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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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카이스트 대학의 학생이 2011년 들어 세 번째 자살하면서 카이스트 학교 운여정책 뿐 아니라 대학 운영방식과 대학의 존재양식,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 등에 대해 많은 논란과 비판이 진행된 바 있다. 하지만 이미 1년 전에 우리는 한국의 대학의 존재와 시스템에 대해 심각한 문제제기를 들었다.
 
작년(2010년) 3월 초순경 인터넷에서 김예슬(당시 고려대 경영대 3학년)의 대자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대자본 전문을 읽고 그 내용에 크게 공감하여 가까운 지인들에게 대자보 내용을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대학 거부 선언'은 한국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대자보가 붙은 다음 날부터 MBC 9시 뉴스와 경향신문 1면, 여러 방송 및 칼럼을 통해 보도 되었고 각조 인터넷 포털의 메인에 떠올랐다.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고 전국에서 그 사건에 대해 때론 떠들석하게, 때론 조용하게 논의가 이루어지고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나 역시 겉으로만 느끼고 생각했던 21세기 한국의 대학 현실이 절망의 벼랑 끝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 선언은 많은 이들에게 삶과 대학, 공부와 꿈, 젊음과 행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처럼 그렇다고 하여 국가, 사회, 대학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대신 자그마한 소규모 움직은 많이 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대자보 게시 며칠 후 개설된 다음 커뮤니티 ‘김예슬 선언’은 한 달여간 3,000여명의 회원을 모았고, ‘고대 자퇴녀’ 김예슬에 대한 다양한 지지선언과 의견이 오갔다. 이 카페의 주요 게시글이 이전까지 ‘고등학생, 주부, 대학생, 직장인’들의 ‘김예슬 지지와 공감 선언’에 그쳤던 데 반하여, 몇 개월 후부터는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대자보의 내용은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처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끝도 없는 무한 경쟁의 수렁, 그 속에 무력하게 놓여진 학생과 청년들, 학생과 학부모를 쥐어짜는 대학 장사꾼들과 그 하수인들, 재벌과 보수언론의 노예가 되어버린 국가, 교육과 지혜를 잃어버린 교수... 한 때 나 역시 80년대의 인식과 경험으로 파편화되고 흩어져버려 어떻게 해야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마저 굳어져가는 대학생 개개인의 모습을 비난하고 비판하고만 말았다. 아직까지 그런 경향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현재 대학과 대학생의 절망이 개인들의 문제 이전에 구조와 제도의 문제, 선배들과 기성세대의 문제, 정부당국자와 재벌과 사학재단과 교수들의 문제라는 것은 명확하게 각인된 상태다.
 
당시 무기력하고도 게을렀던 내가 한 일은 고작 지인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다음 미디어 오늘과 여러 언론 사이트를 찾아 다니며 김예슬씨의 대학거부에 대해 지지와 공감을 표시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김예슬이라는 이름과 대학에 대한 고민은 또 다른 많은 문제들과 섞여 기억의 창고 속에 들어갔다. 그러던 작년 12월, 박노해시인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통해 알게된 [나눔문화]를 통해 김예슬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눔문화] 홈페이지(www.nanum.com)를 살펴보다가 김예슬씨가 나눔문화 내 조직인 '대학생나눔문화' 소속이었고 작년 3월 이후 자신의 대학 거부선언에 대한 자세한 심경과 보충설명이 담겨있는 이 책을 발간했음을 알았다.
 
올해 1월에 나눔문화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나눔문화에서 발간한 다른 책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나는 반대한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고 내 나름대로 순서에 의해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대자보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끝내 놓을 수 없었던, 스스로에게 던져 왔던 삶의 수 많은 물음들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꺼내놓은 것이다. 자신의 '대학 거부 선언'이 끝이 아니라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임을...
 
