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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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man's inhumanity to man)'이 무엇인지를 노예 플랫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유인이었으나 꾐에 넘어가 납치되어 노예가 된, 칼과 포크를 대신해 제 검은 손가락으로 음식을 취해야만 했던 플랫. 그는 워싱턴의 윌리엄 노예수용소, 리치먼드의 구딘 수용소, 뉴올리언스의 프리먼 수용소 ㅡ 제 소유의 동물들 앞에 나와 명령하는 운영자들 ㅡ 를 거쳐 드디어 자신을 구입한 이에게 '팔리게' 된다. 공식적인 첫 주인 윌리엄 포드를 비롯해 존 M. 티비츠, 그리고 난폭하고 무례한 힘, 교양 없는 머리, 탐욕스러운 정신의 결함으로 무장한 에드윈 엡스까지(채찍, 등을 홧홧하게 만드는 그 빌어먹을 채찍!). 그나마 상냥하고 다정했던 포드에게 칭찬을 받으려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가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해도 인간적인 대우에 어쩔 수 없이 발현된 합당한 반응이다. 그의 기쁨의 원천은 지시한 것보다 많은 성과를 내어 제 주인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내 무자비한 농장 경영주 엡스에게 팔려 가며 그의 10년에 가까운 고난은 비로소 시작되고 만다. 노예라는 것이 그를 도울 능력은 전혀 없었으나 외려 그를 고자질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는 자유에 대한 권리를 선언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행동이었을 것이라 단정한다 ㅡ 주인의 지시가 씌어있지 않으면 편지조차 보낼 수 없고 통행증 없이는 밖을 나다닐 수도 없으며 행여 순찰대의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에는 개에게 쫓기고 채찍에 맞기 십상이다. 솔로몬 노섭이라는 온전한 이름 대신 플랫이라 불린 이 남자 역시 몰래 종이 한 장을 훔치고 펜을 만들어 자신을 구해내 줄만한 편지를 쓰긴 하지만, 그것은 곧 부탁을 받은 자의 배신으로 인해 불속에서 활활 타오르며 생명을 잃고 말 뿐이다. 플랫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로 하여금 희망의 빛이 흔들거리다 못해 실망의 한숨 한 번으로도 쉬 꺼지게 만든다. 그는 한밤의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삶의 끝으로 가야 할 것이었다.(p.227) 노예들이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날은 눈앞에 당도할 수 있을까. 플랫이 두 번째로 점찍은 구원자로 인해 마침내 제 주인을 떠나면서, 물론 그는 기뻤겠으나, 엡스의 농장의 노예들 ㅡ 엉클 에이브럼과 보브, 윌리, 피비…… 이제 솔로몬 노섭의 삶에서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이 남겨진 자들이 두 발로 자유로이 직립할 날 말이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인 나리.」 자신의 소유주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 끝내 과감히 한 방 차주지 못하고 허리를 굽히는 작별의 제스처를 취했을 때 자유인 솔로몬 노섭의 표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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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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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는 아내 자오루핑이 리 씨 성을 가진 그 빌어먹을 작자와 몇 번이나 잠자리를 했는지, 집뿐만이 아니라 그의 거처에 가서도 일을 치렀는지, 그는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절정을 느끼게 해주었는지, 그 오르가즘은 어떠한 유형이었는지 따위를 걱정한다. 그는 공자가 채록했다고 알려진 『시경』을 연구해 그 성과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양커의 그러한 노력과 정신은 곧 강탈당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모래먼지 폭풍 사건에 휘말려 정신 이상자로 몰리고 만다. 하지만 정신병원 원장실에는 올라타면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는 특수 전기치료기, 환자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고안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양커는 한 번 더 무릎을 내어주며 ㅡ 아내의 간통을 목도했을 때 쏟아내었던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인기척을 먼저 하고 들어왔어야 했나 봐요.」 그리고 (아주 힘차게) 무릎을 꿇고서 호소했던 「지식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ㅡ 두려움을 내비친다. 이에 원장이 제안하는 것은 양커가 병원 환자들을 상대로 『시경』을 강의하는 것이다. 환자들이 강의를 듣기 싫어하면, 강의에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지 않기만 하면 그의 병은 완치될 것이고 곧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양커를 어른다. 그렇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은 미로 같은 후퉁(胡同)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 웬걸, 엉뚱하고 조리가 서지 않는 강의 내용에도 불구하고(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병원 안 환자들로부터 원치 않는 박수 세례를 받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는 병원을 탈출한 뒤 이번에는 진짜 정신 이상자로 변모한 것이나 다름없다(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그가 6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황폐하기 그지없을뿐더러 옛 애인 링쩐은 그저 과거에 머물러있는 여인에 불과하다. 그런 와중 링쩐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어린 소녀 씽얼에게 들려 보낸 목합 속 세 겹의 비단에 싸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비단을 걷어내자 노란 비단이 나오고, 그것을 치우자 드러난 또 하나의 초록 비단. 빨갛고 노란 중국 국기 속에 담긴 인간들의 정신적 방탕이기라도 한 것일까 ㅡ 중국에서 '초록색 모자'는 배우자의 외도를 의미한다고들 한다.



