐이다.
단지 중세 이후 사람들이 라틴어 ’임페라토르’를 번역할 때, 황제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페라토르’나 ’종신독재관’, ’조국의 아버지’, ’호민관 특권’ 등은 모두 기존 공화정 체제에 존재하던 직책이었고 카이사르가 그 모든 권력과 지위를 동시에 누렸던 것이다.
영어로 7월인 July(라틴어로는 율리우스)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게 헌정한 것이다.
실제로 그 모든 직책과 호칭, 그리고 법률 제정과 외교수립 등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쳐야했고 시민들에게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카이사르 이후 일인자였던 네로와 칼리쿨라, 도미티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공화국의 역적’으로 사전,사후에 단죄되기도 했다.
절대왕정이나 제국의 황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 체제는 카이사르 이후 아우구스투누스를 이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에도 동일하였다.
카이사르나 그 이후 일인자들이 그렇게 제정을 구축한 이유는 귀족, 기사계급, 시민, 평민들이 기원전 509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공화정 체제 중에서 원로원의 무능을 경멸하기는 했지만, 공화정 체제 자체에 대한 믿음은 줄 곧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일인체제를 구축한 후 대대적인 체제개혁에 나선다.
달력을 개정하고 통화제도를 개혁했으며, 원로원과 시민권을 속주민에게도 개방했다.
외지인이라도 로마 내에서 의사와 교사업무를 할 경우 시민권을 주었으며, 금융과 행정부분도 개혁했다.
재판 배심원의 수와 계급을 확대하고 사회복지제도도 개편한다.
카이사르와 로마는 이 모든 것을 법률을 제정,개정하면서 완성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한 말은,
"종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철학은 그것을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에게 소크라테스의 교묘한 논법으로 접근한다 해도, 철학이 그 사람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처형을 아테네 시민이 압도적으로 찬성한 사실은 이런 종류의 ‘바로잡기’가 지닌 영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법률은 다르다. 법률은 종교를 달리하거나 철학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의 제국을 이룩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로마 가도와 로마 통화 및 로마 달력과 더불어 로마 법률도 ‘로마 세계’의 공통항으로 만들어야 했다.
법의 정신은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범이 아닐까... "
 
로마의 법 체계는 근대 이후 서구의 법 체계를 결정지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심원 제도와 변호사가 검사로 나설 수 있는 제도, 로스쿨 효시, 법률 제정시 입안자의 이름으로 명기하는 방식(예를 들어, ’밀 배급에 관한 율리우스법’), 현실에 맞지 않는 법률의 경우 폐기하기 보다 개정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방식 등....
 
4권과 5권(그리고 6권)을 읽다 보면, 왜 그를 서구인들이 칭송하고, 추앙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법 하다.
말하자면 근대 이후의 서구(미국 포함)는 카이사르에 의해 규정된 셈이기 때문이다.
로마를 건국한 이는 로물루스이지만, 유럽을 문명화시킨 장본인은 바로 카이사르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수렵민족이던 이베리아반도와 갈리아족을 농경민족으로 탈바꿈시키고 문명화시켰기 때문에 이후 갈리아가 프랑스, 독일, 스위스, 네덜라드, 벨기에, 스페인, 포루투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행운아이기도 하지만 그의 가족은 불행했다.
직계 자손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병사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핏줄로 제정을 완성하고자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동생인 율리아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입적하고 후계자로 키운 것이 그나마 로마 제정의 기틀을 제대로 수립하게 된다. 
 
이 책은 일종의 역사서, 고대로마사이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의 관계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사 과정에 나타나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영리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잠깐 애인’ + 속국의 여왕 정도로 생각하면서 상대하고 말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야심을 가지고 선택한 안토니우스는 일인자 역량은 커녕 말년에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못난이’였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로마 역사 1,200년 중에 가장 뛰어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다.
로마가 공화정 체제에서 꺼꾸러지지 않고 제정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영토를 확장하고 그 영토 속에 편입된 수 천만 명의 인구를 ’로마 체제’에 동화되도록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사회, 문화, 인프라 등 모든 부분을 정착시켰다.
로마 역사에서 그의 업적은 건국 후 700년 정도에서 멸망할 수도 있던 로마의 운명을 500년 동안 더 연장할 수 있게끔 전환시킨 것이다.
 
2,000년을 뛰어넘는 시간적 차이, 그리고 지중해와 한반도의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위정자들과 우리들이 카이사르와 로마에서 배울 점은 무지무지하게 많아 보인다.
물론, 카이사르가 직접 말한 대목이 있긴 하다.
"인간은 보통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보이는 것만 본다..."

 

[ 2010년 9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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