1부. [나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자신이 그동안 '세계 최장의 학습노동'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25년 동안 우수한 경주마'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삶과 꿈에 대해 항상 고민해오던 저자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세 번 울고나서 서서히 결심을 굳혔다. 그 세 가지는 200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건설에 400억원을 기부하고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러 왔을 때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하여 출교당한 사건, 2006년 미국과 이스라엘이 중동 패권과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강대국의 불의한 전쟁에 침묵한 '글로벌 코리아'를 느꼈을 때, 그리고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뉴욕에서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읽었을 때이다. 한 마디로 자신이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겼고 '자유'는 두려움에 팔아 넘겼으며,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겼다"음을 느낀 것이다.
 
2부. [나의 적들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헛된 희망의 말들로 오염된 꿈을 조장하는 적의 실체로 ‘인간을 잡아먹는 시장’, ‘자격증 장사 브로커 대학’, ‘배움을 독점한 국가’를 지목한다. 그리고 그 동안의 수많은 진보 담론과 20대 담론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고 묻는다.
 
3부. [거짓 희망에 맞서다]에서 저자는 “G세대 모두가 김연아처럼 빛날 수는 없다.”라고 선언한다. 저자가 책에서 가장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꿈을 물어보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들 직업을 대답한 것을 보며 맥이 빠지고 슬펐다”며 ‘꿈의 살해’를 집중적으로 논했다. “단 하나를 위해 경쟁하는 꿈, 실용적인 꿈, 주어진 꿈, 오염된 꿈은 너무 금세 폐기처분되어 버린다”며 ‘내가 뭘 잘하는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먼저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인지, 어떻게 살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찾아가자“고 주문하기도 한다.

저자는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온 삶을 바쳐서 이뤄낸 ‘대학 가는 꿈’의 결과는 ‘무직, 무지, 무능’의 3무(無)이고, 시장·대학·국가라는 ‘억압의 삼각 동맹’이 만들어낸 최종의 인간상은 ‘소비자’일 뿐이라며, 청년들에게 꿈도 열정도 도전의지도 없다는 말은 이런 현실구조를 은폐한 떠넘기기에 다름 아니라고 통렬히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경쟁과 소비의 악순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대졸자 주류 사회, 의무교육과 자격증 유일 잣대 시스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부모님들을 향해 ‘사랑의 이름’으로 아이를 길들이며 자율성의 날개를 꺾지 말아 달라고.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살아 달라고, 간절한 편지를 남긴다.
 
4부.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에서 저자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인용하면서 친구들에게 자신을 되찾고 직업이 아닌 진정한 꿈을 새롭게 꿀 것을 제안한다.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 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실제 '김예슬 대자보'에 대한 여러 반대 의견("명문대 중퇴가 보통대 졸업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도 존재한다. 특히 '대학 서열화'가 굳어져가고 있음에 따라 SKY 이외의 대학생들은 대자보이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 없음에 또 다시 슬퍼하고 분노한다.
 
대학의 문제는 그 자체로도 심각하지만, 한국사회의 모순이 모두 얽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업화된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지식과 인력도 배출하지 못할 뿐더러 젊은이들의 창조성과 자발성마저 말살하고 있다. 대학의 운영과 시스템은 그대로 초-중-고등학교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현재와 같은 대학입시제도는 초-중-고 학생들이 세계 최장 학습 시간을 강요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사교육비를 부모들에게 강제한다. 20년 전에만 해도 소득 불균등과 사회적 지위의 불균등을 해소해주던 교육시스템은 점점 빈부격차와 사회적 지위 격차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더니 21세기 들어서 학부모와 학생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의 대학 숫자는 OECD에서 최고 수준이지만, 한국의 대학은 이명박 정권이나 보수언론, 사립대학들이 모두 좋아하는 '경쟁력'이 OECD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대학교육에 대한 공공성, 학생 당 교수 수, 사학재단의 전입금은 역시 OECD 최하위 수준이고 등록금 수준, 학교 운영의 부실화, 대학비리는 당연히 최고 수준이다.
 
대학을 거부하고 자퇴하는 것이 모든 대학생들이 취해야 할 선택은 아니겠지만 김예슬씨가 대학을 거부하면서 던진 질문과 문제제기는 우리 모두가 안아야 할 숙제가 되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과 같은 교육 시스템과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 김예슬 사회적 저항으로의 자퇴 대자보 전체 원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 2011년 5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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