「지식인들도 이 나무랑 똑같은 것 같아요. 뿌리는 남몰래 돼지우리 밑에 숨기고 몸통과 가지, 잎은 돼지우리에서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피해 있거든요. 교수님 같은 지식인들은 가짜로 절개를 지키는 척하는 나무예요, 맞죠?」



소위 인텔리겐치아를 까발리고 짓밟으려는 시도는 씽얼의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교수님처럼 학식 있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며, 자신과 잠자리를 갖지 않을 거라면 링쩐에게 잘 얘기해달라는 부탁을 할 뿐이다(고작 다음 날의 낮잠을 구걸하는 것이다). 80년대 끝자락 부패 척결과 자유 쟁취를 주장하며 민주학생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처럼 모래먼지 폭풍이라는 상징적 악에 대항했던 모교의 학생들은 어떨까.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들 역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논문이 통과되지 못해 사과 봉지를 들고서 지도교수의 집 앞을 두리번거리는 존재가 되었다 ㅡ 죄다 '나쁜 놈들'만 살아남았다(혹은 양산되었다). 양커도 다를 바 없다. 사창가가 즐비한 거리에 파묻히고 온 뒤에도 그것을 들킬까 저어해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짐짓 위선을 떨며 재차 절개를 지키는 척하는 나무 흉내를 낸다. 처음에는 '머리 쓰다듬기'의 효력을 의심하다가도 이내 자신은 교양 있는 지식인이라는 굴레에 (또다시!) 편입되는 것을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물론 그 진중한 의식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만 지칠 대로 지친 지식인 양커의 정신 이상자로서의 사유는 링쩐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널 춥게 만들어주지. 아주 춥게 만들어주겠다. 더 추워졌다가는 하느님마저도 이 도마 위에 얹어놓고 잘게 썰어버리고야 말겠어.」 출상 음식을 준비하며 고기와 뼈를 자르던 조리사의 중얼거림만이 양커에게 내려진 유일한 저주일 터이지만, 우리의 고매하신 지식인 선생이 제 손으로 돼지우리를 파헤쳐 스스로의 뿌리를 걷어내기라도 할 것인가 ㅡ 「씨발, 누구든지 지식인을 쉽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말미의 오줌 갈기기 시합(「이곳에 오기 전 우리는 오줌도 함부로 갈기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이라는 배설 또한 무장된 식자층의 단단한 기제에 조소를 끼얹는 행위이건만, 양커라는 작자의 계획은 그가 발견한 『시경』 고성이라는 공간에 모인 여러 남녀로 하여금 불평 없이 원하는 상대를 골라 밤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게임에 불과하다. 이 오줌 갈기기 시합은 끝까지, 정말이지 끝내 한 번 더 양커로 대변되는 이들을 미화할 수 있는 여지로 둠으로써 손창섭의 「잉여인간」처럼 결말까지 박무를 깔아놓은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그러나 언제 걷힌 적이라도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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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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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질 내용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든 바 있다. 「겨울철 빙판이 되어버린 2차선 도로에서 한바탕 신 나게 구른 뒤, 기어 봉에 눈두덩을 찧어 의안을 착용하게 된 달갑지 않은 사건만 하더라도 어떤가. 보라, 결국 그렇게 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습지만, 당연하게도 『겨울 일기』에 이러한 잔인함은 없다. 사실 잔인한 묘사가 없을 뿐이겠지만. 이것을 쓰는 것이 여타 소설에 손을 대는 것보다 몇 갑절은 더 힘들었을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ㅡ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우연이란 것을 버리고서(완전히 소거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고통이라 부르든 쾌감이라 부르든 문제될 것이야 없겠으나, 오랜 시간 퇴적된 땅끝을 향해 달리다가 문득 기암괴석이라도 하나 툭 튀어나올라치면 조금의 여유도 없이 소스라치게 되질 않던가. 이 감각, 정서적 반응, 신체 일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것, 규정할 수 없는 잊힌 관계 들이 스스로를 사로잡게 되는 순간 그것이 제 주인으로 하여금 치명상을 입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수백 개의 편린이 모인 능숙한 작가의 이 차분한 일기는 차라리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는지 모른다(나는 이것을 자서전으로 위장한 소설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당신'으로 내세우고 몰아붙여 거리 한복판으로 던져서는, 스스로가 난자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구태여 1인칭 기술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설득과 변명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리라. 지치지 않는 성적 흥분으로 매달 북미의 자위 기록을 갱신했던 어린 날의 폴 오스터는 ㅡ 로베르토 볼라뇨 왈, 「들어 보라. 음경이 발기했을 때 길이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쓰는 한, 나는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는다.」 