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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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엑스페리먼트》를 기억한다. 《피아니스트》에서 비리비리하게 나왔던 애드리언 브로디가 주연한 영화 말이다.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 남자들을 간수와 죄수 그룹으로 나눈 다음 2주간 가상의 감옥 체험을 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영화를 봤을 당시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웬걸, '스탠포드 모의 교도소 실험(SPE)'라는 실제 있었던 일에 기반한 스토리였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실험, 평범하고 신체 건강한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수감자'와 '교도관'으로 나눈 후 모의 감옥 실험을 한 사람이 이 『루시퍼 이펙트』의 저자 필립 짐바르도다……. '루시퍼 이펙트'란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전환시키는 상황과 시스템의 영향력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앞서 말한 교도소 실험과 과거 이라크 교도소에서 자행된 포로 학대 등등.

 

 

예상했던 대로 해방된 수감자들은 일제히 교도관들을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 그들은 교도관들이 그들의 업무에 요구되는 수준을 훨씬 벗어나서 창의적인 학대 방법을 고안해냈으며 몇몇 사람을 골라내서 특히 심한 학대를 가했다고 느꼈다 (...) 수감자들은 '착한 교도관' 역시 재빨리 지목했다. 그들은 수감자들에게 굳이 잘해준 것은 없지만 수감자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교도관 역할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 '못된' 교도관과 '착한' 교도관 사이에 '원칙에 충실한' 교도관이 있었다. 그저 임무와 맡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규칙 위반에 대해서는 벌을 주지만 수감자 개인에게 사적인 학대 행동은 하지 않았던 교도관들이다.


ㅡ 본문 p.296-297

 


마음을 조종하는 영향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특정 수단들을 알아보기 전에 또 다른 가능성을 고려해봐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만큼은 무사할 것이란 '개인적 무취약성'의 착각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걸! (...)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가 배우게 될 교훈을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거부할 수 있다. 여러분 자신은 정상 분포곡선의 꼬리 끝에 놓인 특별한 경우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방어 무기를 내려놓고 꼬리를 꼰 채 붙잡히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게 좋다.


ㅡ 본문 p.635

 

 

이 실험에서 착한 교도관이 되는 건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못된 교도관'과 상대적으로 보이도록 거칠게 굴지 않으면 되니까. 뭐, 이건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이 실험에서는. 왜 성격이 변하는가, 왜 상황이 중요한가, 어떻게 시스템이 이런 파급력을 가져올 수 있나, 하는 점이 더 크다. 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고 싶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책에 나오듯 '선한 자아(good self)'가 '악한 상황(bad situation)'을 지배한다고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지른 행동은 그게 아무리 끔찍하고 잔혹하건 간에, 나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다 ㅡ 아니, 나 또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시스템이란 건 뭐냐, 고 한다면 ㅡ 시스템은 그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의 지배를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법은 누가 만드나? 경찰은? 범죄자는? 교도관은? 수감자는? 감옥은? 시스템이 이 모든 것들은 만드는 건가!?

 

 

 


