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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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벌어져도 끝에 가서는 하나의 귀결로 마무리될 것이라 짐작했다. 그 ‘어떤 일’이란 바로 타이틀처럼 K ․ N에게 일어난 비극인데, 『제노사이드』의 신인류, 『13계단』의 사형 제도와 함께 여기서는 임신과 중절을 다룬다. 《시사매거진 2580》이나 《PD수첩》이 자칫 선정적일 수 있는 소재를 보도와 함께 버무렸다면 이 『K ․ N의 비극』은 같은 것을 소설로 만들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교고쿠 나쓰히코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우부메(産女) 전설을 차용하려는 듯싶다. 우부메는 하반신이 피로 물든 채 아이를 안고 나타나 지나가는 이에게 아이를 맡긴다. 만일 그 갓난아이를 안게 되면 그 아이는 점점 무거워지는데, 안고 있던 자가 무게를 견뎌내면 우부메는 성불한다, 는 내용이다. 대신 이 소설에서는 아이를 임신한 채 죽은 여자의 정념이 빙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반적인 혹은 사회 통념적 냄새가 나는 명제 하나. 남편 슈헤이는 천인공노할 개새끼이고 아내 가나미는 힘없는 약자라는 뉘앙스를 풍기고는 있으나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나는 외려 다카노 가즈아키 자신이야말로 천하의 악독한 자라고 본다. 그러나 그럴 의도가 명백히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신한 가나미는 출산을 원했기 때문이다(순서야 어찌 됐든).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둘 모두의 책임이다. 콘돔이라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얇은 비닐 쪼가리와 사후 피임약,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ㅡ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ㅡ 여자건 남자건 매한가지이므로(《투캅스 2》의 이 형사마저도 의도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광범위한 익명의 ‘그 남자’도 같은 맥락이다. 『K ․ N의 비극』은 강간과 같은 범죄를 다루지 않았다. 부부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자칫 이상적인 해답을 요구하는 신파로 흐를 수 있다고 보는 거다. 범죄의 피해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면, 어지간한 세간의 시선으로는 중절 수술을 필요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권유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드러나는 이야기보다도 더 절실한 경우라면 어떨까. 생명 의식? 좋다. 선악과 시비? 그것도 좋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섹스를 쾌락의 관념으로 보든 생명을 잉태하는 성스러운 관념으로 보든 섹스 후에 벌어질 일만은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의 섹스로 계획에 없던 임신을 했다고 하여 낙태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인 문제로 출산을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이 문제가 가장 클 터다) 등으로 아이를 버리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윤리를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출산해야 한다, 이런 생각부터가 글러 먹은 것은 아닐까? 분명히 자신들의 아이라는 제2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꼴이다. 내가 보는 『K ․ N의 비극』은, ‘빙의’라는 현상을 들이밀지 않았다면 ‘피임을 생활화합시다’ 식의 빤한 논리로 흐를 뻔한 소설이다. 소재 자체가 너무 쉽게 들여다보이는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차라리 그쪽은 제쳐 두고(맨 처음에 썼듯 결국 하나의 귀결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내 가나미에게 빙의 현상이 나타났을 때의 기술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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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 - 실전 잠적의 기술
프랭크 에이헌 지음, 최세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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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어쩐지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다지 회자되지도 않은 느낌이다. 물론 온라인과 현실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으나 어찌 됐건 풍문으로 듣건대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큰 어필은 하지 못한 것만 같다. 다들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걸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집이 있고 직업이 있는 자들도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들에겐 이 세계가 마냥 아름답기만 해서 어떻게든 돈을 벌게 해 주는 사장에게 목매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일까? 글쎄, 그건 그냥 팍팍한 현실일 뿐이고, 이 책은 단순한 흥미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ㅡ 아니면 나 혼자만 현실에서 큰 재미를 못 보고 있는 것일지도. 프랭크는 스킵 트레이서(skip tracer)다. 스킵 트레이서란 다른 사람들을 추적해 개인정보 캐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상습 전과범, 빚쟁이, 법정 소환장을 받은 목격자, 그 밖에 도망칠 궁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추적 대상이다. 그는 어떤 일(책에 나온다)을 계기로, 아예 종목을 바꾸어 이 책을 썼다(사실 같은 맥락일 테지만).



