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유키 쇼지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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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력 만점이다. 1960년대 베트남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스파이물인데 지금 읽어도 낡은 느낌이 전혀 없는 왕도라고 할까. 속도감도 대단해서 다 읽는 데에 한 시간이 좀 안 걸린 것 같다. 그만큼 텍스트를 읽는 것에는 불편함이 없다. 인물들의 개성도 잘 드러나 있고. 1차적인 발단은 동료의 실종이지만 그 후 주인공과 착각을 일으켜 대신 죽어간 남자의 한 마디가 소설을 이끈다.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이제야 탁월한 타이틀이 빛을 발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이너스 인간들의 배신과 배신, 또 배신. 외려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리엔의 육체가 베트남이란 덩어리와 겹쳐질 정도로 모리가키를 위시해 죽은 가토리, 토, 훈, 득 등은 시스템(체제)에 휘둘린 인간들로 그려진다. 나(사카모토)는 「일생을 한 줄의 선에 비유한다면 죽음은 검은 색의 작은 종지부에 지나지 않으리라. 갑자기 찾아와, 선의 앞길을 막는다」며 극심한 정신적 금속피로를 겪지만, 얻는 것은 고작 '인간 불신'이란 것을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설은 국제 정세나 활극에 의지하기보다는 스파이라는 인간상에 집중된다. ……좀 극적인 표현을 하자면,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이며 전쟁의 피 냄새를 먹고 자라나는 기구이다. 홉스의 만인의 투쟁으로 인해 국가가 만들어졌다기보다 강력한 힘의 논리에 의해 커다란 공동체가 작은 공동체를 짓누르는 형식으로 국가의 탄생과 출현을 보는 게 적당할는지 모른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 했고 알튀세르는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고메스의 이름을 묻는 자들은 과연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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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홍신 세계문학 9
앙드레 말로 지음, 박종학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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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인간이란 고통으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고 하면 너무 무책임한 말이려나. 소설은 역사의 바퀴 속에서 버둥거리는 군상의 모습들을 보여주지만 초점은 나약한 개개인에 맞춰져 있다. '인간의 조건'에 어떤 존엄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끌어 안은 폭탄과도 같이 위험천만하게만 보인다. 역사책이 아닌 하나의 소설로 읽어야 하기에 인물들의 앙다문 입 속에 들어있는 테러, 인간, 고독, 탈출, 존엄, 노동자, 코뮤니즘 그리고 그(것)들의 조건은 비극의 끝자락에서 유령처럼 희끄무레하게 번지고 있다. 과거 장제스의 공산당 탄압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조건』에서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고, 오히려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극복'을 막연하나마 잡으려 하기에 더욱 더 쓸쓸하다. 탈출하려는 쪽과 그것을 저지하고 단절시키려는 쪽 그리고 평행선과 교차되는 선 사이에서 그 난감하고 경직된 균열이 표시되기 때문에. 그런데 말하자면 그 선과 선의 틈새에 인간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이 자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생명을 초월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란 물음은 그래서 더욱 더 궁지에 몰린다. 크게 첸, 기요, 카토프 등 '이방인'들의 정체성 내지 동일성조차도 허용되지 않으니까. 각각의 변곡점을 통해 인간의 조건에 다가가려해도 힘들 뿐이다. 긴장과 공포, 고통과 희망이 사라질 땐 결국(비로소 그때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란 무의미한 것으로 종결되는 게 아닐까. 자그마한 총알 하나로 세상을 전복시킬 수 있을 리는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현존하는 것 ㅡ 인간 혹은 국가 ㅡ 과 그것의 변이를 수긍할 수 없게 될 때 인간은 죽음과 부정의 덫 안에 갇히게 된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만 한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변용되는 순간, 하나의 인간은 세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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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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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불량에라도 걸릴 것처럼 무엇인가에, 어딘가에 이르려 하는 사람. 덴도 아라타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실제로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의 만남으로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쪽이 중요한 게 아닐까.」 이건 죽음이라는 변수에 대한 솔루션도 아니고 사자(死者)에게 명복을 빌어줌으로써 스스로가 위안받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애도하는 사람'인 시즈토에게서 자기위안적 의미부여에 대한 측면이 언뜻 비치기는 하지만 그게 궁극적으로 『애도하는 사람』이 시사하는 바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오히려 일상(삶)의 패러디가 아닐는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왜냐하면 시즈토의 애도하는 행위 자체를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거니와 특수한 상황에서의 마음의 동작이라는 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쁘다는 자문자답조차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ㅡ 일견 시즈토의 애도에는 이유 모를 선의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약점을 보이며 어른 아이의 느낌을 자아내지만. 내 짐작으로 시즈토는 우선 자신을 위해 애도하고 죽은 이를 위해 애도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에게는 철저한 무관심.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 부조리한 폭력이나 사고 등으로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라는 논리가 아니라 사자에 대한 평등한 애도(시선)를 통해 그들을 기억하려 할 뿐이다. 줄곧 죽은 사람과 관계되거나 면식이 있는 사람(3인칭)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고인(2인칭)에게 말을 걸어 애도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인간 실존과 그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면 그건 오로지 '나의 존재(살아있는 나)'만이 있다는 편협한 굴레를 벗어나야 가능할 것이다(3인칭에서 2인칭으로 · 2인칭에서 3인칭으로). 이것은 중반에서 마키노가 던지는 「무슨 기준으로 어떤 고인은 동정하고 어떤 고인은 내팽개치는가」 하는 물음에서 드러난다.


