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문
이윤기 지음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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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종교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마는, 온갖 문장이 종교(적인 것들)로 점철되어 있어도 좋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어쭙잖게 구절을 읊어가며 막무가내로 전도하려는 예수쟁이들이지 선량한 세속은 아니므로. 더군다나 이것은 허구이긴 하나 그의 이야기이고 그의 삶이긴 하나 거짓의 산물인 소설이며 또 소설 속의 소설도 있고 소설을 위한 소설도 있으니 매한가지다 ㅡ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도 볼라뇨의 음경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그러나 또 해버리고 만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인간은 '5마일 길'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뭐든 피부에 와 닿아야 (거의)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제야 뭔가를 바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겠나. 『삼국지』에서 조조가 읊은 시를 뜻만으로 따져 불길한 소리로 해석해 버리고 죽음을 당한 선비와 『하늘의 문』의 '나'라는 인물이 같게 발음되는 이름을 가졌다면 이것은 우연일까. 그러니 작가는 쓰느라 애달팠겠으나 그것은 읽는 쪽도 피차마차 포장마차인 셈이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아무리 써봐야 제대로 당도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밀림의 부상자를 태우러 와야 할 헬리콥터가 자기는 죽은 자들만 모집한다며 애꿎은 사람을 주워 훌떡 날아가 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은 위대하지 않소. 있긴 할까마는.」 이렇게 뜻풀이를 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한번 삐끗한 자는 영원히 삐끗하는데도? 회귀는 회귀일 때가 아름다운(적어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잡으려는 것과 쫓기는 것이 영원한 술래잡기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사악함, 불안함, 제도,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일인이역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고통을 호소할 데가 없는 까닭이다. 그가 술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면서. 작가의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삽입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이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처럼 멀끔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되 결국은 '(전과)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회귀하는), 헬리콥터의 날개와도 같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은, 좋게 말해서 미친놈이다. 한번 미친개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미친개이듯, 한번 미친놈은 영원히 미친놈이다. 살 이유가 없어서 죽는다면 다소간의 이해는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살 깎아먹는 것을 넘어서 남의 뼈까지 거덜을 낸다면 봐줄 수 없다. 주인공 '나'는 그런 작자다. 마스터베이션을 하면 장님이 되고 불순한 생각을 하면 영원히 고통 받으며 가족 중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지옥불에 타게 된다…… 그는 이런 것들이 싫었을까? 천국 아니면 지옥을 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싫었을까? 자꾸만 남을 부대끼게 하는 뭉텅이 같은 무리들이 싫었을까? 그렇다면 그럴 법도 하다. 그는 신을 모시려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모시려 하는 자였으니. 라즈니쉬 같은 사기(詐欺) 비즈니스맨은 아니었을지언정 「신발과 마음은 문 앞에 벗어놓으시오.」 하고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는 능수능란한 사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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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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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면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 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은,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 영역을 적극적으로 대면해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치사와 같은 정치제도 개혁이나 정서적 이슈에 골몰하면서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과제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왜? 시민 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게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 정부의 책임임에도, 우리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정치적 담론은 '(빌어먹을) 통합'만을 강조했다. 「신들이 없애려고 하는 자, 그자를 신들은 우선 미치게 만든다.」 보라. 저들은 우리를 없애버리기 위해 에피타이저 격으로 우리를 먼저 미치게 하고 있지 않은가. 1+1=2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온갖 희한한 일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어떤 면에서) 멋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거의 모든 사회가 자신들을 '민주적'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행복하고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디즈니랜드를 광고한다. 문제는 디즈니랜드를 만든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기꺼이 이용하는 자들이다.