ㅡ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크기는 차치하고라도 상상과 사유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ㅡ 마루 위에서 점프하는, 따뜻한 욕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호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공책에 글을 쓰면서 책상과 탁자에 발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은, 타자기 위로 웅크린, 이제 자신에게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하고 자문해보는, 작가 폴 오스터의 한평생. 그가 말한 몸의 음악이 이제 겨울 악장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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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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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도 <롤링스톤>이 한 부 있다. 일본에 있을 때 구입했던 건데(당연히 일본어판이다) 2009년 5월에 나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the alternative guide'라고 해서 특집으로 출간된 녀석인가 보다. 왜 이런 걸 샀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당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롤링스톤>이니까, 하면서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들춰보니 90년대의 미국문화 어쩌고 하면서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 벡, 펄 잼 등만을 큼직큼직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니 하루키의 『더 스크랩』을 관통하는 80년대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80년대 태생이라고는 하지만 사물과 인간을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9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을 테니. 그런데 이중에도 무릎을 탁, 하고 쳤던 것은 바로 도쿄의 커피에 대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를 이야기해야겠지만 나는 좀처럼 커피숍에 가질 않는다. 나란 종자는, 무릇 커피란 것은 동전 몇 개를 짤랑거리면서 자동판매기에 넣은 다음 버튼을 눌러 '주는 대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메아리(亀有)에 살고 있을 때였다(여기서 반년을 살다가 신주쿠로 이사했다). 일단 출근하기 위해 역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올라서면, 차량이 들어오는 선로 바로 옆에 자그마한 매점과 자동판매기가 있다. 심지어 재떨이까지 있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흡연자들에게는 친절한 역임에 틀림없다 ㅡ 물론 금연 정책에 의해 훗날 없어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이사를 간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같이 가메아리 역 플랫폼에 도착하면 일단 150엔을 챙겨 자동판매기 앞에 선다. 그러고는 동전을 하나씩 흘려 넣으면서 그것들이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감상하곤 했는데, 저 앞에서는 이미 몇몇 남녀들이 제각기 담배를 하나씩 꼬나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 그리고 드디어 여기서 신통방통한 일이 벌어진다. 커피의 양과 설탕, 프림, 얼음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등등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총 다섯 단계 정도로 조절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흡연자뿐만이 아니라 커피 애호가들에게도 환영받을 일이 아닌가. 맛도 아주 좋아서 굳이 커피숍에 들르지 않더라도 빠듯한 출근길의 달큼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루키가 추천하는 아오야마의'다이보'나 그가 <뉴욕타임스>에서 인용한 요요기의 '톰스', 신주쿠의 '고히야' 같은 곳이라면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양반은 도쿄의 커피가 유럽이나 미국의 각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준이 높다고까지 장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80년대의 일이다. 당시의 커피숍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제목처럼 '스크랩'된 기억들일 뿐인 거다. 무엇이든 간에 오래토록 지속되는 것도 있겠고 그렇지 않고 쉬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 ㅡ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일 테지만. 