덧) 소설 속에서 시즈토(靜人)와 유키요(倖世)는 어느새 행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이름에는 모두 사람(人)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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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로 철학하기 - 니체부터 들뢰즈까지 나꼼수를 위한 철학적 알리바이
김성환 지음 / 바다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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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 나꼼수……. 나는 '나꼼수(나는 꼼수다)'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2012년에 들어서야 1회를 찾아 약 5분 가량 맛만 봤다. 그리고 스피커를 꺼버렸다. 딱히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고. 욕도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거다(나꼼수 = 욕이라는 논리는 아니다) ㅡ 나중에 보면 꼭 투표 안 한 양반들이 제일 말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팩트를 알고 의심을 가져야만 욕이라는 애정도 생긴다. 그럼 내가 나꼼수를 듣지 않은 이유는? 예전에 한겨레신문의 '직설'이라는 꼭지가 있었는데 이건 그때와 마찬가지 경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나꼼수에 대한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나왔다 ㅡ 솔직히 나꼼수를 듣지 않았던 건 나 혼자 쓸데없이 바빠 못 들은 거다! 나꼼수에서 한 것들 중 하나는 수용자에게 모리배들의 머릿속을 까발리는 거였다. 이 『나꼼수로 철학하기』는 대놓고 나꼼수를 편든다(나도 마찬가지). 심지어 '철학'이란 단어까지 붙여가면서. 그런데 이거 나꼼수보다 더 재밌다. 왜냐. 원래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후에 그것을 해석하는 데서 쾌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니까……. 나꼼수가 정치적 선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정치적 선동'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 선동이란 호도(糊塗)나 오도(誤導)가 아니다. 정치참여와 사유와 의심을 유도하는 것이지. 1%와 99%가 패싸움을 벌인다면 언뜻 1%가 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 1%의 주먹이 만화 「주먹대장」의 그것이라면 게임이 안 되는 거다. 해서 의심해봐야 안다(왠지 '주어 나경원'처럼 들리는군). 그래야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쨌든 『나꼼수로 철학하기』의 테크닉은 흥미롭고 웃기다(이건 칭찬이다). 뭐든 갖다 붙이려면 안 될 게 없지만 이건 참 적재적소에 철학적 포인트를 들이댄다. 영화 《수취인불명》에서 어릴 적 사고를 당해 한 쪽 눈에 백태가 낀 여고생 은옥을 기억하는지. 은옥은 미군 병사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결국 눈 수술을 받는다(나중에 스스로 그 눈을 다시 찌르긴 하지만). 이 육체적 불구, ㅡ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는 은옥의, 그런 은옥을 두고 미군과 경쟁하는 동네 청년 지흠의 ㅡ 그리고 정신적 불구들이 바로 우리다. 미군 병사 제임스가 잡지에 실린 여자의 눈을 오려 우리의 눈에 붙여준 거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걸 떼내고 죽은 눈을 찔러야 하지 않을까. 죽은 건 도려내고 재생산 공정에 돌입. 뭐, 이런 논리다. 갑작스런 영화의 비유가 적절치 않건 어떻건 간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생각을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정치도 하고 욕도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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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의 대중 문학 강의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3
