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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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언어는 말[言]이 아닌 눈빛과 몸짓이다. 그리스어로 용감함을 뜻하는 안드레아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이름만큼 용감하긴 한가? <플레이보이> 잡지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모든 형제를 비롯한 가족을 증오하며 남의 음식을 빼앗는가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함을 지르는 그의 아버지이자 개자식인 프란츠 사버 알트만의 앞에서도 용감할 수 있었던가? 제 아버지로부터 인생을 도둑맞고 알트만 하우스에서 알트만 사료를 먹고 자란 안드레아스. 적절치 못한 비유이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의 둘째 폴은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엔 순응하고 말았고 그에 비해 장남은 교묘히 머리를 굴려 부모의 그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집에서는 언제나 포핸드와 백핸드로 얼굴을 후려 맞고 학교에 가면 회초리 든 선생에게 엉덩이를 내줘야만 했던 안드레아스의 결말은 어떠할까. 형 만프레드와 장난을 치다 실수로 침대에 불이 붙었을 때만 해도 그는 ‘우리, 이 집과 집주인을 태워버리자!’고 굳은 의지를 다졌을는지 모를 일이다.



내 패배의 마지막을 언제나 프란츠 사버 알트만이 장식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 본문 p.238



태어나자마자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 안드레아스는 그의 아버지만큼은 악랄하지 못한데, 그 스스로가 나서 자신을 가리키는 대략적인 단어들을 나열했을 정도다. 복수, 낙제, 정신병 걸린 여자의 아들, 노동 봉사, 키다리, 곱사등이 새가슴, 가망 없음, 패배자…….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아버지의 집에서 죽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가든지.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이 적인 아버지의 나약함을 간혹 목격하며 아버지 스스로 자신이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이 아들은 제 아버지가 어떻게 고독한 삶을 견뎌냈을지 궁금해 한다. 안드레아스가 동일시하고픈 사람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 중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넓은 세상을 보여줄 부모가 없었으며 아이다운 인생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안드레아스는 아마도 패배자의 본보기가 되어 삶을 마감할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타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 개새끼, 내 아버지는 무려 10년을 벌 받지 않고 버텼으나 이 돼지 새끼도 한 번쯤은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아야 했다. 자기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멸시했는지!
― 본문 p.269



안드레아스가 최후의 저항을 가했을 때 그는 권력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라는 가혹한 폭군의 몰락을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 처량히 앉아있는 아버지를 보고도 그는 여전히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 길고 길었던 알트만 하우스에서의 생활과 도둑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단어들, 양육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모두 뒤로 한 채 안드레아스는 집을 떠나고 만다. 걷지 못하고 뛰면서. 그러고는 타인의 인생을 못 쓰게 만드는 데 재능이 출중한 프란츠 사버 알트만에게서 벗어나 세계 각지를 돌며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한다. 그는 돈리비의 진저맨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고 교활하지도 않다. 아마 그랬다면 악명 높은 알트만 하우스에서부터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을 터였다. 섹스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들을 조숙한 또래로부터 배운 안드레아스. 아버지란 존재를 통해 분노를 깨우친 아들. 남을 가르치려고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도둑질과 저항을 알게 된 우리의 주인공. 그는 끝내 스스로를 아버지와 같이 개자식이라 정의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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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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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보다 세련되고 직접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보다는 복잡한 구조를 띤다. 