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질 내용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든 바 있다. 「겨울철 빙판이 되어버린 2차선 도로에서 한바탕 신 나게 구른 뒤, 기어 봉에 눈두덩을 찧어 의안을 착용하게 된 달갑지 않은 사건만 하더라도 어떤가. 보라, 결국 그렇게 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습지만, 당연하게도 『겨울 일기』에 이러한 잔인함은 없다. 사실 잔인한 묘사가 없을 뿐이겠지만. 이것을 쓰는 것이 여타 소설에 손을 대는 것보다 몇 갑절은 더 힘들었을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ㅡ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우연이란 것을 버리고서(완전히 소거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고통이라 부르든 쾌감이라 부르든 문제될 것이야 없겠으나, 오랜 시간 퇴적된 땅끝을 향해 달리다가 문득 기암괴석이라도 하나 툭 튀어나올라치면 조금의 여유도 없이 소스라치게 되질 않던가. 이 감각, 정서적 반응, 신체 일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것, 규정할 수 없는 잊힌 관계 들이 스스로를 사로잡게 되는 순간 그것이 제 주인으로 하여금 치명상을 입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수백 개의 편린이 모인 능숙한 작가의 이 차분한 일기는 차라리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는지 모른다(나는 이것을 자서전으로 위장한 소설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당신'으로 내세우고 몰아붙여 거리 한복판으로 던져서는, 스스로가 난자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구태여 1인칭 기술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설득과 변명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리라. 지치지 않는 성적 흥분으로 매달 북미의 자위 기록을 갱신했던 어린 날의 폴 오스터는 ㅡ 로베르토 볼라뇨 왈, 「들어 보라. 음경이 발기했을 때 길이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쓰는 한, 나는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는다.」 ㅡ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크기는 차치하고라도 상상과 사유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ㅡ 마루 위에서 점프하는, 따뜻한 욕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호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공책에 글을 쓰면서 책상과 탁자에 발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은, 타자기 위로 웅크린, 이제 자신에게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하고 자문해보는, 작가 폴 오스터의 한평생. 그가 말한 몸의 음악이 이제 겨울 악장으로 들어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에도 <롤링스톤>이 한 부 있다. 일본에 있을 때 구입했던 건데(당연히 일본어판이다) 2009년 5월에 나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the alternative guide'라고 해서 특집으로 출간된 녀석인가 보다. 왜 이런 걸 샀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당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롤링스톤>이니까, 하면서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들춰보니 90년대의 미국문화 어쩌고 하면서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 벡, 펄 잼 등만을 큼직큼직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니 하루키의 『더 스크랩』을 관통하는 80년대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80년대 태생이라고는 하지만 사물과 인간을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9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을 테니. 그런데 이중에도 무릎을 탁, 하고 쳤던 것은 바로 도쿄의 커피에 대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를 이야기해야겠지만 나는 좀처럼 커피숍에 가질 않는다. 나란 종자는, 무릇 커피란 것은 동전 몇 개를 짤랑거리면서 자동판매기에 넣은 다음 버튼을 눌러 '주는 대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메아리(亀有)에 살고 있을 때였다(여기서 반년을 살다가 신주쿠로 이사했다). 일단 출근하기 위해 역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올라서면, 차량이 들어오는 선로 바로 옆에 자그마한 매점과 자동판매기가 있다. 심지어 재떨이까지 있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흡연자들에게는 친절한 역임에 틀림없다 ㅡ 물론 금연 정책에 의해 훗날 없어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이사를 간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같이 가메아리 역 플랫폼에 도착하면 일단 150엔을 챙겨 자동판매기 앞에 선다. 그러고는 동전을 하나씩 흘려 넣으면서 그것들이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감상하곤 했는데, 저 앞에서는 이미 몇몇 남녀들이 제각기 담배를 하나씩 꼬나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 그리고 드디어 여기서 신통방통한 일이 벌어진다. 커피의 양과 설탕, 프림, 얼음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등등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총 다섯 단계 정도로 조절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흡연자뿐만이 아니라 커피 애호가들에게도 환영받을 일이 아닌가. 맛도 아주 좋아서 굳이 커피숍에 들르지 않더라도 빠듯한 출근길의 달큼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루키가 추천하는 아오야마의'다이보'나 그가 <뉴욕타임스>에서 인용한 요요기의 '톰스', 신주쿠의 '고히야' 같은 곳이라면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양반은 도쿄의 커피가 유럽이나 미국의 각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준이 높다고까지 장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80년대의 일이다. 당시의 커피숍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제목처럼 '스크랩'된 기억들일 뿐인 거다. 무엇이든 간에 오래토록 지속되는 것도 있겠고 그렇지 않고 쉬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 ㅡ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일 테지만. 그의 말대로 '오오, 이런 일이' 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늙수그레한 아저씨마냥 '그땐 그랬지' 하고 인정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80년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스크랩은 아주 맛좋은 장편(掌篇)처럼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쓰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하루키의 커피가 아닌 내가 맛보았던 커피에 대해서만 추억을 늘어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가메아리 역 커피 자판기에 누가 관심을 가진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의 언어는 말[言]이 아닌 눈빛과 몸짓이다. 그리스어로 용감함을 뜻하는 안드레아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이름만큼 용감하긴 한가? <플레이보이> 잡지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모든 형제를 비롯한 가족을 증오하며 남의 음식을 빼앗는가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함을 지르는 그의 아버지이자 개자식인 프란츠 사버 알트만의 앞에서도 용감할 수 있었던가? 제 아버지로부터 인생을 도둑맞고 알트만 하우스에서 알트만 사료를 먹고 자란 안드레아스. 적절치 못한 비유이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의 둘째 폴은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엔 순응하고 말았고 그에 비해 장남은 교묘히 머리를 굴려 부모의 그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집에서는 언제나 포핸드와 백핸드로 얼굴을 후려 맞고 학교에 가면 회초리 든 선생에게 엉덩이를 내줘야만 했던 안드레아스의 결말은 어떠할까. 형 만프레드와 장난을 치다 실수로 침대에 불이 붙었을 때만 해도 그는 ‘우리, 이 집과 집주인을 태워버리자!’고 굳은 의지를 다졌을는지 모를 일이다.



