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셰리 버먼 지음, 김유진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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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음 주 공부모임 교재이며, 지난 달 초에 세미나를 했던 박상훈 저 <정치의 발견>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도 읽고 싶었다. 유럽의 현재 정치관계와 구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과거 역사적으로도 독특한 과정을 겪었고 18세기 이후 300년 넘도록 전세계에 걸쳐 정치,경제,사상적인 토대를 지배하고 있다. 어찌 보면 서구보다 우월한 것 같은 동아시아의 정치사상적인 흐름마저 20세기를 거치면서 주도권을 서구 정치사상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20세기 내내 내부적인 실험을 거듭하여 21세기의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과는 또 다른 정치사사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유럽사회 전반에 흐르는 '복지국가'의 모습은 한국을 비롯한 중진국이나 후발 개발도상국의 지식인이나 민중들에게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역사가 21세기의 나머지 90년을 어떻게 진행될 지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공부해보고 싶은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나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유럽에서 직접 공부하거나 유럽 관련 전공자가 아닌 보통의 한국 사람들 역시 대부분 나와 비슷할 것이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들 역시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것이 전부일 것이다.
 
저자는 유럽의 20세기 정치사상적인 전개과정, 특히 유럽의 20세기 전반부와 후반부가 상당히 다른 모습에 대한 일반적인 담론에 대해 문제제기하기 위하여 글을 쓰고 책으로 발간하였다. '일반적인 담론'이라 함은 통상적으로 20세기, 특히 20세기 상반기의 유럽이 자유주의가 파시즘과 나치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관점과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자 및 자본주의와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관점을 말한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에 최종적으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지구상의 사회를 조직하는 최상의 방식임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또는 통념)은 미국과 영국의 대부분의 학자들, 그리고 일반적인 학자들 사시에서 주류적인 시각이고 이론이다. 당연하게도 한국 역시 주류 이론 역시 그러한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담론 내지 통념이 '부분적인 진실'일 뿐이라고 정정한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하나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며, '중요한 하나의 문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불화를 겪어 왔다는 사실"을 의미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불화와 대립에 대한 언급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뿐 아니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인 존 스튜어트 밀, 알렉시스 토크빌,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의견도 일치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대중에 의한 전제정치와 계급 입법으로 귀결될 것"임이 분명했다. 따라서 저자가 판단하건대, 유럽의 20세기 전반부와 후반부가 그토록 다른 모습을 띤 이유에 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서로 적대적이었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과정이 너무도 확고하게 진행되어 "이제 인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그리고 사회적 안정과 진보를 위해 당연히 필요한 공통의 전제조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에서 20세기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과 공존의 과정을 다루면서 사회민주주의가 궁극적인 정치사상적인 대안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을 입증하려 한다. 저자는 책 서두에서 "20세기의 승리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이"라고 먼저 결론을 내린다.
 
제1장. [서론] 18세기 들어 태동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20세기 초가 되자 유럽 전역으로 확장됨과 동시에 전반적으로 확장되었다. 자본주의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생활을 주로 특정 집단 혹은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던 세상을 종말을 의미했고 개개인의 정체성과 생계를 시장에서의 지위에 의존하는 체제로 이행하게 만들었고 공동체도 붕괴되었다. 따라서 근대화가 파괴한 사회적 통합을 정치적 수단들을 통해 재창조해 내느 것은 근대사회가 직면한 주요 도전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유럽 사회는 1920~30년대 들어 경제적 붕괴와 사회적 대혼란을 겪으면서 대중은 근대 자본주의가 제공할 수 없는 안정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적 보호를 다시 요구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가 대중들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면서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나치즘),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는 그러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무대 위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라는 해결책은 민주주의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동반했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등장한 것이 사회민주주의였다.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중심주의와 수동성을 거부하면서, 그리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폭력성을 회피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저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졌으며, 사회주주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전을 나타냈다.
 
제2장. [배경과 기반]에서 저자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배경과 기반을 탐구한다. 19세기가 마감될 무렵, 정통 마르크주의에 대한 불만의 증가, 그로 인해 열린 정치 공간, 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일어난 수정주의 운동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다룬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와 카우키에 의해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을 강조하면서 경제적 힘의 우선성과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에 기반하는 교리를 창조했다. 마르크스주의에게 국가나 정치는 '하부구조'에 의존하는 '상부구조'의 하나로써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함께 사라지는 운명일 뿐이었다.(마찬가지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 역시 국가나 정치는 '시장경제'의 보조물에 불과했다.) 자본주의 내부 모순의 격화가 결국 체제를 끝장낼 것이라는 과도한 교리는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에게 오직 수동적인 대응만을 주문할 뿐이었다.
 