소설은 카렌 두베의 『폭우』만큼은 아니어도 시종일관 비에 젖어있는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지배적이고, 은밀하고 간접적이게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하기보다는 은유를 통한 보여주기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더군다나 끈질기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살아있는/살아남은 모든 것에 저주를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ㅡ 팽 선생이든 누구든 ㅡ 볼라뇨는 그것조차 잘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도 방관하려는 자와 묵살하는 자,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나아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자, 그것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종국에는 외려 그 스스로가 죽어갈 뿐인 자. 어느 쪽도 재미없는 인간이며 유령 같은 인물들이다. 어쩔 수 없는 분노와 선험적 도발이 진득하니 밴 이 작품은 내전과 전체주의라는 배경을 지렛대 삼아 긴장된 고독감과 불안감을 그리고 있는데, 팽 선생은 시인 바예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제 몸에 들러붙은 젖은 외투로 인식한 채 보수적이고도 자기 합리화적인 진구렁에 흔쾌히 발을 들이밀고 만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중간자적 위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누군가를 호리는 엄펑소니와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팽 선생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자신의 머리 위를 덮으려 하는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심지어 그것을 쫓기까지 한다. 그러나 곧 닥친 체념과 혼돈, 암울한 날씨/무드, 비웃음, 공격, 손쉬운 타협의 문고리를 덜컥 잡아버린다. 최면요법가인 스스로가 도리어 이 세계가 내뿜는 불길하고도 음습한 최면에 힘을 잃는 것이다. 그의 자조처럼 ㅡ 뭔가 불분명한 것이,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무엇인지 확실하게 감 잡을 수 없는 것, 그 냄새가 잠자리까지도 쫓아올 것만 같은 불안함. 어딘지도 모르는 건물에 갇혔을 때조차 그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예호의 딸꾹질을 누군가가 꾸며 낸 거짓이라 추측하지만, 실은 그러한 단정조차 거짓의 산물이었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로 대변되는 것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 텐데, 그마저도 차크몰(하필!) 옆에 선 인물이 쌍안경으로(고작!)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끝으로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팽 선생』은 만질 수조차 없는 유령 같은 세계에서 지내는 유령 같은 사람들을 내세워, 방향성을 상실한 개체 하나와 그 개체들이 모인 다수의 또 다른 개체 덩어리 그리고 시작과 끝, 머리와 꼬리가 불분명한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이자 가난했지만 죽고 나니 유명해지겠다는 마지막 말은, 어쩌면 수많은 팽 선생들에 둘러싸인 볼라뇨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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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패밀리
토니노 베나키스타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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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이여, 너를 지켜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너의 착각이다…… 게다가 너를 해치려고 하는 우리 수는 차고 넘친다…… 누가 너와 네 단란한 가족을 염려해 준단 말인가? ㅡ 만초니의 독백이거나 훗날 다시 쓴 회고록의 일부이거나.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건만 그렇다고 마피아들의 손 위에서 열심히 일해야만 하는가? 내가 보기에 『위험한 패밀리』는 당연할 정도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누가 이것을 소설 속 텍스트로만 읽고 싶어 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 쪽을 택했다. 영상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마피아, 마피아…… 마피아(mafia)라는 단어의 유래는 애매모호하다. '대담한 사람'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찾는 이도 있고,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 즉 '프랑스에게 죽음을, 이탈리아는 외친다'라는 문장에서 찾는 이도 있다. 또 누군가는 프리메이슨 계열의 비밀 단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피아라고 하면 으레 시칠리아를 떠올릴 텐데, 마피아란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 나아가서는 그들(만)의 도덕까지 아우르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족(family)인 것이다. 본래의 제목 '말라비타(malavita, 소설 속에서 만초니가 키우는 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올 때 '위험한 패밀리'로 바뀐 것이, '패밀리'라는 단어를 두고 단순히 한 가정을 이르는 의미로 해석한 것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작품에서도 마피아를 가리킬 때 5대 패밀리 등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오메르타(omerta)를 깼다. 오메르타란 무엇인가. 마피아 계율 중 하나로, 마피아들이 조직원이 될 때 하는 선서이다. 