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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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가 가졌던 알제리나 나치에 대한 생각은 저쪽으로 제쳐 두고 그저 재난 소설로서의 『페스트』를 읽고 싶었다. 직간접적 영어(囹圄) 생활 속에서 불특정의 사람들이 병들고, 죽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탄복하고, 타인의 불행하지 않음에 화를 낸다.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도 닮아 있는데, 실제로 리유의 한 발짝 떨어진 서술과 진노 선생 집에 얹혀사는 이름 없는 고양이의 깨달음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전염병 출현, 심각성 대두, 안정기, 소설은 대략적으로 이 구조에 따라 움직인다. 당국은 도시를 폐쇄하고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려 하나 이미 늦었고, 병명이 공포되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긴 했지만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며, 또 어김없이 종교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타인의 괴로움에 기꺼워하던 아무개는 전염병 확산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자 다시금 자기 혼자만이 고통에 빠져있다고 여겨 이젠 그 스스로가 전염병과 같은 불행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해하려 한다. 특히 랑베르의 인물상이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폐쇄된 도시를 빠져나가고자 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꾸어 리유(의사)를 돕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이런 고담준론 같은 명제가 현실에 적용되기란 요원할는지 모른다. 『독감』(사이언스북스, 2003)을 쓴 지나 콜라타는, 저 옛날 아테네를 덮친 전염병 기록을 쓴 투키디데스를 인용한다. 「전염병은 격심한 무절제와 방종을 낳았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던 일을 공공연하게 시도했다.」 그때와 지금의 의학 수준과 사고방식의 상이함은 차치하고라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구분하기 힘들다. 소설 속의 시민들도 탈출할 수 없는 도시 안에서 영화와 술에 빠져 피로와 죽음의 고통을 잊으려 한다. 질병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 건강 증명서를 써주지 않는 의사를 비난하는 자, 혼란스런 틈을 놓치지 않고 암거래에 손을 대는 자, 이런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자. 이제 불행은 비현실에서 이편의 현실 속으로 편입된 지 오래고, 작중 타루라는 인물의 '죽음 권하는 사회'에 관한 환멸에 가까운 폭로만이 허위허위 공기 중에 흩뿌려진다. 관찰, 그리고 관찰. 『페스트』는 끊임없는 관찰로 사람들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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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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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티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종결지을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지렁이이면서도 실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사람을 끝장내기엔 모리어티만한 정도의 설정은 불가피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만이 홈즈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졌고 동시에 영영 셜로키언들의 미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지도(모리어티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둥, 실은 범죄자가 아니라는 둥, 홈즈의 배다른 형제라는 둥 별의별 이야기도 난무한다).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은 애설니 존스 경감과 핑커턴 탐정 사무소(도일의 『공포의 계곡』에서도 등장한다)의 프레더릭 체이스 콤비를 내세워, 홈즈와 모리어티의 마지막 대결이 이루어졌던 라이헨바흐 사건 이후를 다룬다. 홈즈와 왓슨 없는 셜록 홈즈 시리즈이며 진행자는 왓슨이 아닌 탐정 사무소의 체이스. 이야기는 모리어티가 홈즈와 함께 폭포에서 떨어지기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 모리어티에 버금갈 만한 클래런스 데버루라는 악명 자자한 인물이 떠오르고, 존스와 체이스 콤비는 소설 끝까지 그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기어이 모리어티 시신의 재킷에 비밀스레 꿰매진 솔기를 뜯어 모종의 쪽지를 발견하는데, 내용은 당연히 대문자와 소문자로 이루어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 클래런스가 모리어티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한 존스 & 체이스 콤비는 급기야 모리어티 흉내를 내며 약속 장소로 나가지만 '런던탑에서 날아오른 까마귀가 몇 마리였는가?' 라는 수상쩍은 암구호 앞에서 낭패를 보고, 이어 경시청 폭발 사건, 존스 경감의 딸 납치, 치외 법권에 가로막힌 끕끕수, 과거 홈즈 시리즈에서 다루어졌던 다종다양한 트릭의 차용 등이 어지러이 얽히고설킨다. 홈즈라 하면 나는 일단 가스등과 마차가 떠오르고 호로비츠의 소설에서도 그 같은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데(다소 폭력적이거나 얌체 같고 추잡한 짓거리를 일삼는 인물의 행동 탓에 뤼팽의 냄새도 살짝 풍기기는 하지만), 특히 개인적으로 가스등이 나간 상태에서 불을 뿜으며 난사되는 총격, 점멸하면서 앞뒤 분간이 어려운 시각적 분위기와 그 속에서 또다시 생겨나는 칼잡이의 의문스런 행동이 가장 마음에 든다. 결말은, 글쎄, 기막힌 반전이 준비되어 있긴 하나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나뉠 것만 같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으며, 선한 자는 더욱 선하고 악한 자는 더욱 악하게, 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잘 만들어진 패스티시는 원작을 조악하게 난도질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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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1호 - 창간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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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구 말마따나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곳에서,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곳에서 발달한다든가. 