19세기 후반 베른슈타인이 역사 유물론을 포기하고 대중 정치활동을 주장하면서 제기한 '점진적 사회주의'는 엥겔스,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등으로부터 '수정주의'라고 비난하였다. 마르크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는 경제 발전과 계급투쟁의 불가피한 결과인가, 아니면 민주적 정치 활동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귀결인가?'에 대해 뜨겁게 논쟁을 벌였고 교리와 원칙은 주류 자리를 지켰다.
 
제3장. [성숙해진 민주적 수정주의]에서 저자는 어떻게, 왜 민주적 수정주의가 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 서유럽에서 퍼져 나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개별 사회주의 정당들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 더 넓게는 유럽 정치 전반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정당, 그리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은 의회에서 많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고 의석을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원칙을 강조하면서 계급투쟁과 관련한 국가와 의회의 역할, 정부에 대한 참여, 농민 등 노동계급 이외의 계층에 대한 협력, 민주주의, 민족 문제, 부르조아 정당과의 협력 등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을 향해 가던 시기 동안,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공식적 이데올로기로 남아있었음에도 점점 더 포위 공격을 받았다. 베른슈타인, 조레스, 투라티, 오토 바우어, 칼 레너 등을 중심으로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민주적 수정주의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세4장. [혁명적 수정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에서 저자는 정치적 담장의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는 러시아 혁명을 필두로 하는 혁명적 수정주의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어떻게 그리고 왜 유럽의 우익 인사들이 비마르크스주의적, 민족적 사회주의를 선동하기 시작했는지를 추적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경제보다는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였고 민주적 수단이 아니라 혁명적 엘리트들의 정치,군사적 노력을 통해 강제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여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조루즈 소렐은 '파국을 위한 폭력투쟁의 필요성'이라는 혁명적 수정주의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전파하였고 이탈리아의 풋내기 무솔로니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사회적 통합과 공동체주의를 주장한 민족주의자들은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공통점을 찾아낸다.
 
제5장. [수정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에서 저자는 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에 대해 다룬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새로운 정치 지형이 어떻게 미누적 수정주의자들을 완숙한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는지를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각 정부의 전쟁을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인 계급투쟁과 역사 유물론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전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정당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점하였음에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와 원칙에 발목이 잡혀 민중들의 욕구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계급 교차적 협력, 민주주의아 민족주의적 과제를 받아들이면서 변화를 꾀한다. 한편, 그 사회주의 정당과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독일에서는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민족파시스트당이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제6장. [권좌에 오른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에서 저자는 비슷한 요인들이 어떻게 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을 파시시트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의식있는 민족주의자들을 민족사회주의자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는지 살펴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현존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 계급 갈등과 사회적 분열의 종식, 사회보장과 경제부흥, 계급 포용과 국민적 정당 구성을 중심에 세워 독일 민중과 이탈리아 민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지지와 인기를 얻었다. 민중들은 대신 정통 마르크스주의, 복수 정당체계, 인권, 민주주의, 자유 등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6장은 사회적 양극화와 사회통합의 붕괴라는 현실에서 기존 정치세력이 대안을 민중에게 제시하지 못할 경우 파시즘과 대중독재가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0년 간의 진보세력의 실패가 이명박 독재정권의 등장을 가져왔고 그 결과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그런 가능성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제7장. [스웨덴에서만 가능했던 이유]에서 저자는 모범 사례로 스웨덴을 심층적으로 들여다 본다. 이를 통해 스웨덴에서 사회민주주의적 헤게모니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의 사회주의 정당이 사회민주주의적 원리들로 일찍이 전향했다는 점, 그리고 그에 상응해 민족주의적 우파의 의제와 표현들을 선별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낼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 있음을 보여준다.
 
1~6장과 7장은 1980년대 후반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와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라는 현실 앞에서 이념과 비전의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의 진보정당과 세력들이 고민할 지점일 것이다. 특히 21세기 한국 정치사상의 흐름과 2011~2012년 주요 선거에서 진보정당과 세력들이 한국 대중의 요구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수렴해야만이 지지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제8장. [전후 시대]에서 저자는 20세기 후반 전후 유럽의 안정이 갖는 의미와 본지를 재평가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그리고 왜 지난 4반세기 동안 자신의 길을 읽어버리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1950년대 이후 유럽 각국은 마르크스주의 정당 및 사회주의 정당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국가의 권력을 이용해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에 개입하여 통제하고 사회복지를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회복하고 사회 전체의 통합과 공동체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 각국의 사회민주당은 자신들의 옛 강령과 주장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에 화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들의 혼란스러운 태도와 정책는 20세기 후반 그동안 자신들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청년과 빈곤층, 실업자, 소외된 사람들의 지지를 상실했다.
 