    가정부   여보세요?
    프랭크   안녕하세요. 저는 택배사 UPS의 팻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X씨에게 지급된 수해복구 패키지를 전달해야 하는데요.
    가정부   음…….
    프랭크   본인이 서명을 해주셔야 해서요, 언제쯤 들어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정부   그게.
    프랭크   괜찮습니다. 물품 반송도 가능하거든요.
    가정부   (묵묵부답)
    프랭크   제가 그냥 알아서 처리할까요?
    가정부   아, 아뇨. 이리로 보내주세요.
    프랭크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찾아뵙고 사인을 받을까요?
    가정부   6시쯤이면 오실 거예요.
    프랭크   감사합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성관계를 맺은 모니카 르윈스키를 잡았다. 너무 간단하지 않나? 그럼 쫓는 것이 아니라 쫓기는 입장에서 도망치려면? 어떤 상황이라도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잠적에 임하려면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은 주거 조건이다. 일단 신용 기록 조회를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부동산과 대출회사를 피하는 것일 텐데, 현대인의 삶에서 대출이란 잘 튀긴 닭 한 마리와 맥주의 관계와도 같아서 멀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인을 만들라. 부동산 중개인이나 세를 놓는 사람에게 당신의 회사가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고, 공공 서비스와 케이블 방송 역시 법인 명의로 개설한다. 더 좋은 방법은 집주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하는 주거 조건을 찾는 것이다. 집 전화는 설치하지 말고, 목숨이 위험한 경우에만 이 역시 법인 명의로 개설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은 금물이다. 선불 휴대전화나 선불 신용카드(카드사를 통해 발급과 충전이 가능하다), 콜링카드(후불제 장거리, 국제전화용 카드), 가상 전화번호(국내에서는 한 달에 2천 원 정도라고 한다)를 써라. 이 모든 게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 것 같다면 은행, 웹사이트, 각종 고객 상담 부서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정보를 바꾸고, 선불 휴대전화를 살 돈마저 없다면 동전 몇 개로 공중전화를 이용하길. 운전을 할 때는 딱지를 떼지 않도록 안전하게 하고. 이 책에는 이외에도 허위정보 유포하기, 소셜 미디어 안에서 잠적하기, 나라를 떠나 잠적하기, 위장자살 개론, 심지어 아예 잠적하지 않고 사는 법까지 적혀 있다. 나는 가능하다면 나라를 떠나거나 위장자살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가진 돈이 없으니 이 방법은 무리다. 그러나 당신이 부자이고, 아들이 당신의 돈을 가로채려 한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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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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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이었나. 출판사는 다르지만 같은 역자가 옮긴 『무라카미 라디오』 ㅡ 당시에는 심플한 제목이었고, 단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었다 ㅡ 라는 책이 있었다. 그 후 10년도 더 지난 지금,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가 세 권으로 재출간됐다(이 책은 그 첫 번째). 그쪽 사정에 밝지 않으니 지금도 계속 연재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에세이만큼은 쭉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만간 그의 새 소설도 국내에 번역될 것 같긴 한데, 소설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오히려 에세이 쪽이 더 소설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소설, 뭐 이런 논리라면 설명이 되려나. 어떤 작가가 됐건 소설보다는 조금 어깨에서 힘을 뺀 듯한 논조의 글을 읽게 되면 새롭고 재미난 발상이란 것이 더 풍경화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그렇다고 푸근하다거나 반대로 뒤통수를 때릴만한 충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ㅡ 아베 고보의 작품에서였나,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지방에서 발달하고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산업 지대에서 발달한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도 매일같이 자고 일어날 때 살풍경한 느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에세이집이란 건 태생이 단속적이라서 화장실에 가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야구 중계를 보는 틈틈이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중편 소설보다는 빨리 읽게 된다. 아마도 흡연자의 경우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사이에 두세 편 정도는 후딱 읽어버리지 않을까(나는 그렇다). 그래서 아무 곳에나 도그지어를 만들어 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다고 해도 '이게 무슨 말이지'와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차피 소설 같긴 하지만 분량이나 흐름으로 따지면 장편(掌篇)의 느낌일 테니까.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고 썼다. 그는 '안녕'을 말해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고 토를 달았지만 실은 어떨까. 일단 한번 말해 볼까. 안녕?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2001년이었나. 출판사는 다르지만 같은 역자가 옮긴 『무라카미 라디오』 ― 당시에는 심플한 제목이었고, 단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었다 ― 라는 책이 있었다. 