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 一期一會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대학 동기와 후배들을 만난 저녁 자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뭐하겠나 싶어서... 그것은 저녁 자리에서 벌어진, 아니 내가 뱉어낸 두 가지 말들 때문이다. 하나는 동기와 함께 다른 친구에 대해 험담을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모임의 이야기가 음담패설로 흐를 때 그것을 다시 진지하거나 건강한 이야기로 유도하지 못하고 동참한 것이다. 올해부터는 온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건강한 이야기를 나누고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고 희망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 결심이 흐트러져 버렸다. 한 마디의 말, 한 번의 몸짓에서부터 다시금 나를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이 책은 생전에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자 최초로 스님이 대중과 학인을 상대로 직접 하신 말씀을 모은 법문집이다. 길상사의 정기법회 법문, 여름안거와 겨울안거 결제 및 헤제 법문, 부처님 오신날 법문과 창건법회 법문 등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스님의 법문은 대부분 길상사에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명동성당, 뉴욕 맨하탄, 세종문화회관, 청도 운문사와 원불교 대강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책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는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뿐인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일기일회一期一會]이고 50년 넘게 수행자로서 살아오신 스님의 마지막 가르침일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진정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법정 스님은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그 자체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스님은 헛된 말과 관성적인 삶이 스모그처럼 퍼져있는 시대에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온 이의 진정성이 담긴 가르침을 맑은 울림처럼 담아냈다. 각 법문의 서두에는 그날의 계절과 시간이 담겨있어 때로 작은 절마당에 고즈넉하니 앉아 스님의 가르침을 듣는 기분에 젖기도 한다. 
 
[2008년 11월 12일 겨울안거 결제일 법문 : 추울 때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더위가 되라] 스님은 "만약 미국을 비롯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경제 불황 없이 한결같이 고도성장으로만 치닫는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물으신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이것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서구에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래 이제 250년 정도... 그 기간 동안 유럽과 미국, 일본과 한국, 최근의 BRICs 국가들... 대략 20여개국 정도가 그 짧은 기간 동안 마치 굶주린 돼지처럼 지구의 숲과 산, 물과 자원을 고갈시켜 온갖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 재앙이 이어지고 있는데 앞으로 또 수 많은 국가들이 그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직하다.
피에르 라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이반 일리히, 버트런드 러셀, 쓰지 신이치...  그들의 이야기처럼 "성장을 멈춰라"라고 힘차게 외치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멈출 것인지, 멈춘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먼저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열중하는 문제 중 하나다.
 
[2008년 8월 15일 여름안거 해제일 법문 : 중노릇하면서 빚만 많이 졌다] 2007년 겨울 대통령 선거의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면서 스님은 "경제 살리기만 외쳐도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로 뽑아 주는 그런 세태 아닙니까?"라고 한탄하면서 구호만 가지고는 경제를 살릴 수 없다고, 그런 헛된 구호만 가지고 경제를 살리고 죽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번 주 중에 MB정부가 '영남권 신공항' 후보지를 탈락시키면서 영남지역 정치권과 '가진자'들이 흥분하고 있다. 박근혜는 특유의 방식으로 '주장과 분위기를 짱 본 후'에 대선 공약을 지키라는, 전형적인 '기회주의' 속성을 보여준다. '영남권 신공항' 문제는 기회주의나 대선 공약의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다른 모든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떠나서 '영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한국의 정치권은 그동안 대통령이나 지자체장, 그리고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아무런 경제적, 사회적 실익이 없는 공항을 수도 없이 건설하여 국민의 세금을 낭비했고 운영비를 지금도 낭비하고 있다. 이 판국에 무슨 '영남권 신공항'이란 말인가?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무지와 탐욕을 가득찬 모리배에 불과하다...
 
[2008년 5월 12일 부처님 오시날 법문 : 하루 낮 하루 밤에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 스님은 2008년 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 파동', 그리고 조류독감으로 6천만 마리나 생매장한 닭과 오리에 대해 '업'과 '자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국가와 기업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초식동물인 소에게 같은 소의 뼈와 내장을 사료로 먹이기 때문에' 소가 미쳐 버린 것이고 다닥다닥 붙은 인조 감옥 양계장 안에서 사료를 먹이는 조류들이 집단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현상을 개탄한다. 그러한 인간들의 동물에 대한 죄는 반드시 '업'이 되어 인간의 삶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 이러한 시대에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야 함을 지적한다. 
 
[2008년 4월 20일 봄 정기법회 법문 : 생명 자체가 하나의 기적] MB정부가 은밀히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끔직한 재앙이며, 이 국토가 오랜 역사 속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영혼이고 살이고 뼈이기에 어떤 정책과 권력으로도 이 땅을 망신창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에 무모한 자연파괴는 반드시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것도 아무런 죄가 없는 후손들에게...
 
[2006년 10월 15일 가을 정기법회 법문 :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에 먹는다] 당시 크게 사회문제화 되었던 '한미FTA'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나 언론의 선전과는 달리 철저하게 미국 기업과 투자자를 위한 협정이며, 미국만을 위한 보호주의라고.. 한국의 무역 개방정도가 70%가 넘어서고 있는 판국에 개방정도가 20% 밖에 되지 않는 미국을 위해 나머지 분야를 모두 개방하고 나면 수출 산업과 기업 일부는 성장할 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산업부분이 취약해지고 실업과 빈부격차가 확대될 것을 예상한다. 특히, 농업이 죽게 되면 곡식 뿐 아니라 생태적인 관리가 불가능해짐을 역설하시면서 "경제가 튼튼하려면 기초산업인 농업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경제관을 제시한다.
 
[2004년 4월 18일 봄 정기법회 법문 :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신도 우리를 용서한다]에서 스님은 [법구경]의 법문을 예시하면서 용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온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허물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시면서 "함부로 남을 꾸짖거나 흉을 봐서는 안된다. 허물을 감싸 주고 덮어 주는 용서는 사람을 승화시킨다. 용서는 마음 속에 사랑과 이해의 통로를 열어 준다"고 강조한다. 선의의 충고와 꾸짖는 것은 다르다는 것...  
 
* 책 속의 문장
-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일기일회,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입니다. 이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p.54)
 
- 살 만큼 살다가 세상과 작별하게 될 때 무엇이 남는가? 홀로 있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평소에 지은 업을 가지고 간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평소에 지은 업만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가가 곧 다음의 나를 형성한다.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스스로가 다음 생의 자신을 만들고 있다.(p.173~174)

-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매 순간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숨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순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순간이 바로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p.317)
 
[ 2011년 4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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