제9장. [결론]에서 저자는 다양한 학술 문헌과 현재의 정치 현실에 대해 이 책의 중심 주장이 지니고 있는 함의를 강조한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이야기는 단순히 옛 이야기를 흥미 차원에서 풀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산업화된 민주주의 국가 뿐 아니라 발전의 도상에 있는 세계 여러 나라들 모두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전제 조건임을 주장한다.
 
저자는 사회민주주의를 고유의 색깔을 지닌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적 원리와 정책은 전 유럽에 걸쳐 폭 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유럽이 자랑하는 전후 안정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의 가혹한 영향으로부터 개인과 공동체를 보호하는 정책들로,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안정에 대한 새로운 강조로 이어졌다. 달리 말해 전후 질서는 20세기 초반에 걸쳐 국가 - 시장 - 사회 간에 존재해 왔던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던 것이다.(p.298)"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민족사회주의나 파시즘과 추구하는 바가 일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정적인 특징은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과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소련 체제의 해체로 인하여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이 실패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미래의 새로운 이념과 비전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새로운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나에게 막연하게 인식되어 왔던 '사회민주주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나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 어느 누구도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사회주의를 막연하게 '사회주의 + 민주주의'로 인식해 왔는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런 단순한 공식이 실제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핵심적인 개념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차피 21세기 자본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래의 의미의 자본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역시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다. 어떻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질 수 있나? 
 
또한, 이 책은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의 변화과정에 대해 짧지만 효과적인 공부가 되었다. 대학 시절 단순하게 마르크스 요약 전집, 러시아 혁명사나 유럽 혁명사, 파리 꼬뮌, 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읽은 정도에 불과했다.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세계적인 노력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제프 엘리의 <The LEFT>를 읽고 싶었는데 그동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읽을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사회주의에 대한 수용이 상당히 왜곡된 편이다. 일제 강점 이후 러시아와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전달, 수입된 사회주의는 일제에 의한 조선의 멸망으로 이념과 비전을 상실한 한국민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였을 것이다. 반일 민족해방투쟁의 중심 세력이 사회주의자들이었음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이나 베트남, 중남미 아메리카,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사회주의로서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는 한국 사회주의자들에게 왜곡되고 편협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북한의 존재는 또 다른 유형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냉전체제와 남북 분단, 군사독재 등으로 인하여 유럽과 달리 사회주의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논의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를 유력한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적이고 광범위하게 정치계와 학계, 시민단체에서 논의할 수 없는 현실은 한국사회에게는 또 다른 질곡이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의 탈을 쓰고 파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에 대해서도 성숙한 논의와 토론이 필요하다. 진보정당과 진보적인 의식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한 사회민주주의의 특징, 즉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과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학고한 믿음은 굳이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중심적인 테제나 목표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사회 전반에 당장 필요한 것들이다. 한국에는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특징이 미약하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전사회적인 거부감, 각종 공동체의 붕괴,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불신과 부정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굳이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세 가지에 대한 전 사회적인 논의와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과 스웨덴, 핀란드, 독일, 프랑스는 다르다. 한국에 맞는, 한국의 역사에, 한국의 현실에, 한국민의 정서와 요구에 맞는 한국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아가야 한다.
 
* 책 속의 책 : 칼 마르크스 <자본론>, <공산당 선언>,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 책 속의 문장 :
-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우선 마르크스의 수많은 예언들이 실현되지 않았다. 19세기 말이 되자 기나긴 불황 이후 유럽 자본주의는 새로운 활기를 얻었고, 부르주아국가들은 중요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 19세기 후반 무렵, 마르크스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던 정당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정치 행위자가 되어 있었지만, 정치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전략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 20세기로 들어설 무렵, 많은 좌파들은 난처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즉 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을 탄생시킨 가장 큰 동기였던 경제적 부정의와 사회적 분열은 그대로였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번성했다.
 
- 물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화염 속에서 몰락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그 이후부터 가장 큰 성공 시대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전후의 안정the postwar settlement을 자유주의의 승리로 해석해 왔다. 비록 그것이 다소 순화된 형태의 자유주의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유럽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와 훨씬 관련이 깊다. 전후의 합의는 국가-시장-사회 간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이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적 이익은 이제 사적私的 특권보다 당연히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공동의' 또는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와 사회에 간섭할 권력(아니, 의무)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달리 말해 1945년 이후 사람들은 국가를 사회의 보호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적 우선순위는 종종 사회적 우선순위보다 뒷자리로 밀려났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체제의 기초가 전통적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교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거의 없었다. 새로운 체제가 정말로 닮았던 것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옹호했던,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파시스트들과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원칙과 정책이었다.
 
[ 2011년 5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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