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14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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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만큼 이름으로 장난치는 것을 좋아한다면 이슈마엘부터 퀴케그, 에이해브, 배의 이름인 피쿼드까지 싸잡아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려 그들의 이름보다 고래에 관한 소위 '고래학' 쪽을 눈여겨보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과연 『모비 딕』이 새뮤얼 엔더비호를 지휘하는 영국인 선장의 팔과 에이해브의 다리를 집어삼킨 고래에 맞붙어 그야말로 지옥 한복판에서 성스러움과 증오심에 충만한 채 운명을 마주하는 이야기이던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난하되 신비로우며 두서없으나 마법 같고 혼란스럽지만 복된 것과 다르지 않다. 고래 고기가 과도한 기름기 때문에 세련된 요리 취급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멜빌의 묘사로 인해 아름답고 웅장하게 그려진다. 에이해브가 필요로 한 그 단 한 마리의 향유고래, 본래부터 이마에 깃든 고귀하고 전능한 신 같은 위엄이 증폭되어 정면에서 골똘히 바라보면 막강한 신성과 무서운 힘을 느끼게 하는 그 고래, 수수께끼 같은 주름에 싸인 넓은 창공에 비유할 만한 이마를 뽐내는 모비 딕은 무척이나 파격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체의 살갗이며 뼛조각, 내장, 신경계와 그 기능을 기술한 매력적인 과학도서와는 다른 종류의 황홀감을 선사한다. 최소 6미터 이상이나 되는 두개골 속에 보석같이 박힌 한줌에 불과한 뇌, ㅡ 그러니까 튀어나온 이마에서 최소한 6미터는 깊숙이 감춰져 있다 ㅡ 반면 놀랄 만큼 굵은 척수의 크기는 그 뇌가 풍기는 왜소함을 상쇄시킴과 동시에 고래의 완전하고 고귀한 영혼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심해의 정원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온 신비한 메커니즘은 또 어떤가. 이슈마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흡하기 위해 수면에 떠오른 고래를 잡는 것은 고래잡이들의 기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고래의 생리작용 때문이라고 ㅡ 「향유고래는 생애의 7분의 1만 숨을 쉬니, 이를테면 일요일에만 숨을 쉬는 셈이다.」 바다에 거주하는 이 괴물의 숨통이 물을 뿜는 통로로만 뚫렸고, 그 긴 통로에 이리 대운하처럼 열리거나 닫히는 일종의 수문이 달려서 공기는 아래로 내려오고 물은 위로 배출되기 때문에 목소리가 없는 이 무지막지한 괴물의 분무질은, 낙타가 보조 밥통 네 개에 물을 채워 사막을 건너듯 한 시간 이상이나 버틸 수 있는 생명력을 몸에 비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리작용에 과학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가까이 갔다가 뺨과 팔의 살갗이 벗어진 사람이 있는 것처럼 고래가 뿜는 물기둥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은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미로처럼 얽힌 국숫발 같은 관이 고래의 갈비뼈 사이와 척추 양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고래가 수면에 나왔다가 잠수할 때면 산소가 공급된 혈액이 그 관에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 이 순간 나는 인생 최고의 슬픔 속에 내 인생 최고의 위대함이 들어 있음을 느낀다 (...)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 빌어먹을 고래여, 내 갈가리 찢길지언정 네 몸에 묶여서라도 너를 추격하리라! 그러니, 창을 받아라!」 일갈과도 같은 에이해브의 외침을 모비 딕은 과연 제대로 듣기나 했던 것일는지. 『모비 딕』은 분명 고래의 포획으로 시작된다기보다 고래를 잡기 위한 일련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적(私敵)을 대하는 선장의 클라우제비츠 식 사생결단 방법론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바다라는 밀실에 갇힌 선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불빛에 하나씩 비춰봐야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인가. 그것은 모비 딕과 조우할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두고두고 괴로움에 사로잡히게 만들 것임이 빤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비 딕을 추격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 더군다나 흰 고래의 아가리에 도사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주저 없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 않겠나.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ㅡ 흉측한 소문과 불길한 전조에 위축된 사람들이야말로 뱃머리 갑판에 앉은 채 오래 두드리지 않아 약간은 질긴 고래 고기 스테이크를 먹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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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케어
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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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전에 SNS를 통해 어느 의사의 인턴 시절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응급 환자에게 20분 가까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던 그에게 여성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저 사람은 어차피 죽을 것 아니냐, 그보다는 열이 펄펄 나는 우리 아들 쪽이 더 응급 아닌가.」 이런 사람은 무척이나 많기 때문에 새삼 놀랄 것도 없다는 의사의 고백에서 씁쓸한 자조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견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던 환자가 가망이 없다 하더라도 아이의 어머니와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상당히 무섭기도 하다. 가망이 없으면 버리고 나머지 가능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가. 이 『A케어』는 이미 국내에 출간되어 있는 『신의 손』을 통해 안락사를 이야기했던 작가의 데뷔작이다. 원제는 ‘폐용신(廢用身)’. 책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폐용신이란 뇌경색 등의 이유로 마비되어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팔다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폐용, 영구적으로 불구가 되었으니 쓸모없다는 뜻. ‘A케어’에서 A는 절단을 뜻하는 앰퓨테이션(amputation)의 머리글자를 떼어낸 것으로, 어차피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도 없는데다가 실생활에 불편함까지 주니 아예 절단을 하여 남은 삶을 다른 방향의 가능성에 투자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시술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윤리라는 것이 간섭한다. 