과거 문재인은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보개혁 진영 역량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정권을 담당한 어떤 그룹만의 힘으로 개혁을 할 수는 없다. 정권과 시민사회 사이에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서로 당기고 밀어주고 요구하고 받아들이고.」 역시 같은 일간지에서 안철수는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백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추상적으로 말하면 정의다.」라고 했고, 두 번째 백신에 대한 물음에는 「계속 그, 그, 그거. 두 번째, 세 번째도 정의!」라고 했다(어쩌다보니 최근 뉴스만 틀었다하면 나오는 사람들만 언급했는데, 또 어쩌다보니 박근혜의 코멘트는 찾을 생각을 못했다). 여기서 더욱 의미심장한 진중권의 말을 가져와보겠다. 「국민의 주권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시민인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이 비상사태라고 판단하는 권리를 가진 자가 곧 '주권자'다 (...) 주권재민? 세상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니, 웃기는 얘기다.」 이 섬뜩하리만치 서늘한 역설은 어떤 장엄함까지도 느끼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간단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1인 1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 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 간의 상호 경쟁과 협력 등이다.(p.139) 이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논리인가. 하지만 이론이 좋다고 현실에서도 똑같이 아름다운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한국 노동 운동의 위상 또한 마찬가지다. 권위주의와 싸우는 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갈망하기 때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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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최종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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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영화에서 들었던 '러시아인들은 죄다 우울하다'는 말을 기억한다. 나는 여기에 찬성할 이유는 없지만 그다지 반대할 만한 이유도 찾질 못하겠다. 러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스토옙스키를 보자면 흔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세 아들 모두에게 매료되듯이 울리츠카야의 인물들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우울하게. 단 독창성은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보편성과 시대성이란 측면은 나름대로 인상적이다. 재기발랄한 라이프니츠의 '창(없는 모나드)'도 은근히 엿볼 수 있다. 왜 '은근히'란 표현을 썼느냐하면 인물간의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담대함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엮여나가는 인물들의 소통은 라이프니츠의 창에 난 틈을 통해 슬며시 들락날락한다 ㅡ 관계의 내재성(internality)과 함께. 어떻게 하면 사람과 사람이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하는 입장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지는데 여기서도 라이프니츠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도 그럴 것이 『소네치카』의 여러 인물을 보면, 타자와의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새롭게 혹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탄생할 때부터 모두 신이 예정해 놓은 것이 질서에 의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수록된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에서의 무르의 패악, ㅡ '이 XX같은 닭은 어디 있는 거야? 누구를 속이려는 거야?' ㅡ 그것이야말로 그녀는 처음부터 속아 넘어갈 운명이었고 타자들은 그녀를 속일 운명이었다(그런데 정말 결말은 그렇게 되었을지 어떨지 묘한 기분이다). 내가 표제작인 「소네치카」보다 「스페이드의 여왕」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구태(舊態)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통쾌하게, 거스를 수 없는 숙명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들은 모두 인간관계 속에서도 특히 '가족'을 파고드는데(그것도 가족만을) 피가 섞인 진짜 가족이라기보다 어쩐지 겉도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상당히 위험천만한 알고리즘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페미니즘과 친숙한 사람에겐 이 작품들이 더욱더 흥미롭게 읽힐 거라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사족) 러시아 문학에서, 음, 그러니까, 그 '이름'에 대한 강박관념은 언제쯤 깡그리 없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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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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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드식 사르카즘이야 그렇다 치고, 스티븐 킹만의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긴 괄호 세례(공공연하게 '부연의 king'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내 말 믿으시라, 내 글에서의 괄호 중 쓸데없는 것은 수천 개 중에서 한두 개밖에 없으니까, 라고 속삭이는 일종의 서브텍스트처럼)에 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10살로 접어들던 해의 극장에서 늙고 탐욕스러운 비행접시인이 등장하는 《지구 대 비행접시》에서 공포의 씨를 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작가 스티븐 킹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만약 그가 어릴 적부터 공포 영화를 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공포 문학, 호러 문학의 방향 제시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른다(킹 이전의 위대한 작가들도 있었지만). 『11/22/63』도(작가가 소설 속에서 비유한 '제목에 항상 숫자가 달리고 살인마가 거리를 활보하는 영화'의 느낌과 아주 살짝 비슷하달까) 이 '만약'이라는 하나의 명사에서 출발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과거 여행이다('즐거운 여행'은 아니고). 