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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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5권 중 두 번째...
2권의 부제는 ’한니발 전쟁’이다.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264년 ~ 기원전 146년에 해당한다.
(책 읽는 시간은 추석 연휴 2일째 + 3일째 오전까지 소요되었다.)


 
로마는 이 시기에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의 하나인 ’한니발전쟁(포에니전쟁)’을 승리로 거두었다.
’한니발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국가에서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지중해 전역에 대한 지배국가로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지중해 전역이라 함은,
1. 지중해 서쪽으로는 이베리아도 전역(현재의 스페인과 포루투칼)
2. 지중해 서북부지역(현재의 프랑스 남부)
3. 지중해 동북부지역(현재의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 해안가, 그리스전역)
4. 지중해 동부(터키 서부, 시리아, 이라크 서부, 이스라엘)
5. 지중해 남부 전역(튀니지, 알제리와 리비아/이집트 해안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제외한 지역에 대한 지배방식을 ’속주’, ’자치국’, 그리고 ’동맹국’으로 나누어 통치,관리했다,
당시 로마 지배지역의 국가와 도시명으로 보면,
1. 속주 : 먼에스파냐, 가까운 에스파냐, 카르타고, 시칠리아섬, 사르데냐섬, 코르시카섬, 갈리아, 일리리아, 마케도니아, 아카디아동맹, 소아시아, 마그네시아
2. 자치국 : 프랑스남부 프로방스, 스파라타, 아테네
3. 동맹국 : 누미디아왕국, 이집트왕국, 비티니아왕국, 폰투스왕국, 아파도키아왕국, 시리아왕국, 크레타왕국, 키프로스왕국, 로도스왕국이 이에 해당한다.
 
어떻게 하여 로마는 약120년 만에 그 거대한 지중해 전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했을까?
그것은 외형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로마가 융성하기 시작한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전까지 절대적,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국가인 마케도이나왕국과 페르시아왕국이 쇠퇴한 때문이고
또 하나는 당시 지중해 패권국이던 카르타고와 국가의 운명을 건 ’한니발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저자도 그런 이유로 <로마인 이야기> 제2권을 대부분 ’한니발전쟁’에 할애했다.
마케도니아왕국은 알렉산더대왕 사후에 알렉산더의 유언에 따라 몇 개의 지역이 왕국-마케도니아, 아카디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으로 분할되어 각자 유지되어 있었다.
 
* 한니발전쟁과 포에니전쟁 : ’한니발전쟁’은 카르타고의 명장의 이름이 ’한니발’이었기 때문에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고 ’포에니전쟁’은 포에니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의미하고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칭한 이름이다.
 
’한니발전쟁’은 세 차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제1차 전쟁은 기원전 264~241년에 진행되었는데, 어렵지 않게 로마가 승리하였고 로마는 그 대가로 시칠리아섬에 대한 지배권과 이탈리아반도와 그리스 도시국가의 해상통로에 대해 안정을 가져왔다.
제2차 전쟁은 기원전 219~216년에 진행되었고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로마와 카르타고의 국가운명을 건 한 판 승부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경로(아프리카 -> 이베리아반도 -> 프랑스 중부 -> 알프스산맥 -> 이탈리아북부)를 거쳐 로마 본토에 진입한 것이다.
한니발은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병 9만명과 기병 1만2천명을 구성하여 프랑스를 지날 때 보병 5만9천명과 기병 9천명이었으나 로마의 본토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보병 2만2천명과 기병 6천명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와 속국을 분리시켜 갈리아용병 2만4천명을 추가하였고 로마는 시민병 4만2천명과 동맹국 4만5천명을 동원하였고 이탈리아 반도 중부 평원에서 그 유명한 ’칸나이 전투’를 치르게 된다.
’칸나이 전투’는 한니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으나, 한니발은 로마를 공략하지 않고 이탈리아 남부로 위회하여 로마의 속주와 자치국을 공략하여 ’로마연합’을 붕괴시키려 했으나 시라쿠사와 타란토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패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로마는 새로운 집정권과 장군 크라쿠스, 마르켈루스, 스키피오가 등장하여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고립시키고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차단하였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는 장기전을 치르되, 이베리아 반도의 한니발 후속군대와 카르타고 본국에 대한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결국 한니발은 본국으로 후퇴하였으나,
결국 한니발은 아프리타 북부 자마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군대에 결정적으로 대패한다.
제3차 전쟁은 기원전 149~146년에 진행되었고 이 전쟁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되버리고 결국 카르타고 왕국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진다.


 
로마가 ’한니발전쟁’을 승리로 이끈 근본적, 구조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저자가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 보면,
첫번째는 로마 건국 후 500년 넘게 정착된 정치체제(공화정)에 있었다.
- 특히, 당시의 로마는 원로원과 로마시민, 평민이 똘똘 뭉쳐있었다.
  그만큼 원로원은 정치와 정책제안이라는 제 역할은 다하였고
  집정관, 장군들을 비롯하여 전쟁에서 사망한 원로원 의원이 상당수였다.
두번째는 역시 로마 건국 후 500년 넘게 정착된 외교체제에 있었다.
- 비록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인과 시라쿠스 등 일부 속주와 동맹국이 로마를 배신하였으나,
  다른 속주들과 동맹국들은 로마와 함께 군대에 동참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없었다면 수 십 만명이 참가한 ’한니발전쟁’에 로마는 제대로 군인을 충원할 수 없었다.
- 특히, 로마가 건국 이래 지속해온 대외 정책, 즉 ’주변국의 로마화’가 핵심...
  로마는 원칙적,기본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배한 민족이나 국가를 멸망시키거나 말살시키지 않고 가급적 상대방의 체제와 종교,문화를 인정하되 세금이나 군대협조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로마의 세력권과 경제력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나머지 요소들은 모두 ’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니발의 실책, 카르타고 본국의 실책, 명장 스키피오의 등장, 그리스 도시국가의 동요 등...
 
저자는 <로마인 이야기> 제1권과 제2권을 통하여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게 된 이유가 결국 공화정과 속주/동맹국 체계 등 로마의 초기 국가체제에 있었음을 이야기하였고
그와 동시에 원로원 등 공화정 자체의 구조적인 약점과 한계도 암시하고 있다.
 
1권과 2권을 통하여 가장 인상깊은 로마의 모습은 ’로마연합’과 ’로마화’에 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주변국가를 침략하는 대다수의 지배국가들의 승전 원칙은 대부분 ’학살’과 ’노예화’, ’약탈’과 ’점령’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랬고 이집트와 페르시아가 그랬으며,
중세의 유렵, 십자군전쟁, 이슬람이 그 인간성과 전통(?)을 이었다.
심지어 19세기와 20세기까지 그렇게 지배가 이어졌으며,
아시아지역과 아메리카 지역을 비롯한 지구상 모든 승전국가가 그런 식이었다.
로마는, 인류문명이 아직 제대로 태동하기 전인 기원전에 새로운 체계와 정책을 시도했고
그 결과 1,200년 동안 지중해 인근의 패권국가로 군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우수한 로마의 역사와 전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서구 열강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보여준 수 많은 학살과 노예화, 약탈과 점령을 계속해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종교와 이념을 무기로 자행된 수 많은 학살과 약탈을...
물론, 한반도도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다고 말 할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서도 현대식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고 있으니...


그런 면에서 기원전 1세기 경에 카이사르가 한 말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명언이 될 것 같다.
"인간은 보통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보이는 것만 본다..."

  

[ 2010년 0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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