이 경우에 빗대어 보면 허울이라고 볼 수도,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존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분명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되리라. 미성년자의 매춘을 단어만 바꾸어 원조 교제라고 하듯 A케어 역시 그 내용은 노인의 팔다리를 절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뇌종양 말기로 고통 받던 아버지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과 간병의 부양을 짊어진 가족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제 가족에게 죽여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가하면 기뻐해야 할 딸의 취직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기초수급대상으로 받던 의료 혜택이 끊어져 자살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었다. 의료 시스템의 허점은, 환자는 물론이거니와 환자의 돌봄과 보살핌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가족 당사자를 온전히 껴안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실제로 내 조부모는 현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그 전까지 집에서 모신 것은 반년 남짓밖에 안 되었으나, 상처하신 아버지와 단둘이서 치매를 앓고 있는 두 분을 돌보기에는 벅찼다. 나로서는 심지어 이따금씩 미워하는 마음마저 불쑥불쑥 생겨나곤 했던 것이다. 『A케어』에는 이런 치매 환자들도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 일부를 지닌 환자들과 동시에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에서의 노인 의료에 관한 문제가 주를 이룬다. 매일 화장실에 갈 때나 휠체어에 오를 때 마비된 다리가 가족과 간호사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 비록 움직일 수는 없으나 때때로 발생하는 통증, 그것에서 촉발된 A케어는 환자의 자괴감이나 고통을 덜어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단된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나 외부인의 시선에 곤란해 하는 가족을 바라볼 때에도 A케어의 효용은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에는 뚜렷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환자 본인의 의지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소설에서 A케어를 받는 것은 대개 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노인들이지만 『신의 손』에서의 안락사의 경우와 같이 외려 청장년에게 필요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테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난감하고 모순된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괴롭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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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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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재생 클릭)  Eternal Morning 「City That Never Sleeps」




군가는 루헤인의 『운명의 날』을 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돈 윈슬로를 떠올리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은 양쪽 모두 읽지 않아도 『리브 바이 나이트』 읽기는 가능하다. 루헤인 스스로 작가가 된 이유를 주인공 조가 무법자가 된 이유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데 나는 그 의중을 어림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밤의 규칙이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질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리브 바이 나이트』의 주인공은 커글린 가문의 막내아들이며, 전작 『운명의 날』에서는 장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한다. 거기다가 이것은 3부작으로 계획되어 있다. 그렇다면 후속작에서는 차남이 주인공으로 등장할까? 글쎄. 도스토예프스키의 삼형제도 그만하면 되질 않았나. 어차피 이 소설에는 돌격대 같은 남성/남성성의 묘사는 없다. 먹고살아 보려는, 자수성가를 원치 않는 비열한 자들이 난무할 뿐. 외려 그라시엘라라는 전업주부와는 다른 여성의 존재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거다. 에마 굴드? 그녀에겐 앨버트의 하얀 모자나 씌워 주길 바란다. 그녀는 찰스타운 출신 ㅡ 아예 그곳을 배경으로 삼은 척 호건의 『타운(Prince of Thieves)』이 있을 정도다 ㅡ 이라는 것만으로도 유령 같은 굴레에 속박되어 있는 셈이니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로 유명한 레너드 카수토의 말을 앞뒤 다 잘라내고 들어 보자. 그에 의하면 요부는 단순히 제어되지 않은 여성 성욕의 위험뿐만 아니라 훨씬 넓고 다양한 종류의 공포에서 창조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요부는 전통적 낭만 서사의 구조를 위협하거나 이야기 구조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에마보다 더 요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찰서장의 딸이자 제자리를 잃은 여성인 로레타 피기스에 다다라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나약한 마음…… 그러니까 게으름과 음주와 추악한 탐욕을 악용하지 않나요? 다행히도 이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답니다.」 과연. 그녀는 끝에 가서 조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성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인지 종국에 힘이 조금 빠진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인데, 그런 종류의 위선은 이미 시작부터 점칠 수 있었던 것이므로 (다소 꺼림칙하지만 지나치게 실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깨끗이 무시하기로 한다. 조는 밤(night)을 동경하고 있었기에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음지에서조차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자로 묘사된다. 그러고 그 빌어먹을 시계…… 아버지가 남긴 조금씩 늦게 가던 시계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탐닉하려는 자들에게는 쥐약임에 틀림없었다. KKK 단원 RD 프루잇의 칼에 맞았을 때 그대로 죽었다면 영원히 주류로 남아 로레타의 아버지로부터 참회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을 테니.



