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2011년 독서모임의 첫 번째 교재였다.
독서모임 때문이 아니라도 지난 12월에 작고하신 고 리영희선생의 생애를 알기 위하여 이 책 이외에도 임헌영씨의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먼저 읽은 바 있다.
 
독서모임에서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평전으로서의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별로였다.
고인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 내용보다 고인의 기존 저서와 자서전 성격의 책과 글, 그리고 당사자의 이야기에 주로 의존한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평전을 쓰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고인이 위독하였고 고인이 살아계실 때 완성된 평전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급하게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모임 논의 중에 고인에 대한 평전으로는 강준만교수가 펴낸 <리영희 -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가 추천되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보다는 어제 독서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생전에 고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도 있고 해서...^^)
독서모임의 주된 이야기는 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고인 및 고인의 저서와 맺게 된 사연을 회고하는 내용과 고인의 핵심적인 사상과 자세, 진실과 진리에 대한 탐구, 성장배경과 ’사상의 은사’로 불리게 된 과정 등이 중심이었다.
 
1. 평전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 있고
 
2. 고인의 태생적인 조건이 걸출한 저널리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고인은 이북, 그것도 이북의 변방 출신이었고 중등교육은 경성공업학교라는 조선인이 드문 학교를, 고등교육의 경우 해양대학이라는 마이너 대학이었으며 7년간이나 군대에 몸을 담았음에도 통역장교라는 군내 내 비주류 직책이었다.
그런 상황들이 한 편으로는 친일파와 주류에서, 해방 후 사상적 혼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구조와 배경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해방 후 주류들이 득세한 언론계에서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불굴의 노력과 치밀함을 잉태시켰다.
 
3. 그와 관련하여 시대적인 배경과 과정도 고인의 능력에 도움이 되었다.
고인은 1929년 생으로 일제에 의하여 본격적인 조선어 말살정책이 강행된 1940년대 초에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이북 출신으로 경성에서 중등학교와 해양대학을 다니면서 학비가 부족하여 놀이와 사교보다 대부분의 개인시간을 학습과 영어공부에 투입한 것이 후에 한국전쟁 발발 후 통역장교로 복무하게 된 계기가 된다.
7년간의 통역장교 경험은 고인이 영어에 익숙하게 만들었고 언론사 국제부에 근무하게 되고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진 것들이 중국어와 불어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4개 외국어 실력은 고인이 친일파와 서울대 등 주류대학 출신들이 장악한 언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함과 동시에 해외언론을 통해서 수많은 사실적인 정보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외국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4. 이과 전공, 주류와 권력에 대한 위기감, 진리추구의 열정이 한국현대사의 걸출한 언론인을 만들어내었다. 
고인은 중등교육(공업학교)과 고등교육(해양대학) 과정이 모두 이과였다.
일반적인 이과 교육과정이 그러하듯이 치밀하고 논리적인 교육내용이 어려서부터 부여된 천재적인 공부실력과 더해져 고인의 치밀한 논증과 이론의 기반이 되었고,
친일파와 주류들 속에서 비주류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기 위해,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폭압전제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안위와 기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인은 더욱 더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기사를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고인은 또 사교와 접대를 멀리하면서 남는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전부 투입하여 수많은 고전과 이론서, 자료 등을 수집하고 공부하였다.
마지막으로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성격적으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고인은 해외 언론의 보도내용과 해외에서 필요한 자료를 입수하여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으로 사건과 배경, 현황과 전망에 대해 당시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뛰어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성과 진실,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이 전제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고인은 자연스럽게 민주투사가 되었다.(9번의 체포, 5번의 재판, 4번의 징역)
 
5. 사상과 생활이 일치된 삶으로 일관하신 분이다.
7년간의 통역장교 시절부터 고인은 공과 사를 구분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잡기도 하나 없었음.)
언론계에 종사한 이후에도 끝까지 국제부 이외의 정치,사회부 등으로 옮기지 않아 향흥이나 접대, 금품을 수수하지 않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도 가난하여 부친의 환갑잔치를 치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정도였다.
고인은 50대에 넘어서서야 끓는 물이 자동으로 나오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고인 스스로 지성인으로서의 책무를 삶의 최우선 가치로 삼아 살아오셨기 때문에 항상 가족의 가난과 고통에 마음 아파하셨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은 모두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고인과 같은 언론인, 그리고 지성인이 다시 이 땅에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  

[ 2011년 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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