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1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이야기 영국사>와 <영국문화 바로알기>에 이어 영국을 여행하기 위해 읽은 세 번째 책이다.
출발하기 전에 런던과 인근지역에 대한 부분만 읽었고 런던에서 돌아온 다음에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미국 아이오와주 태생인 저자는 젊어서 유럽 배낭여행을 마치고 잠깐 들를 속셈으로 방문한 영국에 아예 정착하게 되었다 .
정착한 후에 버지니아 워터에서 현재의 아내를 만났고 만난 지 여섯 달 후에 결혼까지 했다.
영국인들과 함께 20년 동안이나 어울려 살았지만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가 20년간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영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며 고별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부인에게는 자유로운 쇼핑의 기회를 선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굳힌 저자는 마지막으로 영국을 돌아보기로 결정하고 프랑스 칼레로 간다.
다시 여행하기 20년 전 영국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도버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도버를 출발해,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를 지나 스코틀랜드 최북단 존 오그로츠까지 영국 전체를 구석구석 꼼꼼하게 훑는다.
때로는 타인의 입장에서, 때로는 거주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영국은 저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과 사건들로 얼룩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에게는 젊음이 함께했던 사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영국은 축구라면 밥 먹다가도 뛰쳐나가고,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데도 날씨가 좋다고 말하며, 길 찾는 이야기로만 반나절을 떠들 수 있는 특이한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영국인들은 언제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고 '뭔가 부족하거나 없어도 잘' 지낸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애정을 담아 가꿔온 집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 영국 여행(1995년)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행 초기에 저자는 주로 자신이 몸담았던 장소들에 대한 추억거리를 풀어놓는다.
지금보다 더 낯설고 더 이해하기 힘든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겪은 황당한 사건들은 이제 가볍게 떠들 수 있는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영국은 그때는 몰랐었던 낯선 풍경이 남아 있는 곳이자 영원한 탐구대상이다.
30마일을 가기 위해 120마일을 이동해야 하는 영국의 철도체계나 2175년이면 모두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영국의 귀족들, 사람과의 접촉을 꺼렸지만 200명은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무도회장을 가졌던 포틀랜드 공작, 말장난으로 가득한 영국인들의 작명 센스 등 저자의 시점으로 재탄생한 영국 이야기들은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거기다 그의 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발칙한' 유머는 덤이다.

지금까지 그의 여행기가 늘 그랬듯이 이 책에도 거침없는 입담뿐 아니라 그의 해박한 지식이 여실 없이 드러나 있다.(이런 입장은 출판사의 의견...)
특히 천혜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은 눈물겨울 정도다.
아마도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는 안정적이고 오랜 역사로 인해 나라 전체가 '어린이 그림책에 나올 법한' 전원풍경을 갖게 되었는데도 영국인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그 문화재라는 것도 영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별 것 아니다.
한국이나 동양 각 국의 문화재와 비교하면 누추할 수도 있는 것들...
어느 곳에나 넘쳐나는 오래된 가옥들, 들판의 울타리 담장들, 빨간 공중전화부스들이 그것이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닌 자신이 사랑했던 곳과 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떠난 그의 여행은 '좋든 나쁘든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는 마지막 고백으로 끝난다.
그의 고집스런 영국 사랑은 우리에게 신비로우면서도 낯선 영국과 영국인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준다.
또한 자신이 살아온 곳, 내가 사랑하는 곳에 숨겨진 나만 아는 이야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도록 좋은 곳', 영국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보통의 여행기가 그렇듯이 저자 역시 자신의 감정과 주관에 근거하여 영국의 이곳저곳에 대한 분위기와 풍경을 설명해준다.
특히나 저자는 20년간 삶으로 살았던 영국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면서 여행기를 써내려갔기 때문에 남다른 추억과 감정, 그리고 정보들을 책 속에 쏟아낸다. 
자신의 과거 추억과 기억이 여행기에 많이 담기면서 여행기는 다소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다.
(저자의 다른 나라에 대한 여행기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영국에 대한 여행기만 그런 것인지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아이오와주 태생의 앵글로색슨의 후예라는 느낌이 강하다.
 
가볍게 여행기를 읽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지만, 저자의 인문사회적인 식견이 천박하게 느껴져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다소 불편했다.
문학적인 소양과 표현력도 부족하고(기자출신이라 신문기사나 칼럼같은 느낌), 글 속에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자본가와 노동착취에 대해서 선입견과 편견이 가득하다.
저자가 영국에서 보낸 시간만큼 영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애정의 뿌리나 알맹이는 없는 '앵글로색슨'이기 때문이라는 느낌만 남는다.
 
그래도 저자의 장점은 오랜기간 영국에 있었고 기자생활을 오래했기에 영국 곳곳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는 웬만한 영국 내 여행지는 대부분 담겨 있다.
특별한 생각이나 계획없이 영국 전체를 돌아보기 위해 저자의 책에 의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다...
 
