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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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의 부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상)’이다.

작가의 < 로마인 이야기 > 전15권 중 네 번째 책으로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의 로마사를 다루었다.
이 시기는 카이사르가 태어나서 로마의 전권을 모두 장악할 때까지...
두 번째와 시기가 겹치는 이유는 작가가 로마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만을 독자적으로 떼내어 4권과 5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한국인들에게는 영어식 이름인 ’줄리어스 시저’로 알려진 로마 황제다. 기원전 100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44년에 죽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내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인 ’수부라’의 단독주택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37세에 ’최고제사장’에 선출되어 관서로 이사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로마의 귀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보통 시내 7개의 상징적인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가 도시국가로 성립된 초기에 형성된 전통있는 명문 귀족가문임에도 카이사르가 태어난 집안은 경제적으로 그렇게 부유하지 못했다.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상당히 활약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에 이르러 300년 가까이 높은 공직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한니발 전쟁’시 율리우스 가문의 인물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겨서 그 공로로 카이사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별칭이 결국 가문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에 접어들어 카이사르의 친척(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가 어렸을 때, ’동맹시 전쟁’과 내전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 친척인 집정관과 고모부뻘 되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참전한다.
아버지는 법무관을 엮임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내에 살면서  ’동맹시 전쟁’과 그 후의 내전을 거쳐 술라의 독재관에 의한 로마 내 반대파 숙청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술라가 재판도 없이 수 천명(4,700명)을 처형하여 포로 로마노 광장에 효수된 것도 지켜보았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서로 반대파를 처형하면서 카이사르는 양측 친척(루키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이 모두 살해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정략결혼이 주류였고 카이사르는 당시 16세에 집정관의 딸과 결혼한다.
결혼 후, 술라가 반대파를 처형하면서 작성한 ’살생부’에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술라의 측근들이 어린 카이사르를 살려줄 것을 요청하여 술라는 킨나의 딸고 이혼할 것을 조건으로 살려주는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망친 후 술라가 죽고나서 6년 후에 로마로 돌아온다.




카이사르는 30세에 이베리아 반도의 군대 대대장과 회계감사관(전체 20명)으로 첫 공직에 나섰다. 
그리고 35세에 안찰관(4명)에 선출되고 37세에 최고제사장에 선출되었다.(38세에 법무관)
작가는 이 때부터 카이사르가 본격적인 중앙 무대에 나선 것으로 분석한다.
카이사르가 공직에 선출된 후에도 공화정 체제의 낙후함과 원로원의 전횡은 여전하였다.
카이사르는 39세에 이베리아 반도의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고 40세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선거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밀약을 맺고 ’삼두정치’를 개시한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20대 시기부터 카이사르에게 자금을 대출한 기사계급이었고 카이사르에게는 일종의 경제적인 후원자였다.
폼페이우스는 몇 년동안 로마군을 지휘하며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진압과 동방 원정도 성공리에 마친 개선장군이었기에 로마군과 제대군인들에게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취임한 후 10년 넘게 ’삼두정치’를 통해 원로원을 견제하면서도 기존 제도를 활용하여 각종 법률과 정책을 입안,결정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목표는 기존 제도의 외형은 보존하되 내용적으로는 제정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이 때 100년 넘게 문제가 되던 농지문제를 해결하는 ’율리우스 농지법’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나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갈리아 전쟁(원정)에 나선다.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간 계속되는데, 카이사르는 이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갈리아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확대,정착시키고 로마의 국경을 북해와 라인강 유역가지 확장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전쟁을 통해 중요한 심복들을 확보하고 6만명이 넘는 로마군이 충성을 확보한다. 












갈리아 전쟁(원정)을 끝내고 카이사르가 로마에 귀환할 즈음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고  ’삼두정치’의 한 축인 폼페이우스를 동원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무력화를 시도한다.
이로써 ’삼두정치’는 해체되고 카이사르는 50세가 되던 해에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 때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권까지 읽다보면 작가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5권을 15년 간에 걸쳐 집필하여 출판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보다도 당시 로마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와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키아밸리나 타키수스와 같은 역사가나 작가들이 정치와 군사 중심으로 로마사를 작성한 것에 비하여 작가는 아주 일상적인 생활과 문화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연구하고 조사한 흔적이 책의 곳곳에 배여있다.
그것은 가정교육, 체육, 주거문화, 의복, 성년식, 군대조직, 전투상황 등 상당하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20대 시절부터 상당한 부채를 짊어지고 생활하였으며 부채를 힘들어하기는 커녕 어려운 가정형편에 굴하지 않고 부채를 통해 자신의 생활, 유학, 취미, 사교, 정치에 활용하였다는 점과 수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 여인들과 단 한 번도 갈등을 겪지 못했다는 작가의 글은 카이사르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준다.

카이사르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점 중의 하나는 그 시대에, 그런 악조건에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서 <갈리아전쟁기>라는 기록을 하고 책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 기록이 원로원을 상대로하여 자신의 공적을 알리고 견제하기 위함이라 하더라도 작가가 표현하듯이(난 잘 모르겠지만...) 사실정보와 전개과정을 비롯한 객관적인 전투보고서를 적절한 문체로 썼다는 것이 정말 놀랍니다.
서구 사람들의 ’기록문화’가 결국 로마제국에서 비롯되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기록’은 ’정보’이자 ’힘’이다.

 

[ 2010년 9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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