이 침묵의 계율은 어떤 상황에서도 법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범죄 수사에 절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초로 하며 '어길 시 곧 죽음'이라는 절대 가치를 지닌다(p.109). 실제로 시칠리아에서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나 그로 인해 벌어진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나 관리에게 문제를 호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만일 자기의 아버지가 피살되었고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 하더라도 살인자를 당국에 고소하지 않았다. 직접 복수에 나서거나 그 마을의 권위 있는 자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여기서 권위 있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마피아'다……(안혁 『마피아의 계보』 살림, 2003). 소설은 이 오메르타를 깨고 검찰 측 증인인 전향자가 되어 FBI의 보호를 받아 이주한 조반니 만초니 가족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리오 푸조의 소설들처럼 느와르나 스릴러의 빛을 띠지는 않는다. 거들먹거리는 배관공이 아니꼬워 그의 팔뚝을 망치로 뭉개거나 미국인들을 뒤에서 욕하는 슈퍼마켓 직원에게 복수하려 건물을 날려버리는가 하면, 마을의 식수를 오염시킨 공장을 통째로 없애버리는 등 그들을 보호해야 할 당국으로 하여금 보호는커녕 외려 달래야 할 지경으로 몰아간다. 그러던 중 만초니 가족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곳에서,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실타래를 줍게 된 조직원들의 눈에 띄어 위험에 처하고 만다. 『위험한 패밀리』에서 마피아는 총을 든 채 협박과 위협을 일삼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단지 생활고에 찌들었을 뿐인 우스꽝스러운 가장으로 등장한다(영화 《간첩》의 남파 공작원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첫머리에도 썼듯 만초니의 낮은 독백, 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ㅡ 그의 아들 워런마저 학교에서 소(小) 마피아가 되어가는 현실 ㅡ 에 대한 물음이라면 나로서는 적절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존 도커가 그러모은 『폭력의 기원』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싸움을 좀 했습니다. 말보가 이것이 쉽더라고요. 싸움을 하다 보니 따르는 놈, 비슷한 놈 몇몇이 생기지요. 그래서 그놈들이랑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상의도 하고 싸움하기 전엔 작전회의도 좀 하고 그러지요. 그랬더니 그걸 보고 조직폭력배라고 그러데요. 깡패가 된 거지요……. 그런데 그거 아쇼? 인류가 시작되고 가장 오래된 학문이 군사학이고 싸움하면서 편을 나눈 집단이 가족보다도 먼저 생겼다는 거. 다른 말로 하면 조직깡패지요. 이조시대에도 있었고 로마시대에도 있었고요. 사람 사는 곳에 없어지지 않고 늘 있는 거…… 나 하나 제친다고 이것이 정리될 것 같아요?

ㅡ 『장진 시나리오집』 中 《공공의 적 1-1 강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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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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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농담 하나 말해주겠다. 데이트 약속이 잡힌 한 청년이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빠, 정말 긴장돼서 그러는데요, 갑자기 말이 막히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될까요?」 아버지는 말한다. 「아들아. 3F가 있단다. 음식(food), 가족(family), 철학(f(ph)ilosophy)을 말하는 거지.」 그러자 아들이 말한다. 「알았어요, 꼭 기억할게요.」 그렇게 아들은 데이트를 하러 나갔고, 저녁을 먹은 후 자동차 안에서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다. 그러다 정적이 찾아왔고, 아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궁리한다. 이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아하,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려 보자. 「그런데 메리, 아스파라거스 좋아해?」 「글쎄, 별로 안 좋아해.」 「그럼 형제가 어떻게 돼?」 「형제는 없어.」 「좋아, 그렇다면 너에게 오빠가 있었다면, 그가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했을까?」 이게 철학이다. ㅡ 팟캐스트로 진행된 대화를 엮은 『철학 한입』에 나오는 글이다. 고요한 해 질 녘의 바다 같은 산문집을 낸 이 상냥하고 도저한 선생의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나는 이것을 고종석의 글이 주는 것과 다른 쾌감이라 여긴다). 최근 들어 레비와 우엘벡이 주고받은 편지(『공공의 적들』)를 읽어서인지 『밤이 선생이다』는 조금 더 침착하고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 행동하는 철학이라 하기엔 조금 거리가 벌어져 있지만 책상머리 논고라 잘라 말하기에도 온당한 표현은 아닐 듯싶다. 데이트를 즐기는 청년이 아스파라거스와 형제만으로도 쉬 철학의 첫걸음을 뗀 것과 같이, 우리도 매한가지로 '모자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갈림길에서 머뭇거릴 필요는 없을는지 모른다. 시작과 끝은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사이좋게 들러붙어 있는 까닭이다. 