▼ 에셔(Maurits C. Escher)의 「원의 극한(천국과 지옥)」이란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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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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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괴상한 버릇(편견)이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은 읽지 않는다는 것. 그게 조금씩 깨지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로 시작해서 이제 온다 리쿠로도 넘어오는 중이다 ㅡ 이 『달의 뒷면』에서 인간의 수용이란 것에 대해, '정보의 취사선택' 운운하는 부분은 좀 진부하다고 느꼈고, 게다가 소재도 진부한 '현대인의 습성'에다가, 화장(火葬)을 하고 봤더니 유골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에피소드도 그랬다. 그런데도 이 소설, 재미있다……. 본문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것을 '도둑맞는다'고 한 건 어째서였을까. 왜 피동의 형태로 표현된 걸까. 등장인물 교이치로처럼 일기를 써 자신의 1분 1초를 반추하지 않으면, 내가 나임을 오롯이 만족하지 않으면 무엇인가에 '당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달의 뒷면』을 지배하는 '텍스트(책)와 물'의 측면에서 봤을 때 자꾸만 편해지려는, 그래서 반대로 집(나) 안에서 나가려 하지 않는 '나르시시즘의 뒷면'을 보여주려 한 것인지. ……그나저나 소설 속에 왜 하필 문학작품의 제목으로 끝말잇기하는 장면을 넣은 것일까. 왜 하필 물이 차오른 곳이 도서관이었을까. 왜 하필 교이치로의 창고에서 낡은 LP를 보여준 것일까. 내가 보기에 '달의 뒷면'이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ㅡ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어쨌든 『달의 뒷면』을 지배하며 가장 크게 드러난 물질은 '물(水)'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 물을 두고 부드러움을 간직한 우월적인 것이라고도 했다가도, 물은 난폭하다며 '물 속에서의 승리는 바람 속에서보다 더 드물고 위험스럽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책에 이런 말을 써놓았다.

 

 

사람과 세계의 싸움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쪽은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는 나의 도발(挑發)이다'라는 공식을 선언함으로써, 쇼펜하우어의 교훈을 완전히 하고 (...) 나의 날카롭고 뛰어난 지도력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므로 나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ㅡ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자, 그럼 다시 소설을 보자. 작품 후반에서 남겨진 세 사람은 스스로가 '도둑맞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도둑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ㅡ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실종된(도둑맞은) 그 기간 동안만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그에 대한 자각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 남는(남겨진) 문제는 빤하다. 세상살이 하찮다면 하찮은 것이지만, 내가 아니어도 별 상관 없다는 듯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질타, 남은 교이치로 · 다몬 · 아이코를 내세운 정수리에 침 놓기, 비(非)활자화에 대한 아우성, '다수파'라는 것에 대한 동경과 거부감, 개인(個)과 공동체(共)를 모두 소망하는 이율배반…….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반대급부의 문제가 등장한다. 이래서는 그저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은 이 소설은 정신병(혹은 편집증) 환자 몇의 소동극이었습니다, 하고 에필로그에 크게 써놓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런 식이라면 앞서 '텍스트(책)와 물'이라 언급했던 부분도 확대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달의 뒷면』, 정체가 뭘까. 검은색과 흰 색의 정중앙에 서서 잿빛을 띠는, 어디로든지 튀어나갈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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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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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조지 오웰이 1946년 쓴 짧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의 구절이다. 지금은 몹시 유명한 문구가 되었다. 조지 오웰이라고 하면 역시 『1984』나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되고 나 또한 이 두 작품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이런 청맹과니 같은 짓은, 이 두 소설이 조지 오웰의 저술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특히 『나는 왜 쓰는가』란 에세이집을 읽으면서부터. 그런데 이건 뭐 소설이나 다름없다 ㅡ 읽고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오웰은, (일단은)소설가이지만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는 거다. 이 양반이 대학을 포기하고 식민지 경찰 생활을 했다는 이력만으로도, 또 부랑자와 접시닦이를 해봤다는 경험만으로도 쉬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타이틀을 에세이(「나는 왜 쓰는가」)의 제목으로 차용한 것을 보면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1991)을 떠올리게도 한다…… 나만 그런가? 하여간, 그럼에도 오웰의 소설과 에세이를 따로 볼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84』와 『동물농장』만 봐도 그렇다. 《뉴 라이팅》지에 게재한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에서 그는 식민지 경찰이었는데,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코끼리를 보고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한다. 그러나 잠시 후 오웰은 다시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이유?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ㅡ 「코끼리를 쏘다」(1936)

 

 

 