그 후 10년도 더 지난 지금,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가 세 권으로 재출간됐다(이 책은 그 첫 번째). 그쪽 사정에 밝지 않으니 지금도 계속 연재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에세이만큼은 쭉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만간 그의 새 소설도 국내에 번역될 것 같긴 한데, 소설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오히려 에세이 쪽이 더 소설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소설, 뭐 이런 논리라면 설명이 되려나. 어떤 작가가 됐건 소설보다는 조금 어깨에서 힘을 뺀 듯한 논조의 글을 읽게 되면 새롭고 재미난 발상이란 것이 더 풍경화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그렇다고 푸근하다거나 반대로 뒤통수를 때릴만한 충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아베 고보의 작품에서였나,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지방에서 발달하고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산업 지대에서 발달한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도 매일같이 자고 일어날 때 살풍경한 느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에세이집이란 건 태생이 단속적이라서 화장실에 가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야구 중계를 보는 틈틈이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중편 소설보다는 빨리 읽게 된다. 아마도 흡연자의 경우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사이에 두세 편 정도는 후딱 읽어버리지 않을까(나는 그렇다). 그래서 아무 곳에나 도그지어를 만들어 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다고 해도 ‘이게 무슨 말이지’와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차피 소설 같긴 하지만 분량이나 흐름으로 따지면 장편(掌篇)의 느낌일 테니까.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고 썼다. 그는 ‘안녕’을 말해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고 토를 달았지만 실은 어떨까. 일단 한번 말해 볼까. 안녕?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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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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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 책, 두껍다. 해도 해도 너무 두껍다. 두 권 합쳐 1,100쪽이 조금 안 되니까 고래가 숨을 쉬러 물 밖에 나올 때처럼 독자들도 이따금씩 책을 덮고 딴짓을 좀 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애초 말을 안 꺼냈을 거다. 『진상』, 엄청나게 느리다. 여기에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데, 집어넣은 이야기가 다채로워서 아마도 앞서 말한 '딴짓'은 이 부분에서 다소간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백화만발(百花滿發)이랄까, 그러면서도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삼년불비(三年不飛)랄까, 끝까지 곧장 읽어 내려가면 분명 뿌듯한 감개가 있으리라. 더구나 이만한 분량을 소화해 냈다면 어느 자리에 가서도 당당히 뽐낼 수 있다. 1,000쪽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까(사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 가지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겠지만 시대물 ㅡ 그것도 '에도 시대물'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독자들이 가지는 반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번이 어쨌느니 마치가 어쨌느니 나가야가 어쨌느니 하는 것들, 거기다가 가게 이름과 수많은 등장인물들까지, 현대물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숱한 고유명사로 인해 자연스레 형성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에 의하면 이 '문제'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음험한 소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적절치 못한 해결책을 조장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해서 이 '문제'라는 허들만 넘게 되면 혹은 이것을 '문제'로 취급하지 않으면 꽤 쉬운 형태로 『진상』 읽기에 돌입할 수 있다 ㅡ 친절하게도 책 뒷날개에 등장인물을 따로 모아 놓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것마저 싫다면 그냥 가만히 서서 아웃되는 게 좋을 정도다. 패스트볼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기습 번트를 시도했는데 난데없이 체인지업이 들어와 포수 파울 플라이로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까딱하다간 더블 플레이를 내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지 정보에 '기적의 신약 영묘왕진고(靈妙王疹膏)를 둘러싼 비밀'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잠깐 동안 저 옛날의 '호랑이 연고(tiger balm)'를 떠올렸다……. 어쨌든 그 시절이라고 달랐겠냐마는 일단 신약이니 백신이니 하는 말에는 임상실험, 독과점, 라이선스와 같은 단어들이 뒤따르곤 하는데, 『진상』은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 쫄깃한 사리라도 하나 추가하듯 앞서 언급했던 '다채로운 이야기'도 버무려져 있고. 특히 두드러진 것은 ①외모가 남녀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②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 ㅡ 이 두 가지인데, 어느 쪽이나 볼 안쪽에 스리가 생긴 것처럼 까다롭기 짝이 없다. 