내 패배의 마지막을 언제나 프란츠 사버 알트만이 장식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 본문 p.238



태어나자마자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 안드레아스는 그의 아버지만큼은 악랄하지 못한데, 그 스스로가 나서 자신을 가리키는 대략적인 단어들을 나열했을 정도다. 복수, 낙제, 정신병 걸린 여자의 아들, 노동 봉사, 키다리, 곱사등이 새가슴, 가망 없음, 패배자…….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아버지의 집에서 죽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가든지.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이 적인 아버지의 나약함을 간혹 목격하며 아버지 스스로 자신이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이 아들은 제 아버지가 어떻게 고독한 삶을 견뎌냈을지 궁금해 한다. 안드레아스가 동일시하고픈 사람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 중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넓은 세상을 보여줄 부모가 없었으며 아이다운 인생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안드레아스는 아마도 패배자의 본보기가 되어 삶을 마감할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타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 개새끼, 내 아버지는 무려 10년을 벌 받지 않고 버텼으나 이 돼지 새끼도 한 번쯤은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아야 했다. 자기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멸시했는지!
― 본문 p.269



안드레아스가 최후의 저항을 가했을 때 그는 권력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라는 가혹한 폭군의 몰락을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 처량히 앉아있는 아버지를 보고도 그는 여전히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 길고 길었던 알트만 하우스에서의 생활과 도둑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단어들, 양육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모두 뒤로 한 채 안드레아스는 집을 떠나고 만다. 걷지 못하고 뛰면서. 그러고는 타인의 인생을 못 쓰게 만드는 데 재능이 출중한 프란츠 사버 알트만에게서 벗어나 세계 각지를 돌며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한다. 그는 돈리비의 진저맨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고 교활하지도 않다. 아마 그랬다면 악명 높은 알트만 하우스에서부터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을 터였다. 섹스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들을 조숙한 또래로부터 배운 안드레아스. 아버지란 존재를 통해 분노를 깨우친 아들. 남을 가르치려고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도둑질과 저항을 알게 된 우리의 주인공. 그는 끝내 스스로를 아버지와 같이 개자식이라 정의하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제3제국』보다 세련되고 직접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보다는 복잡한 구조를 띤다. 소설은 카렌 두베의 『폭우』만큼은 아니어도 시종일관 비에 젖어있는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지배적이고, 은밀하고 간접적이게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하기보다는 은유를 통한 보여주기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더군다나 끈질기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살아있는/살아남은 모든 것에 저주를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ㅡ 팽 선생이든 누구든 ㅡ 볼라뇨는 그것조차 잘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도 방관하려는 자와 묵살하는 자,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나아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자, 그것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종국에는 외려 그 스스로가 죽어갈 뿐인 자. 어느 쪽도 재미없는 인간이며 유령 같은 인물들이다. 어쩔 수 없는 분노와 선험적 도발이 진득하니 밴 이 작품은 내전과 전체주의라는 배경을 지렛대 삼아 긴장된 고독감과 불안감을 그리고 있는데, 팽 선생은 시인 바예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제 몸에 들러붙은 젖은 외투로 인식한 채 보수적이고도 자기 합리화적인 진구렁에 흔쾌히 발을 들이밀고 만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중간자적 위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누군가를 호리는 엄펑소니와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팽 선생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자신의 머리 위를 덮으려 하는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심지어 그것을 쫓기까지 한다. 그러나 곧 닥친 체념과 혼돈, 암울한 날씨/무드, 비웃음, 공격, 손쉬운 타협의 문고리를 덜컥 잡아버린다. 최면요법가인 스스로가 도리어 이 세계가 내뿜는 불길하고도 음습한 최면에 힘을 잃는 것이다. 그의 자조처럼 ㅡ 뭔가 불분명한 것이,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무엇인지 확실하게 감 잡을 수 없는 것, 그 냄새가 잠자리까지도 쫓아올 것만 같은 불안함. 어딘지도 모르는 건물에 갇혔을 때조차 그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예호의 딸꾹질을 누군가가 꾸며 낸 거짓이라 추측하지만, 실은 그러한 단정조차 거짓의 산물이었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로 대변되는 것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 텐데, 그마저도 차크몰(하필!) 옆에 선 인물이 쌍안경으로(고작!)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끝으로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팽 선생』은 만질 수조차 없는 유령 같은 세계에서 지내는 유령 같은 사람들을 내세워, 방향성을 상실한 개체 하나와 그 개체들이 모인 다수의 또 다른 개체 덩어리 그리고 시작과 끝, 머리와 꼬리가 불분명한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이자 가난했지만 죽고 나니 유명해지겠다는 마지막 말은, 어쩌면 수많은 팽 선생들에 둘러싸인 볼라뇨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더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한 패밀리