그의 말대로 '오오, 이런 일이' 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늙수그레한 아저씨마냥 '그땐 그랬지' 하고 인정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80년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스크랩은 아주 맛좋은 장편(掌篇)처럼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쓰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하루키의 커피가 아닌 내가 맛보았던 커피에 대해서만 추억을 늘어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가메아리 역 커피 자판기에 누가 관심을 가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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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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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언어는 말[言]이 아닌 눈빛과 몸짓이다. 그리스어로 용감함을 뜻하는 안드레아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이름만큼 용감하긴 한가? <플레이보이> 잡지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모든 형제를 비롯한 가족을 증오하며 남의 음식을 빼앗는가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함을 지르는 그의 아버지이자 개자식인 프란츠 사버 알트만의 앞에서도 용감할 수 있었던가? 제 아버지로부터 인생을 도둑맞고 알트만 하우스에서 알트만 사료를 먹고 자란 안드레아스. 적절치 못한 비유이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의 둘째 폴은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엔 순응하고 말았고 그에 비해 장남은 교묘히 머리를 굴려 부모의 그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집에서는 언제나 포핸드와 백핸드로 얼굴을 후려 맞고 학교에 가면 회초리 든 선생에게 엉덩이를 내줘야만 했던 안드레아스의 결말은 어떠할까. 형 만프레드와 장난을 치다 실수로 침대에 불이 붙었을 때만 해도 그는 ‘우리, 이 집과 집주인을 태워버리자!’고 굳은 의지를 다졌을는지 모를 일이다.



내 패배의 마지막을 언제나 프란츠 사버 알트만이 장식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 본문 p.238



태어나자마자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 안드레아스는 그의 아버지만큼은 악랄하지 못한데, 그 스스로가 나서 자신을 가리키는 대략적인 단어들을 나열했을 정도다. 복수, 낙제, 정신병 걸린 여자의 아들, 노동 봉사, 키다리, 곱사등이 새가슴, 가망 없음, 패배자…….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아버지의 집에서 죽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가든지.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이 적인 아버지의 나약함을 간혹 목격하며 아버지 스스로 자신이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이 아들은 제 아버지가 어떻게 고독한 삶을 견뎌냈을지 궁금해 한다. 안드레아스가 동일시하고픈 사람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 중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넓은 세상을 보여줄 부모가 없었으며 아이다운 인생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안드레아스는 아마도 패배자의 본보기가 되어 삶을 마감할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타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 개새끼, 내 아버지는 무려 10년을 벌 받지 않고 버텼으나 이 돼지 새끼도 한 번쯤은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아야 했다. 자기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멸시했는지!
― 본문 p.269



안드레아스가 최후의 저항을 가했을 때 그는 권력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라는 가혹한 폭군의 몰락을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 처량히 앉아있는 아버지를 보고도 그는 여전히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 길고 길었던 알트만 하우스에서의 생활과 도둑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단어들, 양육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모두 뒤로 한 채 안드레아스는 집을 떠나고 만다. 걷지 못하고 뛰면서. 그러고는 타인의 인생을 못 쓰게 만드는 데 재능이 출중한 프란츠 사버 알트만에게서 벗어나 세계 각지를 돌며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한다. 그는 돈리비의 진저맨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고 교활하지도 않다. 아마 그랬다면 악명 높은 알트만 하우스에서부터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을 터였다. 섹스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들을 조숙한 또래로부터 배운 안드레아스. 아버지란 존재를 통해 분노를 깨우친 아들. 남을 가르치려고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도둑질과 저항을 알게 된 우리의 주인공. 그는 끝내 스스로를 아버지와 같이 개자식이라 정의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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