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와 반역의 천년제국 - 비잔틴 제국 타임라이프 세계사 10
타임라이프 북스 지음, 권경희 옮김 / 가람기획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비잔틴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다.
로마사 이후 ’로마제국’과 ’그리스 문화’,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뒤섞여 천년이라는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비잔틴 제국’을 알고 싶었다.
 
서기 476년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퇴위당하면서 서로마제국이 사라진 후,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비잔틴 제국’이라 불렀다.
비잔틴 제국(the Byzantine Empire)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기간 서기 306~337년)가 비잔티움이라는 보스포로스 해엽의 소도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꾼 후 제국의 수도로 정한 서기 330년부터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 비잔틴제국 당시의 지도 ]

[ 성모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와 하기아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타니우스 황제 ]
 

이 책은 출판사가 [타임라이프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18권의 시리즈 중 10번째 책으로, 출판사는 "권위 있는 저자와 엄밀한 고증, 입체적인 구성, 풍부한 컬러 도판으로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타임라이프 북스’에서 펴낸 이 시리즈는 1997년부터 3년에 걸쳐 완간했으며, 인류 문명의 탄생에서 성장까지 인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일종의 역사서라 설명한다.  
책 속에 칼라 도판이 여러 장 들어있어서 독서 완료 후 시각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서’라는 출판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역사 편집본’이 더 어울린다. 
’비잔틴 제국’에 대한 편년식 역사과정에 대한 서술도 없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제국의 모습을 담아내지도 못한다.
책의 제목처럼 출판사가 판단하기에 독자들이 ’비잔틴 제국’의 역사 중에서 호감이 갈 만한 사안(예를 들어 ’음모’와 ’배신’처럼...^^)을 모은 것처럼 보인다.
결국 칼라사진에 현혹된, 잘못된 선택이었고 제대로된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을 고심 끝에 구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장에서는 바실리우스의 치세부터 황제 자리를 놓고 벌이는 권력 다툼, 화려한 궁정 생활, 외교의 대가라고 불렸던 비잔틴 인들의 뛰어난 외교술을 살펴볼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황금시대를 연 바실리우스는 미카일 3세를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비단 바실리우스뿐만이 아니라 천년 세월 동안 비잔틴에서는 황제의 관을 쓰기 위한 사람들의 치밀한 계략과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황제는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상 최고의 권력자이자 신성한 신의 은총과 허가를 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을 군사력, 정치력 그리고 상업적인 힘의 측면에서 최강으로 만들어놓았던 황제들의 업적을 살펴본다. 
[ 하기아 소피아 성당 내부 ]

[ 테오도라 여제 ]




2장에서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최상의 교육을 받게 해주려고 했던 어머니 테오도라의 눈물겨운 헌신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꼼꼼히 살펴본다.
콘스탄티노플은 다양한 문화를 녹여내는 용광로이자 100만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 언제라도 72개국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듯 제국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동과 서의 무역 교차로였으며, 500개가 넘는 교회들 중에서도 단연 아름다운 교회인 하기아 소피아가 이곳에 있었고, 여기에서 종교생활과 의식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 화려한 성찬식 소품 ]

[ 화려한 장신구 ]

[ 화려한 향로 ]

[ 화려한 비단 ]


3장에서는 무솔리우스라는 병사를 등장시켜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과 병사들의 생활상, 전쟁터에서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또 거대했던 비잔틴 제국이 몰락해가는 과정과 콘스탄티노플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지켜내려 했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힘겨운 싸움도 볼거리를 제공한다.
비잔틴 제국은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죽기가 무섭게 투르크 전사들에 의해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점령당한다.
결국 비잔티움은 십자군이 침략하면서 치명적으로 약화되었고,
그후 마지막 적 오스만투르크 인 들이 포위했을 때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의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전 세계에 수억만 명의 동방정교회 신도들이 있으며, 제국의 옛 영토의 수도원에서 이들의 예배는 계속되고 있다.  
[ 바살리우스 황제 ]

[ 오스만튀르크에 공격당하는 콘스탄티노플 ]

[ 카타리나 수도원 ]

[ 시모 페트레나 수도원 ]



아직, 천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성격과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 비잔틴 제국의 특징과 역사(위키백과 사전에서 추려냄)
 

- 여러 역사지도에서는 기원후 395년에서 610년까지 제국을 서술할 때는동로마 제국이라고 쓰는데, 610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제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바꾸었기 때문이다.(당시 이미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그리고 기원 후 610이후의 지도에서는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가들이 지어낸 말로, 제국이 있던 당시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그 주민들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스스로 그리스인(그리스어: Ἕλληνες, 헬레네스)이라고 하지 않고 로마인(그리스어: Ρωμαίοι, 로마이오이)이라고 불렀다.
 "비잔티움"이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도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옛 명칭은 역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제국을 "비잔티움"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 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문명 세계 모두를 지배하는 대제국’이며 ‘하느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는, 지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수준 높은 이념과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거기에 종교적 권위와 오리엔트적인 전제정치를 더하여 매우 엄격한 전제 군주적 황제권과 관료정치를 시행하였다.
  
- 비잔티움의 황제는 원로원, 시민, 군대에 의해 추대되어 지상을 책임지는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제국은 천국의 예표이며, 최후의 심판이 때까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도록 하느님이 임명한 하나의 후견인으로서 사도들과 대등한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정치·군사·종교 등에 대해 무한적인 절대권력을 휘둘러 왔으며, 제국의 백성들은 스스로 황제의 노예임을 자청하며 오로지 그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사업을 통해 로마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페르시아와 아랍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서 유럽과 기독교 문명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영토를 잃었으며,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제국은 오랜 쇠퇴기에 접어 들어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 2010년 1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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