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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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재생 클릭)  Eternal Morning 「City That Never Sleeps」




군가는 루헤인의 『운명의 날』을 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돈 윈슬로를 떠올리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은 양쪽 모두 읽지 않아도 『리브 바이 나이트』 읽기는 가능하다. 루헤인 스스로 작가가 된 이유를 주인공 조가 무법자가 된 이유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데 나는 그 의중을 어림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밤의 규칙이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질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리브 바이 나이트』의 주인공은 커글린 가문의 막내아들이며, 전작 『운명의 날』에서는 장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한다. 거기다가 이것은 3부작으로 계획되어 있다. 그렇다면 후속작에서는 차남이 주인공으로 등장할까? 글쎄. 도스토예프스키의 삼형제도 그만하면 되질 않았나. 어차피 이 소설에는 돌격대 같은 남성/남성성의 묘사는 없다. 먹고살아 보려는, 자수성가를 원치 않는 비열한 자들이 난무할 뿐. 외려 그라시엘라라는 전업주부와는 다른 여성의 존재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거다. 에마 굴드? 그녀에겐 앨버트의 하얀 모자나 씌워 주길 바란다. 그녀는 찰스타운 출신 ㅡ 아예 그곳을 배경으로 삼은 척 호건의 『타운(Prince of Thieves)』이 있을 정도다 ㅡ 이라는 것만으로도 유령 같은 굴레에 속박되어 있는 셈이니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로 유명한 레너드 카수토의 말을 앞뒤 다 잘라내고 들어 보자. 그에 의하면 요부는 단순히 제어되지 않은 여성 성욕의 위험뿐만 아니라 훨씬 넓고 다양한 종류의 공포에서 창조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요부는 전통적 낭만 서사의 구조를 위협하거나 이야기 구조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에마보다 더 요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찰서장의 딸이자 제자리를 잃은 여성인 로레타 피기스에 다다라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나약한 마음…… 그러니까 게으름과 음주와 추악한 탐욕을 악용하지 않나요? 다행히도 이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답니다.」 과연. 그녀는 끝에 가서 조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성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인지 종국에 힘이 조금 빠진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인데, 그런 종류의 위선은 이미 시작부터 점칠 수 있었던 것이므로 (다소 꺼림칙하지만 지나치게 실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깨끗이 무시하기로 한다. 조는 밤(night)을 동경하고 있었기에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음지에서조차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자로 묘사된다. 그러고 그 빌어먹을 시계…… 아버지가 남긴 조금씩 늦게 가던 시계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탐닉하려는 자들에게는 쥐약임에 틀림없었다. KKK 단원 RD 프루잇의 칼에 맞았을 때 그대로 죽었다면 영원히 주류로 남아 로레타의 아버지로부터 참회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을 테니.



사족) 책 뒷날개에서는 루헤인의 국내 출간작들을 볼 수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운명의 날』은 없다.