제목의 숫자는 미국의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사망한 날이다. 1963년 11월 22일. 그러니까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면, 하는 게 골자가 되겠다. 소설에서, 식당 창고의 '토끼 굴'을 통하면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을 가지고 장난친 수많은 영화를 떠올려볼 수 있을 텐데 이 소설은 약간은 다른 설정을 취한다.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게 되면 지금의 상황은 변했을지 몰라도, 다시 한 번 과거로 가게 되면 항상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부터 시작한다는 거다. 그때부터 리셋이 된다. 토끼 굴을 통과해 과거로 가는 순간 현재의 상황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다. 하나 더. 『드래곤볼』의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과거에서 얼마를 머물러도 현재에서의 시간은 고작 2분밖에 지나질 않는다. 오늘 아침 6시 정각에 토끼 굴을 통해 1958년으로 돌아가 10년을 지내다 와도 현재는 아침 6시에서 2분이 지나간 6시 2분이다(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는 신체의 변화는 현재로 돌아와도 이어진다). 그럼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1958년일 텐데, 케네디가 죽은 1963년까지 가려면 5년씩, 즉 한 번 실패해서 두 번째로 갔다 오면 나이가 10살은 먹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현재 시점)에선 2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결말은 조 힐(킹의 아들이며 그 역시 작가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그 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국내 출간이 이루어지기 전에 출판사의 배려로 가제본을, 그것도 1권만 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도 동시 출간이 아니라 일정에 맞추어 따로따로 나온다고 하니, 1권의 끝에서 어쩔 줄 몰라 어렵사리 미소를 쥐어짰던 주인공이 된 심정이다. 말인즉슨, 우리의 주인공이 케네디의 죽음을 막을 것인지 어떤지는 이 소설의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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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상 지도 - 마르크스에서 지제크까지, 눈으로 그려 보는 현대 철학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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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힘이 역사를 만든다며 계급투쟁을 부르짖었던 맑스는 그것 때문에 보드리야르로부터 비판당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철학책을 (두서없이) 읽다보면 '지금의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의 내가 아닌'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가 분명히 있다. 불한당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유유히 사라지는 히어로를 만끽한 다음 영화관에서 나올 때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철학은 수많은 은유로 점철된 소설이나 시에 비해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접하려면 끈기가 필요하다. 아주 약간의 끈기가. 『20세기 사상 지도』는 연대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묶였다. 그래서 뜬금없이 벤야민까지 등장한다. 이로써 어떤 문제를 보는가, 에 대한 추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괜찮다고 생각한 점은 이 양반들의 국내 번역본에 대한 코멘트가 붙어있다는 것. 다정도 병인 양, 친절함이 독이 되지 않도록 읽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 책을 포함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에 대하여 그것을 읽을 자유와 읽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 그에게 인간은 본질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도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내가 있어야 할 것으로 있는 이 미래가 단순히 존재를 넘어서 존재에 대해 현전할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는 엄밀하게 과거에 대립한다. 확실히 과거는 내가 나의 바깥에서 있게 되는 존재다. 그러나 과거는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존재다.」 그의 저작 『존재와 무』에 나오는 말이다. 정말이지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알튀세르 역시 사르트르와 함께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옹호했다. 여기에 반감을 드러냈던 자가 바로 알튀세르다. 그가 인간이란 주체는 사회적 구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까닭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것 말이다. 희한한 것은 알튀세르에게 있어 주체라는 범주는 이데올로기와 분리할 수 없게 되는 것인데, 더 뜨악한(!) 것은 그가 인간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고도 보았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코나투스(conatus)를 타고난 사회적 원자들인 인간을 꿈꾸는 것, 사르트르와 알튀세르는 대척점에 서있으면서도 그 두 개의 점을 죽 이어 만든 선 위에 함께 존재한다. 사실 사르트르건 알튀세르건 뭐가 중요하겠는가.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20세기 사상 지도』를 읽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ㅡ 이 세계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낄 수 없도록 재단한 것이다 ㅡ 20세기 역시 인간의 시대였다고 본다면,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 우리가 과거에도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인간으로 살아갈 것임을 확실히 해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보르헤스의 에세이 ㅡ 정확하지 않은 기억력에 의하면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ㅡ 에 나오는 동물 분류법처럼 언어(인식과 관념), 도구(아트 혁명, 노동과 여가), 정치(자아, 주체, 사회), 윤리(욕망의 꽃, 윤리)라는 네 가지 틀로 엮인 흥미로운 사상들을(직경 2 또는 3센티미터에 달하는 '알렙'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공간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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