 
* 책 속의 문장
- 오랫동안 나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념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회조직을 두고 한 매우 유의미한 그 실험이 러시아인들이 아닌 영국인들의 손에 맡겨졌다면 훨씬 더 잘해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혹독한 사회주의 체제를 성공적으로 주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영국인들에게는 고스란히 제2의 천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처 부인이 증명해 보였듯이 독재정권도 용인하며 수술이나 생필품 배달이 몇 년이나 늦어져도 아무런 불평 없이 기다릴 사람들이다. 중얼중얼 권력에 대한 조롱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절대로 반항하는 법이 없는 재주도 갖고 있다. 부와 권력을 쥐었던 자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낄 줄도 안다. 이들은 스물다섯 살만 넘으면 동독 사람들처럼 옷을 입는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를 시행하기에 딱 맞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란 뜻이다.(/ 5장 중에서)

- 버지니아 워터는 영국에서 가장 특이하고 별난 지역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미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똑같이 섞여 지내기 때문이다. 상점 주인들이나 지역 주민들이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 역시 존경스럽다. 그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지냈다. 파자마를 입고 수세미 머리를 한 남자가 제과점 한쪽 구석에 서서 벽을 보고 큰소리로 열변을 토해내도, 눈동자를 굴리며 연신 미소를 짓는 사람이 술집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한 스프에 각설탕을 떨어뜨리고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정말 가슴 따뜻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6장 중에서)

-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영국인들의 태도에 당황하곤 했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엄청나게 불안한 국면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달라질 거야.' '더 나쁠 수도 있었는데 이만한 게 다행이지.' '대단한 건 아니지만 싸니까 기분 좋잖아.' '이정도면 정말 괜찮은 거지.' 하지만 나도 점차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갔다. 황량한 해변을 산책 나갔던 어느 날 축축해진 옷을 입고 추운 카페에 앉아 있다가 밀크티 한 잔과 케이크가 나오자 '오,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나 역시 똑같아지고 있음을. 내 삶이 풍족하고 부유해졌다.(/ 7장 중에서)

- 포틀랜드 공작 5세인 스코트 벤팅크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의 영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년의 벤팅크는 역사에 기리 남을 위대한 은둔자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사람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별 이상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 웅장한 집에서 아주 작은 공간을 마련해 머물면서 방문을 뚫어 메시지 상자를 달고 그 안에 쪽지로 글을 적어 하인에게 전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음식은 부엌에서 식당까지 조그만 철로를 만들고는 그 위로 운반했다.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공작은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면 하인은 가구라도 되는 것처럼 모른 척 하고 그곳을 지나갔다. 이것은 모두 사전에 미리 준비된 훈련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은 하인은 공작의 개인 스케이트장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스케이트를 타야 했다.(/ 16장 중에서)

- 솔테어는 1851년에서 1876년 사이에 타이터스 솔트 경이 세운 공업단지다. 그는 19세기가 배출해낸 산업주의를 지향하는 자본가로서 절대금주주의자이고 독선적인데다 하나님을 숭배했다. 한마디로 그는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가 지은 기숙사에서 살아야 했고 그가 다니는 교회에 예배를 드려야 했으며 그의 지시를 일언반구의 어김없이 따라야 했다. 마을에는 선술집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았고 지역의 공원에서도 고성방가, 흡연, 오락 등의 꼴사나운 행동을 철저히 금지했다. 사람들은 실든 좋든 간에 아주 맑은 정신을 유지한 채로 부지런하고 얌전하게 지내게 있었다.(/ 18장 중에서)

- 오래전부터 가지고 다니면서 한 번씩 꺼내보고 좋아하는 신문 스크랩이 하나 있다. [웨스턴 데일리]의 일기예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날씨 전망,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입니다. 하지만 비가 조금 내려 기온이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날씨를 완벽하게 표현한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웨스턴 데일리]에서는 이 기사를 매일 고대로 내보내도 틀리는 법이 거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 신문사라면 정말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24장 중에서)

- 애버딘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나는 천천히 새로 들어선 쇼핑센터 주위를 따라 상당히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모두들 특색 하나 없이 금방 잊힐 건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진짜 문제는 애버딘이라기보다는 현대 영국의 특성에 있었다. 영국의 도시는 한 벌의 트럼프카드 같다. 마구 뒤섞이다 끝없이 다시 나눠진다. 같은 카드인데 순서만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다른 나라에 있다가 애버딘에 처음으로 왔다면 매우 독특하고 생동감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날로 번영하며 깨끗한 도시라고. 서점과 극장, 대학 등 도시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으니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라고 확신한다. 다만 다른 곳과 너무나 닮아 있을 뿐이다. 영국에 있는 도시니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27장 중에서)

-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돌집 하나가 있다. 나의 조국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집이었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이 매혹적인 작은 나라에는 이곳 못지않은 장소가 너무도 많다. 갑자기, 순식간에, 영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좋던 나쁘던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오래된 교회도, 시골길도, 지나친 낙관주의자들도, '정말 죄송한데요'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내가 모르고 팔꿈치로 툭 쳤는데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도, 병우유도, 토스트에 들어간 콩도, 6월에 건초를 만드는 일도, 바닷가 부두도, 왕립지도원에서 만든 지도도, 밀크티와 핫케이크도, 여름 소나기도, 안개 자욱한 겨울날도 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사랑했다.(/ 30장 중에서) 
 [ 2011년 1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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