(음악재생 클릭) Eternal Morning 「Father's 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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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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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보의 「슬견설(蝨犬說)」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그의 시 「이를 잡다(捫蝨)」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거기에서는 이를 잡아 화로에 넣지 않고 땅에 던지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 <너 역시 붙어살 데 없어 / 나를 집으로 삼은 것이네 / 내가 없으면 이것 없을 것이라> 사람이 집이라는 공간 없이 살아나갈 수 없듯 이 역시 사람의 몸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크기에 관계없이 생명이 있는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똑같이 불쌍히 여기고 덩치가 큰 짐승에서 작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하나같이 다 죽기를 싫어하니, 그러므로 개의 죽음이나 이의 죽음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그의 말이다. 저자가 이것을 어떻게 비유하는가 하면, 앞으로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던 길손을 소극적 생태주의자로 그리고 이규보 자신을 적극적 생태주의자로 옮겨 놓는다. 그러면서 길손을 두고 겉으로는 생태주의의 깃발을 내세우면서도 뒤에서는 이익을 챙기는 개발론자로 보기도 한다(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나오는 휘파람새의 떼죽음을 보라, 그 녀석들은 개발론자 운운할 것도 없이 단지 살충제와 농약 때문에 죽었다) ― 그런데 어디 동물에 대한 차별만 있겠나, 인간이 인간을 편애해 계영배에 담아 구멍으로 내다 버리는 수상쩍은 이때에 이규보를 당황케 한 길손의 논리 또한 쉬 인정받을는지도 모른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신의 책에서 청새치의 뛰어난 가시와 넙치의 기막힌 위장 등을 예로 들며 「이들 중의 어느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보다 더 ‘진보되었다’거나 더 ‘고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으나 몸통만 떼어놓고 보자면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꼬집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굴드와 이규보의 생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자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비교를 해 볼 수도 있겠다. 바로 『녹색 고전』 말미에 등장하는 ‘만물의 영장’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만물의 영장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막아 댐을 쌓고 언덕과 산을 파헤쳐 고속도로를 닦았다. 광물이나 귀금속을 찾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속을 샅샅이 뒤졌으며 강과 바다에 온갖 쓰레기를 갖다 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고형렬의 시 하나를 소개한다. <한강은 강이 아니다 / 그저 우리들의 오물을 실어 나르는 / 컨베이어벨트다> ― ‘만물의 영장’에서의 영장은 만물을 내다 버림으로써 스스로 영장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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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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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다. 혼돈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인 탓이다. 볼라뇨와 매한가지로 지금은 죽고 없는 일본의 어느 작가에 의하면 그는 예술을 공공의 미로 보았다. 문학이 우리 머리끄덩이를 잡고 선배연하는 걸 고깝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요란뻑적지근한 그 문학의 혼돈에 체계적인 혼돈스러움, 즉 일종의 그것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다종다기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문학을 향한 용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렬하게 읽히는 단편 「짐」에는 문학을 하려는 짐과 길가에서 불쇼를 하는 남자 그리고 횃불에 빠진 짐을 뜯어말리는 '나'가 등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짐이 아니라 횃불을 손에 든 채 불을 뿜는 사내 쪽이 오히려 볼라뇨 그 자신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짐은 기발한 무언가를 찾아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는 될 수 없었다. 혹은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홧홧한 기운으로 짐을 울려버린 사내,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악하게 웃던 남자야말로 짐이 바라고 있던 광고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짐을 그 자리에서 끌어낸 뒤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 짐이 불쇼를 보기 위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을지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다. 술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술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듯, 횃불을 휘두르는 구체적 형태로서의 문학은 제 스스로를 존명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자, 그런데 보라. 불쇼라는 것은, 그러니까 입속에 용액을 채워 불줄기를 뿜어내는 화려함은 차치하고라도, 횃불을 들어 자신의 맨 팔뚝을 훑고 지나가게 하는 행위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위로 솟구치려 하는 불의 성질로 보건대 가장 밑 부분인 심지의 온도는 그리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 살을 닦아세우는, 알쏭달쏭하고 야릇한 몸놀림은 실로 대증 치료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말로 불을 가지고 놀던 사내가 볼라뇨 자신인 것인가? 아니면 쉬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짐으로 대변되는 것이 볼라뇨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불에 미친 짐을 구하기 위해 그를 끌어낸 '나'가 볼라뇨였던 건가? 아니 애초에, 과연 이 중에 볼라뇨 자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누가 문학을 원하던 자였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학이었는지, '싸움은 그만'이라던 짐을 통해 말하려 한 볼라뇨의 본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추측 혹은 원망(願望)을 넘지 못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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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3 - 더 깊고 풍부해진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만화 상상력 사전 3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수박 그림 / 별천지(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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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은 ‘일리히의 법칙’을 나타낸 것인데, 그 속뜻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활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이 감소하며 나아가서는 역효과를 낸다.」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의 양을 늘리는 만큼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노동의 양을 늘려도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겠다. 이와 딱 맞는 사례는 우리 자신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한국의 노동시간이 세계 2위 수준이면서도 그 노동생산성에 있어서는 세계 최하위권인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올해 초 OECD가 회원국 및 기타 경쟁국의 노동생산성 동향을 비교 분석한 결과 한국의 2011년 기준 연간 근로시간은 2,090시간으로, OECD 전체 국가 중 2위로 조사된 것이다. 반면 그에 따르는 노동생산성은 OECD 회원국 34개 나라 가운데 23위,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8위였다……. 나는 이 『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전3권)』의 원작이 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11)을 통해 이미 그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이야기에 홀딱 반한 적이 있기에(움베르토 에코가 보여 주었던 또 다른 백과사전식 흥미로움은 잠시 뒤로하고) 김수박의 만화는 그것의 재탕쯤이라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첫 장을 펴 들면 일단 원작과 순서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름대로 구성을 달리한 것이다.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기존의 텍스트를 단순히 만화화한 것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스토리를 버무려 넣었다는 것이다 ― 나름대로의 유사성에서 출발한 이 비틀림은 종국에 가서는 멋진 재구성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김수박은 여기에 비단 베르베르 본인만이 아니라 역자 이세욱 선생까지 등장시킨다). 활자화되어 있는 종이와 이미지화되어 있는 종이 두 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궁극적인 기호는 다를지언정 사람의 눈이란 한눈에 들어오는 쪽을 먼저 선택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학교에 가면 만화책을 숨겨야만 하는 살풍경을 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면 책상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학생에게 훈계조로 말하는 선생조차도 읽어봄직하다. 내용 중 ‘1 + 1 = 3’이라는 주제를 한번 보자. 나는 이것을 베르베르와 김수박의 책과는 달리 영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인도 사람 사이먼 싱이라는 사람의 책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나온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먼저 이것은 다음과 같이 단순 명료한 등식에서 출발한다.


a = b

양변에 a를 곱하면

a2 = ab

다시 양변에 a2 - 2ab를 더하면

a2 + a2 - 2ab = ab + a2 - 2ab

이제 양변을 정리하여 간단히 하면

2 (a2 - ab) = a2 - ab

끝으로 양변을 a2 - ab로 나누면 다음과 같은 황당한 결과가 초래된다.

