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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평점 :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어떤 직장인의 통화 내용...
"잘 사냐구? 나야 잘 살고 싶지만, 이렇게 치열한 사회(경쟁)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냐? 직장 다니랴 가족들 챙기랴 친구 만나랴 바쁘기만 하고, 무슨 일을 해도 재미가 없어(권태). 스트레스 풀려고 어제는 친구 만나서 화끈하게 놀았는데(자극) 오늘은 견디기가 더 어렵고 짜증이 나네(피로).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글쎄 오늘 나보다 실력이 한참 딸리는 직장 동료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기세가 등등하지 않겠어?(질투)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부장님한테 칭찬 받은 이야기는 하던데, 혹시 부장님 앞에서 날 깍아내린 건 아닌지 몰라(피해의식). 난 왜 이렇게 안 풀리나 몰라.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 안 듣고 뺀질뺀질 놀았던 벌을 받나 봐. 요즘도 친구들 만나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 얼굴을 못 보겠다니까.(죄의식) 서른이 한 참 넘었는데도 결혼 안 하고 비실거리는 자식 보는 어머니 속이 오죽하겠니. 난 결혼하기 싫은데, 독신으로 살면 남들이 괴팍한 성격이라 그렇다고 욕 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여론에 대한 두려움)..."
이 책은 작년 7월 법정스님의 저서 < 내가 사랑하는 책들 >에 소개된 책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에서 <끝없는 여정>까지 여덟 권에 이어 아홉 번째로 읽은 책이다. 러셀이 이 책을 처음 출간한 것은 1930년, 그가 58세 되던 해였다.
즉, 지금으로부터 무려 80년 전에 처음 세상에 나온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긴 세월을 뛰어넘어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깨달음과 울림을 전해준다. 그리고 러셀의 이야기는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씨의 행복여행>에서 꾸뻬씨가 지적한 ’행복의 비결’과 비슷하며, 두 가지 모두 법정스님의 말씀에 맞닿아 있다.
법정스님이 러셀의 저서 중에서 이 책을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시킨 이유는 러셀이 이 책을 통하여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대지와 통해야 하고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데서 싹터온다고 말한다. 이는 스님이 <버리고 떠나기>에서 "욕망을 채워 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러셀의 불안의 원인과 행복의 정복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야기는 결국 스님의 ’욕망’과 ’가치있는 삶’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되는 것 같다.
사춘기 때에는 삶을 증오하여 늘 자살할 생각을 품고 있다가 수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자살 충동을 피할 수 있었다는 러셀은 당대에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석학 중의 한 사람으로 분석철학의 창시자라 불리웠음에도 학자나 특정한 지식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다. 러셀은 "불행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력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일부만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기(p.09)"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말한다.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책과 같이 ’행복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
러셀은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 또는 행복이 사람들 곁은 떠난 이유를 9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1930년 당시 서구 상황에서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가 80년이 지난 현재에도 비슷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영원히 풀기힘든 인간의 고독과 불완전함을 느끼게 되고 종교적인 단어인 ’고역’과 ’고행’이 떠오른다. 그 9가지는 1장 각 단락의 소제목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각각 자기 안에 갇힌 사람, 이유 없이 불행한 사람, 경쟁의 철학에 오염된 사람, 인생의 끝 권태, 걱정의 심리학, 질투의 함정, 불합리한 죄의식, 모두가 나만 미워해, 세상과 맞지 않는 젊은이다.
그리고 러셀은 사람들이 행복으로 가기위한 길을 역시 2장의 소제목으로 달았는데, 이는 각각 인간이 느끼는 행복, 열정이 행복을 만든다, 사랑의 기쁨, 좋은 부모가 되려면, 일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 폭 넓은 관심 튼튼한 인생, 노력과 체념 사이, 나는 행복한 존재 등 8가지로 되어 있다.
러셀이 이야기하는 불행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비슷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방법도 <불안>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과연 1930년 러셀이 지적한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정복방안이 21세기 한국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부분적으로 적용이 곤란한 단락이나 구절이 있음에도(특히, 종교적인 죄의식 등) 러셀의 지적은 현재에도 타당하다고 본다. 더욱이, 러셀이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사회적, 제도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최근 평균적인 30~40대가 대학까지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거나 자영업(전문직 포함)을 영위하고 있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개인들을 더 험하게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개인적, 가족적인 차원에서 불행과 행복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러셀의 생각을 살펴 보는 데 있어서는 조금 주의가 필요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불행의 원인과 정복 방안을 모두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하여 다루었다. 그것은 저자가 이 책을 발간하기 전에 이미 <결혼과 도덕 Marriage and Morals(1929)>, <정치 사상 Political Ideals(1917)> 및 <사회 개조의 원리 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1916)> 등에서 사회적, 제도적인 불행의 원인과 처방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겪는 여러 가지 불행은 일부분은 사회제도에, 일부분은 개인적인 심리에 그 원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심리도 사회제도의 산물이다.(P.15)"고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을 놓친 후 책을 계속 이어서 읽다 보면 저자가 불행의 원인과 책임을 너무도 개인에게만 묻는다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러셀이 사회 제도를 떠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불행과 행복을 다뤘다고 밝혔음에도 이 책이 크게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객관적이니 현실 때문일 것이다. 사회와 제도를 떠난 현대인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러셀과 같은 대학자나 종교인, 성인, 철학자가 아닌 이상 사회와 제도를 떠나 개인적으로 행복을 정복하기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즉, 러셀은 독자를 ’일반인’으로 삼아 글을 썼으나 일부 지식인 정도가 이 책을 이해하고 동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내가 ’버트런드 러셀’ 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이 책에 대해 조금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고 따라서 당연하게도 내가 기대가 컸던 만큼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그 만큼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러셀의 다른 작품을 마저 읽고나서야 러셀에 대한 실망이 존경으로 돌아설 것 같다...^^
[ 2011년 3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