선생의 전공이 아닌 이야기를 모은 이 첫 산문집은 최근 꽤 입길에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였는지 외려 읽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내키지 않은 것이다. 못된 습성이라 비꼬는 작자들이 있어도 부러 열기가 사그라질 때를 기다려 손에 넣었다. 물론 당분간은 이러한 분위기가 죽 이어질 것 같긴 하나 쓸모없을지 모르는 객쩍은 용기를 내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이 책을 출간되자마자 읽었다면 멋모르고 빠져 앉은자리에서 끝장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꾸준히 당기는 아침 커피 같은 글이다, 여러 모금 나누어 마셨다 ㅡ 일전에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책장 넘기는 것에 충분한 시간을 들인 것은 꽤나 잘한 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선생이 실은 캐비어 좌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쓸데없는 우려로 그치고 말았다. C10H14N2라고 대문짝만하게 끼적여 놓아도 이것이 니코틴인 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인간과 사물에 천착한 이 산문들로 하여금 저 화학식이 설명하는 기본 성질과 빛깔만이라도 핥게 된다면 이로써 서툴 수밖에 없는 상념과 반성의 시간이 비로소 선생질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아직, 모자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책을 읽는 사람과 모자를 쓴 사람과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함께 그린 그림이 있다. 문제는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이고, 요구하는 답은 그 모자 쓴 사람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벌써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간단한 셈도 곧잘 해내는 이 아이가 모자 쓴 사람을 못 알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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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라지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1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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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겠다. 먼저 ‘유령’이 유령 짓을 하는 이유는, 책을 덮고 나면 다소 개연성이 떨어진다고도 생각된다. 거기다 주인공의 친구 스퀘어스도 무적의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으니. 물론 반전의 맛은 좋다. 소설이 끝난 지 한 페이지도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이어진 에필로그에서까지 놀라게 하는 재주에는 역시 할런 코벤이라는 말이 나온다. 「네 형은 살아 있단다.」 이 한마디. 이 한마디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인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얌전히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옛 애인은 죽고 형과 현재의 애인마저 사라지지만 주인공 윌에게는 거리의 만물상 같은 조력자가 있다. 그 조력자는 셜록 홈스의 노숙자 친구들처럼 정보원을 이용하는가하면 어찌된 일인지 FBI 부지국장에까지 연줄이 닿아 있는 모양이다. 어찌 됐건 윌은 스퀘어스라는 든든한 친구와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가는데…… 사실 지금 나는, 입을 조금만 잘못 놀렸다간 헤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도대체가 이 민머리 작가는 언제나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된 감상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한두 문장이라도 실수하면 아직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야유 섞인 질타를 받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줄거리를 섞어가며 써 보겠다. 윌의 형 켄은 어릴 적 이웃 소녀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가족으로부터 사라진다. 그 소녀는 다름 아닌 동생 윌의 여자 친구. 시간이 흘러 11년 후 윌은 새로운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 역시 어느 날 훌쩍 그의 눈앞에서 증발되고 만다. 어릴 적 만났던 동네 친구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다른 방식으로 윌의 인생에 간섭하는데, 만화 『20세기 소년』의 살인마 버전이랄까, 물론 그쪽에서는 좋든 궂든 찾고 싶어 했던 ‘친구’였으나 할런 코벤의 소설에서만큼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윌이 두려워했던 친구는 이제 ‘유령’이 되어 나타났으니까. 더군다나 이 일련의 이야기는 상당한 복잡성을 가지고 진행되는데다가 초반에 꽤 많다 싶을 정도의 인물이 등장하니, 일단 읽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담배 한 개비 피우고, 커피 한 잔 마시고, 화장실 한 번 다녀오고, 과연 이럴만한 여유가 생길까? 이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리뷰랍시고 애초에 졸필이건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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