2 = 1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순한 등식에서 출발했으나 논리의 전개과정에서 간단하고도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에 봉착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단계, 즉 양변을 a2 - ab로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애초 a = b라는 명제에서 출발했으므로 양변을 a2 - ab로 나누었다는 것은 양변을 0으로 나눈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페르마가 장난을 친(!) 그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제정된 ‘볼프스켈 상’에 응모했던 수많은 증명들 중, 상당수의 아마추어들이 이와 비슷한 오류를 범하여 심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니 수학에는 문외한일지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그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다……. 어찌 됐든 베르베르가 각종 상상력을 동원해 인간 흥미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켰다면 이번에는 한국의 만화가가 그 상상을 그러모아 원작의 매력을 배가시켜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베르베르를 묘사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는 ‘베르베르는 7살에 단편 소설을 썼고 14살 때부터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노트를 기록해 왔으며……’와 같은 것일 텐데, 최근 국내에서 출간된 그의 『제3인류』만 보더라도 그의 상상력, 특히 과학적이고 문학적인 탐구에 기인한 흥미로운 발상은 바로 지금이 그 전성기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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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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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에 '고립', '민속 신앙'과 같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지라 도조 겐야 시리즈는 꼭꼭 찾아 읽고 있다. 번역된 시리즈 중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다음으로 흥미롭다고는 생각하나, 끝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것들이 꽤 많다. 끝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의 행방, 표지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놓은 것(첫 번째 의문과 이어져 있기라도 한 것일까), 소후에 시노가 느낀 '무엇'의 정체…… 만약 이것들이 단지 독자된 입장에서만 느낀 다소 비약된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부러 의도된 것이라면, ㅡ 전작에 이어 재등장한 소재 또한 있으니 ㅡ 그렇다면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속편은 반드시 나오고야 말리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없다). 어쨌든 이 소설은 '미즈치'를 키워드 삼았다. 일단 미즈치란, 뱀 비슷한 생물로 네 발이고 입에서 독기를 뿜어내 인간에게 해를 미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뱀이란 것은 불사의 생물로 여겨짐과 동시에 불경과 외경의 이미지 모두를 가지고 있는데, 앰뷸런스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줄로 안다(이쪽에는 서양의 종교, 신화 등이 얽혀 있긴 하지만).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에서는 미즈치를 물의 신으로 받들어 지내는 마을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일 때 바로 이 미즈치 님을 위한 제의를 지낸다. ㅡ 거기에 바칠 큼직한 호박은 머리, 대량의 미역은 머리털, 크고 윤기 흐르는 조롱박은 몸통, 가느다란 무 두 개는 양팔, 둥글고 모양이 고른 순무 두 개는 좌우 유방, 멧돼지 간은 내장, 전복은 여성의 성기, 실 뭉텅이는 음모, 굵은 무 두 개는 양다리를 상징하는 제물인 것으로…… ㅡ 물론 이것 역시 농경생활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일종의 신앙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주민들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해 자신들이 입을 피해를 심리적으로나마 그쪽에 기대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에 뒤따르는 것은 일반 주민들 위에 서는 자, 즉 제의를 집전할 소위 신관의 필요성과 그의 권위가 대두되기 마련이거니와, 이것은 차후 제의의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자그맣고 편벽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굴절된 사고방식을 낳을 수 있음에 다름 아니다. 소설에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이 행할 제의에의 성공과 결코 실추되어서는 안 될 권위를 지키려는 ㅡ 혹은 그 무소불위함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는 ㅡ 추악하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인물이 등장하고, 한창 제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신남(神男)이 죽는 것으로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나 죽음은 폭포가 쏟아지는 호수 위 배에서 일어난 것이며, 곁에 있는 자라고는 신남을 제외하곤 배를 젓는 사공밖에는 없는데다가 그마저도 집배 바깥쪽에 있어 제의 동안에는 안쪽에 자리한 신남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출판사의 보도 자료처럼 '호수 밀실 살인'인 것인데, 이래서야 일반의 것들과 다를 바가 없겠으나 그럼에도 민속적 · 지역적 특색이 더해지다 보니 꽤 기묘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이 도조 겐야 시리즈를 설명하라면 개인적으로는 다소 SF 냄새를 풍기려는(그런 의지가 보인다) 교고쿠 나쓰히코와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 그 사이쯤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째 기술하려는 것 하나하나가 헤살이 될 지경이어서 약간의 조바심과 근질거림에서 주춤하고 있는 중이다…… 아아,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덧) 이 시리즈 중 처음으로 일본 단행본판 표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그간의 표지들이 너무 기괴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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