나오키 산주고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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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 상이란 건 많이 알고 있을 거다. 그의 친구 기쿠치 간(菊池寬) ㅡ 『무명작가의 일기』와 『아버지 돌아오다』를 쓴 그 양반 말이다, 이걸 모른다고 하면 『진주부인』 정도는 알 수도 있으려나 ㅡ 이 아쿠타가와 상과 함께 그들을 기리고 후진 육성에 힘쓰고자 제정한 문학상이다. 그런데 성이 나오키고 이름은 뭘까, 하고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 풀네임을 적는다. 그의 이름은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다. ……사실 이건 필명이고, 본명은 우에무라 소이치(植村宗一) ㅡ 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우에무라 슈이치'라고 읽는 걸 대놓고 지적했는데도 못 들은 척 넘어갔던 게 생각나는군, 근데 사실은 그렇게 읽는 게 맞는 거면 어떡하지 ㅡ 다. 여기서 우에(植)란 한자를 둘로 나눠 나오키(直木)를 만들었다. 처음 이 필명을 사용한 때가 서른한 살이어서 그때는 산주이치(三十一)였는데 계속해서 나이를 먹으니(당연하다!) 필명도 계속 바뀔 수밖에. 결국 기쿠치 간으로부터 타박(?)을 받아 나오키 산주고란 필명으로 계속 사용하게 된다. 뭐,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나오키의 대중 문학 강의』(에스노벨 시리즈 중 제3권)를 펴보면 지나치게 세심할 정도로 문학을 구분해놓았다. 하지만 내가 이걸 읽고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대중)문학이란 (넓은 의미로)재미있어야 한다'라는 거다. 실제로 나오키는 이렇게 적는다. 「대중 문예란 표현을 평이하게 하고 흥미를 중심으로 하되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 또는 거기에 인생에 대한 해설과 인간 생활상의 문제를 포함하는 것.」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기술(記述)적 센스가 있을 것. 왜냐하면 문학이란 결국 텍스트의 문제이며 독자가 활자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학은 언어의 표현에 구애될 수밖에 없다. 이따금 스스로가 상당한 기교를 지녔다는 것을 피력하려는 나머지, 당최 무슨 의미인지 파악조차 하기 힘든 문장을 갈긴 작가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엔 애매모호하게 써놓고 심오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심산이다. 물론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장은 때에 따라 굉장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며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소설이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반대로 난삽한 문장도 싫은 건 당연하다). 그럼 당연히 문학이란 '이야기'다. 나는 주제를 불문하고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으면 그걸로 그 작품을 최고라 삼는다. 예술이냐 비예술이냐는 과감히 차치한다. 예술과 비예술이란 말의 의미도 모르겠거니와 설령 그렇게 나눈다고 해도 나 같은 독자에겐 쓸모 없는 논리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간과하고 있는 건, 적어도 이런 말들은 내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라는 거다……. 상당히 어중간한 말이다. 그러나 재미있으면 읽는다, 라는 인과관계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이것은 ㅡ 작가와 문학 · 문학과 독자를 떠나 이 책과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판사 북스피어의 에스노벨 시리즈 중 가장 첫 권 발행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멋지다. 수요가 적을 수도 있다. 다음 시리즈가 출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재미'라는 감정적 요소가 독자와 매치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말에 100% 동의한다.

 

 

 덧) 이 책에는 「대중 문학 강의」와 함께 그의 작품 「간에이 무도감(寬永武道鑑)」도 함께 실려 있다. 그 시작은 다음과 같은데, 첫머리부터 읽고픈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나?

 

桜井半兵衛は、門弟に、稽古をつけながら(何故、助太刀を、このわしが、しなくてはならぬのか?)と、その理由を、考えていた。


사쿠라이 한베에는 제자의 연습을 보아주면서, '왜 이 내가 싸움을 도와야 하는 것인가?' 하고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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