토니노 베나키스타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찮은 인간이여, 너를 지켜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너의 착각이다…… 게다가 너를 해치려고 하는 우리 수는 차고 넘친다…… 누가 너와 네 단란한 가족을 염려해 준단 말인가? ㅡ 만초니의 독백이거나 훗날 다시 쓴 회고록의 일부이거나.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건만 그렇다고 마피아들의 손 위에서 열심히 일해야만 하는가? 내가 보기에 『위험한 패밀리』는 당연할 정도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누가 이것을 소설 속 텍스트로만 읽고 싶어 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 쪽을 택했다. 영상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마피아, 마피아…… 마피아(mafia)라는 단어의 유래는 애매모호하다. '대담한 사람'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찾는 이도 있고,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 즉 '프랑스에게 죽음을, 이탈리아는 외친다'라는 문장에서 찾는 이도 있다. 또 누군가는 프리메이슨 계열의 비밀 단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피아라고 하면 으레 시칠리아를 떠올릴 텐데, 마피아란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 나아가서는 그들(만)의 도덕까지 아우르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족(family)인 것이다. 본래의 제목 '말라비타(malavita, 소설 속에서 만초니가 키우는 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올 때 '위험한 패밀리'로 바뀐 것이, '패밀리'라는 단어를 두고 단순히 한 가정을 이르는 의미로 해석한 것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작품에서도 마피아를 가리킬 때 5대 패밀리 등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오메르타(omerta)를 깼다. 오메르타란 무엇인가. 마피아 계율 중 하나로, 마피아들이 조직원이 될 때 하는 선서이다. 이 침묵의 계율은 어떤 상황에서도 법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범죄 수사에 절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초로 하며 '어길 시 곧 죽음'이라는 절대 가치를 지닌다(p.109). 실제로 시칠리아에서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나 그로 인해 벌어진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나 관리에게 문제를 호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만일 자기의 아버지가 피살되었고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 하더라도 살인자를 당국에 고소하지 않았다. 직접 복수에 나서거나 그 마을의 권위 있는 자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여기서 권위 있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마피아'다……(안혁 『마피아의 계보』 살림, 2003). 소설은 이 오메르타를 깨고 검찰 측 증인인 전향자가 되어 FBI의 보호를 받아 이주한 조반니 만초니 가족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리오 푸조의 소설들처럼 느와르나 스릴러의 빛을 띠지는 않는다. 거들먹거리는 배관공이 아니꼬워 그의 팔뚝을 망치로 뭉개거나 미국인들을 뒤에서 욕하는 슈퍼마켓 직원에게 복수하려 건물을 날려버리는가 하면, 마을의 식수를 오염시킨 공장을 통째로 없애버리는 등 그들을 보호해야 할 당국으로 하여금 보호는커녕 외려 달래야 할 지경으로 몰아간다. 그러던 중 만초니 가족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곳에서,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실타래를 줍게 된 조직원들의 눈에 띄어 위험에 처하고 만다. 『위험한 패밀리』에서 마피아는 총을 든 채 협박과 위협을 일삼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단지 생활고에 찌들었을 뿐인 우스꽝스러운 가장으로 등장한다(영화 《간첩》의 남파 공작원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첫머리에도 썼듯 만초니의 낮은 독백, 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ㅡ 그의 아들 워런마저 학교에서 소(小) 마피아가 되어가는 현실 ㅡ 에 대한 물음이라면 나로서는 적절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존 도커가 그러모은 『폭력의 기원』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싸움을 좀 했습니다. 말보가 이것이 쉽더라고요. 싸움을 하다 보니 따르는 놈, 비슷한 놈 몇몇이 생기지요. 그래서 그놈들이랑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상의도 하고 싸움하기 전엔 작전회의도 좀 하고 그러지요. 그랬더니 그걸 보고 조직폭력배라고 그러데요. 깡패가 된 거지요……. 그런데 그거 아쇼? 인류가 시작되고 가장 오래된 학문이 군사학이고 싸움하면서 편을 나눈 집단이 가족보다도 먼저 생겼다는 거. 다른 말로 하면 조직깡패지요. 이조시대에도 있었고 로마시대에도 있었고요. 사람 사는 곳에 없어지지 않고 늘 있는 거…… 나 하나 제친다고 이것이 정리될 것 같아요?

ㅡ 『장진 시나리오집』 中 《공공의 적 1-1 강철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