한국 미스터리를 불모지, 척박, 혹은 '없다'는 부정어와 함께 일컫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까? 현실이 팍팍하고 온갖 미스터리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마당에 굳이 책에서까지 비일상의 미스터리를 찾아야 하느냐, 하는 거다. 그런데 영화판을 보면 그건 또 아니다. 심심찮게 몇 백만, 몇 천만 관객이라는 표현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심심찮다'는 말은 이런저런 문학지가 등장했다 사라지는 저간의 광경에 더 어울릴 지경이 되었으니. 이런 만만찮고 녹록찮은 계란유골 같은 와중에 새로이 창간한 격월간 미스터리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일단 만듦새는 '멋지다'는 형용사 하나만으로 충분히 멋지다. 특히 겉표지는 직관적다 못해 야시시하기까지 한 디자인을 취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바타유는 에로티즘을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야스이 도시오의 대담집 『밀실 입문』 연재분은 『유리 망치』의 에노모토를 상기케 하고, 한국 소설 속 '범죄의 낌새'를 조망한다는 꼭지 <집안의 괴물들>은 조정래가 자신의 중편에서 묘사한 '상상할 수조차 없도록 비싸고,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사람이 사람 위에 포개지는 아파트'의 무시무시함을 떠올리게도 한다. 출판사 관계자들의 한국 미스터리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법의학자의 사건 기록 들추기와 경찰서 출입 기자의 취재 비화 또한 흥미롭다. 확실히 한국 미스터리는 최근 들어 판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때마침 하늘의 도우심이런가. '장르'와 '순'이라 구분 짓는 한국 문학판의 수상쩍은 심보에 맞서 바로 그 장르문학을 다루는 잡지가 탄생한다는 것은('장르'와 '비장르'가 실은 더 어울린다). 게다가 이미 주화입마에 빠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매체들이 몇몇 있었으니 독자 된 입장에선 기대와 불안감이 동시에 드는 것이 사실이어서, 『미스테리아』가 들어올 적엔 보무당당, 나갈 땐 죽상이라는 3D 아르바이트와 동의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장르문학의 옐로페이지가 되는 것도 원치는 않는데, 일상의 미스터리를 자유롭게 탐색하겠다는 편집자의 변이 반가운 것은 앞으로 잡지에 싣게 될 다종다양한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소망이 함량 미달의 턱없는 바람이었음이 밝혀질지, 신통방통하게도 대법원 확정 판결만큼이나 일호의 가차 없이 들어맞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볼 노릇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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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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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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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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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60년대라는 상투적 표현에 따라 나 또한 ‘격동의 80년대’를 살아왔다며 때때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향해 당시의 느낌과 분위기를 희화화해 전달하기도 한다(내가 ‘꼰대들’을 싫어하면서도 이제는 나 자신이 ‘꼰대’가 된 셈이다). 과거를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내세울 것이 과거뿐인 처량함에 휩싸인다는 말도 있으나, ‘어쨌든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쉬 잘라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와 다르고, 미래 또한 과거가 될 현재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저 아련한 노스탤지어,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다양한 매체를 통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라는 방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분명 브라우티건의 노스탤지어는 나는 어렴풋하게라도 겪어보기는커녕 그 시대가 어떤 시간 주기를 가지고 작동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완벽한(여기서 ‘완벽하다’는 형용사는 질 나쁜 부정어와 함께 쓰였다고 봐야 하겠지만) 낭만과 예스런 향수와 추억을 가지고 올는지 모른다(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 앞으론 2000년대가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될 거다. 더 이상 60년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을 것이므로). 물론 『워터멜론 슈가에서』와 『미국의 송어낚시』에서 줄기차게 송어(과거)를 끄집어냈던 것과 대동소이하지만 이쪽은 다소 힘을 뺀 수필처럼 상대적으로 덤덤한 기운이 있다. (맥락이 전혀 맞지 않으나, 책을 중반쯤 읽었을 때 영화 《쇼생크 탈출》이 떠올랐다. 앤디의 수수께끼 같은 지령에 따라 벅스톤의 흑요석을 찾으러 가는 레드의 모습.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느릿느릿한 버스를 타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고동색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며 끝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은 무척이나 ‘느렸다’) 특히 삼분의 일쯤 읽다 보면 「낡은 버스」라는 글이 나오는데, 거기서 ‘나’는 날씨가 좋아 버스를 타게 된다. 그런데 버스 안 승객은 20대인 나와는 달리 죄다 6, 70을 넘긴 노인들뿐이다. ‘나’도 그들도 불편하고 당혹스럽다. 결국 ‘나’는 목적지에 가려던 생각을 바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버리고, 그러자 모두가 그것을 반기며 기뻐한다(마치 저 옛날 백인투성이인 버스에 외따로 ‘침입한’ 흑인 같다). 낡고 오래되어 모든 것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시골길 사이로 갑작스레 뛰어든 포드의 대량생산 자동차가 따로 없었던 거다. 이런 ‘완벽한’ 진일보가 한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날개 달린 자동차가 건물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며, 택시 미터기와 선풍기는 모양만 변했을 뿐 예전의 기능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득 몇십 년을 뛰어넘어 먼 과거를 돌이켜보는 순간 그것들은 상당히, ‘완벽하게’ 달라 보인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가 보편성을 띠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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