그는 엄청나게(몇 페이지에 걸쳐) 고민한다. 코끼리를 쏠 것인지를. 종국엔 세 개의 탄알을 소비하며 코끼리를 쓰러뜨리긴 하지만 그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는가? 그건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에세이집이라고 하기엔 좀 많은(?) 29편의 글들을 담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저 옛날 키치적인 슬로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의 경고성 조곡(組曲과 弔哭 둘 다 마침맞지 않을까)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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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필로시네마 -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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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좀 쉽게 풀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근본적으로 영화 얘기를 하고 있긴 한데 거기에서 뽑아낸 철학적 구조가 중심이 되니, 뭐 철학 용어가 나와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필로시네마』는, 살짝 늘어붙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라는 부제처럼 온갖 스펙트럼의 탈주를 갖고서 진행되는 영화 이야기다. 인간은 뭐든 사유하기 마련인데 여기선 빠르게 동작하는 이미지에서 어떤 사유를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게 문제가 된다. 그것도 '탈주'를 ㅡ 삶으로든 삶에서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러니까, 이건 철학서다……. 근데 그 '탈주'라는 게 사실은 에서(Maurits C. Escher)의 판화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게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탈주가 당차고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쉬이 볼 수 있는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등장하는)영화들은 모방의 예술이 아니라 창조의 예술 ㅡ 점, 선, 면, 체가 빚어내는 가상의 이미지 ㅡ 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그런 정신사나움에 지나지 않겠지. 가상 같은 현실, 현실 같은 가상,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하이퍼리얼리즘이 난무하는 곳에서 어찌 '탈주'하지 않고 배기겠나? 그런데 약간 우스운 측면, '막힘'이 없다면 탈주 또한 의미가 없고 전혀 아름답지도 않을 거다. 우리의 앎에 영향을 주는 현실, 가상, 타자의 임팩트는 몹시도 강력한데 거짓을 거짓이라고, 거짓을 현실이라고, 현실을 거짓이라고…… 이렇게 끊임없이 되묻고 사유하는데, 내가 과연 현실(혹은 가상)을 놓칠 수 있을까? ㅡ 「이러니 내가 널 못 잡아넣겠냐?」(영화 《공공의 적 1-1 강철중》에서 철중의 대사) 우리는 어떻게든 현실(가상)을 잡아 처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보는(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해 칸트와 니체의 의견은 나뉘어지지만 둘 다 사유만은 고개를 주억거릴만하다. 「안경으로 바라본 세계와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 중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일까?」(강신주, 『철학 VS 철학』, 그린비, 2010) 책에서 소개된 영화 《토탈리콜》(1990)만 봐도 시종일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지 않았나. 그런데 바꿔 보면 이게 참 매력적이다. 이렇게 황당하고 슬픈 질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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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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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였던가.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 버전을 봤는데 조금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으로는 다소 낡아보였고 서사구조도 핀트가 좀 안 맞는달까. 그래서 역시 책으로 읽어야겠다고 결심, 최근 출간된 개정판을 보았다. 읽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으니 일단 몰입도는 상당히 좋다. 나에게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기대한 만큼을 웃도는 것들도 많고 ㅡ 사실 (거의) 다가 그렇다. 소비자는 돈을 가지고 있고 자본가는 상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돈을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우리에게 허용된 순간적인 자유나 우월함을 오래 참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돈을 다시 회수하지 못할 경우, 잉여가치를 얻을 수 없고 나아가 그 돈으로 생산에 재투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해 주는 돈을 강제로 뺏을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강신주, 『철학 VS 철학』, 그린비, 2010). 그럼 여기서 다시 코제브의 말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스스로 욕망하고 있고, '대가리가 커질수록' 자신이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란 것을 망각한다. 아무리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고 동물로 전락할 수도 있다지만 ㅡ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한다지만 ㅡ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반드시 결핍이 존재할 때만 집착이란 것이 생겨날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 같다. 명백히 본말전도다. 이래서는 말이 되질 않는다.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전체의 시스템이 문제라지만 개인의 오류도 분명히 있다. 개인은 영민하다지만 집단은 우매한가? 이 말은 반드시, 모든 경우에 성립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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