무말랭이같이 생겼든 거부감이 들 정도로 잘생겼든 간에, 다소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미추를 다룬다면 역시나 보르헤스의 문제(음험한 소망)가 끼어들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이란 건 또 어떻고.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지만, '가업은 장남이 이어받는다'는 통념이 있다면 그 형제들은 그저 쓸모없는 터럭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편집자 후기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ㅡ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는 이 쓸모없는 터럭을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 놓아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명해냈다. 『진상』은 ㅡ 진상(眞相) 또는 진상(進上) ㅡ 신약 왕진고를 둘러싼 과거의 살인 사건, 남녀의 외모, 장남이 아닌 남성, 이것을 줄기 삼아 읽어 나가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묘사인데, 외모, 성격, 언변, 무력 등등 꽤 자세하다 싶을 정도로 나와 있어서 흡사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2013』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사스콰치같이 생긴 게 아닌 바에야, 안되는(못생긴) 놈은 뭘 해도 안된다, 안되는(못생긴) 놈은 하다못해 제비뽑기를 해도 안된다, 따위의 말이 통할 리도 없는데다가, 굉장한 미소년으로 그려지는 유미노스케 역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남성적인 멋은 찾아보기 어려워서 외려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므로, 어찌 보면 이것도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밸런스가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ㅡ 그래서 역시나 유미노스케의 개성보다는 헤이시로의 내레이션 쪽이 더 설득력 있다. 각설하고…… 라기에는 좀 뜬금없지만, 그럼 자, 이제 『진상』을 읽을 시간입니다(더 이상 쓰기가 귀찮은 감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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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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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피츠제럴드 사랑은 끔찍하다. 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도 피츠제럴드에 관한 에피소드가 (또!) 들어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어떻게든 유명해지고 큰돈을 손에 넣어야 했다는 것에 비해 하루키 쪽은 야구장에서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보며 소설가가 되자고 한 모양이니, 그런 면으로 보자면 이쪽은 어쩐지 박력이 조금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있다. 물론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의 글에 대한 신뢰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것처럼 하루키의 작품에도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뭐 어느 쪽이든 작가란 모름지기 글만 잘 쓰면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하루키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 혹은 가장 마음에 다는 것은 나에게는 단편 「토니 타키타니(トニー滝谷)」 쯤이 될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어째서 이름이 ‘토니 타키타니’여야만 했는가, 에 초점을 맞추면 더 흥미가 생긴다. 80년대 중반 하루키가 하와이를 여행했을 때의 일인데, 중고 할인매장에 들어갔던 그는 ‘TONY TAKITANI’라는 글씨가 인쇄된 노란색 티셔츠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역시나 ‘타키타니’라는 발음 때문이었는지 하루키는 글자의 주인이 일본계 미국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어 그 티셔츠를 구입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토니 타키타니」라는 단편이 탄생했고, ‘토니 타키타니’의 정체는 당시 하와이 주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위해 만든 옷이었다는 것이 십수 년이 흘러 밝혀진다. 일련의 메커니즘을 보면, 이렇듯 대부분의 소설은 별다른 계기 없이 우연찮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츠제럴드처럼 경제적으로 절실했기 때문에야말로 좋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런 케이스는 드물지 않을까. 하루키의 편집자 중 하나는 ‘작가란 원고료를 받으면서 성장해가는 존재’라고 했다던데 왠지 피츠제럴드는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하루키란 작가는 어느 쪽일까 하는 것을 굳이 따져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개인적으로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소설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세이까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지금도 어떻게든 하루키의 글은 끊임없이 읽고 있는 셈이다. 본인은 ‘당신 에세이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흐물거리기나 하고 사상성도 없고 종이 낭비다’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렴 어때. 에세이란 다 그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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