사족) 책 뒷날개에서는 루헤인의 국내 출간작들을 볼 수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운명의 날』은 없다.



(음악재생 클릭) Eternal Morning 「Father's 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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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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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보의 「슬견설(蝨犬說)」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그의 시 「이를 잡다(捫蝨)」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거기에서는 이를 잡아 화로에 넣지 않고 땅에 던지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 <너 역시 붙어살 데 없어 / 나를 집으로 삼은 것이네 / 내가 없으면 이것 없을 것이라> 사람이 집이라는 공간 없이 살아나갈 수 없듯 이 역시 사람의 몸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크기에 관계없이 생명이 있는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똑같이 불쌍히 여기고 덩치가 큰 짐승에서 작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하나같이 다 죽기를 싫어하니, 그러므로 개의 죽음이나 이의 죽음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그의 말이다. 저자가 이것을 어떻게 비유하는가 하면, 앞으로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던 길손을 소극적 생태주의자로 그리고 이규보 자신을 적극적 생태주의자로 옮겨 놓는다. 그러면서 길손을 두고 겉으로는 생태주의의 깃발을 내세우면서도 뒤에서는 이익을 챙기는 개발론자로 보기도 한다(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나오는 휘파람새의 떼죽음을 보라, 그 녀석들은 개발론자 운운할 것도 없이 단지 살충제와 농약 때문에 죽었다) ― 그런데 어디 동물에 대한 차별만 있겠나, 인간이 인간을 편애해 계영배에 담아 구멍으로 내다 버리는 수상쩍은 이때에 이규보를 당황케 한 길손의 논리 또한 쉬 인정받을는지도 모른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신의 책에서 청새치의 뛰어난 가시와 넙치의 기막힌 위장 등을 예로 들며 「이들 중의 어느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보다 더 ‘진보되었다’거나 더 ‘고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으나 몸통만 떼어놓고 보자면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꼬집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굴드와 이규보의 생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자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비교를 해 볼 수도 있겠다. 바로 『녹색 고전』 말미에 등장하는 ‘만물의 영장’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만물의 영장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막아 댐을 쌓고 언덕과 산을 파헤쳐 고속도로를 닦았다. 광물이나 귀금속을 찾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속을 샅샅이 뒤졌으며 강과 바다에 온갖 쓰레기를 갖다 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고형렬의 시 하나를 소개한다. <한강은 강이 아니다 / 그저 우리들의 오물을 실어 나르는 / 컨베이어벨트다> ― ‘만물의 영장’에서의 영장은 만물을 내다 버림으로써 스스로 영장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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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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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다. 혼돈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인 탓이다. 볼라뇨와 매한가지로 지금은 죽고 없는 일본의 어느 작가에 의하면 그는 예술을 공공의 미로 보았다. 문학이 우리 머리끄덩이를 잡고 선배연하는 걸 고깝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요란뻑적지근한 그 문학의 혼돈에 체계적인 혼돈스러움, 즉 일종의 그것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다종다기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문학을 향한 용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렬하게 읽히는 단편 「짐」에는 문학을 하려는 짐과 길가에서 불쇼를 하는 남자 그리고 횃불에 빠진 짐을 뜯어말리는 '나'가 등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짐이 아니라 횃불을 손에 든 채 불을 뿜는 사내 쪽이 오히려 볼라뇨 그 자신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짐은 기발한 무언가를 찾아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는 될 수 없었다. 혹은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홧홧한 기운으로 짐을 울려버린 사내,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악하게 웃던 남자야말로 짐이 바라고 있던 광고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짐을 그 자리에서 끌어낸 뒤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 짐이 불쇼를 보기 위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을지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다. 술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술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듯, 횃불을 휘두르는 구체적 형태로서의 문학은 제 스스로를 존명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자, 그런데 보라. 불쇼라는 것은, 그러니까 입속에 용액을 채워 불줄기를 뿜어내는 화려함은 차치하고라도, 횃불을 들어 자신의 맨 팔뚝을 훑고 지나가게 하는 행위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위로 솟구치려 하는 불의 성질로 보건대 가장 밑 부분인 심지의 온도는 그리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 살을 닦아세우는, 알쏭달쏭하고 야릇한 몸놀림은 실로 대증 치료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말로 불을 가지고 놀던 사내가 볼라뇨 자신인 것인가? 아니면 쉬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짐으로 대변되는 것이 볼라뇨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불에 미친 짐을 구하기 위해 그를 끌어낸 '나'가 볼라뇨였던 건가? 아니 애초에, 과연 이 중에 볼라뇨 자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누가 문학을 원하던 자였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학이었는지, '싸움은 그만'이라던 짐을 통해 말하려 한 볼라뇨의 본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추측 혹은 원망(願望)을 넘지 못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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