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의 열한 가지 고독
리처드 예이츠 지음, 윤미성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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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독하거나 공허하거나 아니면 후유증 내지는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이 나와 춤을 추고, 예이츠의 미니멀한 묘사는 굳이 시대상을 들먹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고독의 피해를 입은 자들을 고스란히 현대로 데려와 이질감을 느낄 수 없게 한다. 그것이 너무나도 신중한 탓에 외려 인물들은 필요 이상으로 쓸쓸하고 고달프게 그려진다. 여자는 오래도록 입원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무신경하고 남편 또한 그녀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아프지 않아」). 그들은 서로에게 고독을 심어준 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데, 그녀가 남편을 뒤로하고 병원을 나설 때는 어딘지 모르게 김승옥이 그린 몰래 여관을 빠져나오는 두 젊은이를 연상케 한다. 예이츠의 단편에서는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파편적인 인간관계가 대두된다. 그들은 서로의 정서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싸워야 할 적이 없는 사회에의 일체의 개입을 부정한다. 이것은 「상어와 씨름하는 남자」에서 약간 뒤틀리긴 하지만 대동소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낯선 이와 지내기」에서는 나이 지긋한 여교사와 학생들 간의 심리적 줄다리기가 엿보인다. 무뚝뚝한 선생을 담임으로 맞이한 학생들은 그와 대비되는 분위기의 옆 반 아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소풍에서조차 훈계하는 담임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그녀만의 (어색하긴 하지만) 상냥한 모습으로 인해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다. 끝에 가서 아이들이 느끼고자 했던 ‘해방의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예이츠는 가난, 실직, 애정 결핍, 좌절, 오만, 괴리, 실망 등을 열한 편의 이야기에 담았다. 이것은 반드시 방황이나 도시화, 자본주의와의 연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편들이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 그대로이며 나/당신의 모습이다. 눈여겨볼 것은, 어떤 고독감이 됐건 그것은 얼마든지 형태를 달리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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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 게임이론으로 본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
마이클 S. 최 지음, 허석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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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공유 지식(common knowledge)을 매개로 조정 문제(coordination problems)를 다룬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유 지식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메시지를 당신도 똑같이 알고 있고, 내가 그 메시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이 안다는 사실을 내가 인지하고 있다(메타지식)는 무한 회귀의 공유 지식 과정을 거쳐 조정 문제에 도달한다는 거다(그러므로 조정에 성공하려면 메타지식이 필수적이다). 여기 하나의 예시가 있다. 나는 시위대에 참가하려고 하는데 공권력에 의해 강제당하지 않을 정도의 많은 사람이 참여할 때에만 함께 행동하려 한다. 그러는 편이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참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므로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나 혼자만 결론을 내리고 시위대에 참가했다가 낭패를 보기는 싫기 때문이다― 권위에 더 많이 복종할수록 나도 복종하려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 나/당신은 일종의 ‘추정’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또 다른 사례. 이메일을 사용할 때 참조와 숨은 참조를 사용하는 방법이다.(p.31) 전자에서 수신자는 나와 같은 메시지를 누가 받았는지 알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어딘지 모르게 동창회 모임에 나가려는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또 오지?」 「X와 Y와 Z.」 「X 때문에 가기 싫지만 Y와 Z가 있으니 가야겠어. 하지만 이런 말을 X에게 하지는 마.」 연인끼리 주고받는 윙크처럼 공개적이지 않은 경우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집단이 특정 메시지를 알고 있고 특정 장소에 모이는 것을 ‘의례’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설하고 노래하고 사회자를 따라 구호를 외치고 함께 같은 옷을 입는 것은 더욱 명시적이며, 같은 의례가 같은 장소에서 특정 일자에 반복된다면 그것은 시공을 초월해 세대 간에도 이어질 수 있다. 책에서는 동심원 모양의 배치(p.56)를 언급한다. 모두가 원으로 둘러서서 마주 보는 것은 ‘눈 맞춤’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 내부로 향하는 원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그들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하게끔 만든다(기존의 지배자를 타도하기 위해 사방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우에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상품으로부터 발생하는 행복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비하고자 할 때 커진다. 사람은 대중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되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 p.64 (개리 베커)




광고로 옮겨 가도 성립할 수 있다. 대대적으로 준비된 광고를 꾸준히 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시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것 또한 인지하게 되어 특정 상품을 구매하려 한다면 그것은 조정 문제가 된다(때로는 아예 ‘광고 내’에 어마어마한 군중의 모습이 삽입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텔레비전 광고에는 시청자 중복이나 노출 빈도 등의 매우 복잡한 변수가 간섭하므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적어도 텔레비전을 통해 어떤 공유 지식을 산출하는 최고의 기제는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보는 인기 프로그램에 해당할 것이다(이를테면 슈퍼볼). 「경험의 공유야말로 텔레비전의 가치다.」― CBS 사장 하워드 스프링거의 말이다― 자기 혼자 이상한 브랜드의 맥주를 들고 파티에 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며,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같은 종류의 맥주를 마시는 집합적 경험에 동참하고 싶어 한다.(p.83) 그런데 텔레비전과 공유 지식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과거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은 퀴즈쇼 <Family Feud(가정불화)>에 관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두 가족이 출연해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최다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는 포맷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아는지 여부에 따라 점수를 주었다는 데 있다(p.80)― <Family Feud>는 1978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TV 게임쇼 호스트 상을 받기도 했다.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이야기를 해보자.(p.100) 이 감방은 원형을 이루며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다. 감독관은 한 지점에서 모든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탑의 흐린 유리로 인해 감시자를 볼 수 없으며 또 서로 간에도 시야가 가로막혀 있다. 감방 사이에 놓인 칸막이는 죄수들을 분리해 그들끼리의 의사소통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정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집단행동조차 할 수 없다. 만약 감시탑이 개방되어 죄수들이 그 안을 볼 수 있다면 특정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들 사이에는 공유 지식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경우라면 감시자는 원형 감옥과 같은 대칭성을 피해 중앙 집중성이 없는 감옥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감시가 용이한 경우(감시탑이 개방되지 않을 경우)에도 죄수들끼리의 공유 지식은 가능하다. 그들은 각각 떨어져 있지만, 자신이 홀로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죄수들 또한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수들은 개방되지 않은 흐릿한 감시탑의 유리 때문에 늘 감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감시탑 내부를 볼 수 없으므로 언제 어떻게 감시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나는 왜 여기서 도처에 널린 CCTV를 떠올리게 되는지!). 추측하건대 개방된 감시탑은 죄수들로 하여금 공유 지식을 형성케 함으로써 동심원 좌석 형태를 가진 원형극장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과거 국기강하식을 할 때면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서 국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시간이 되면 다들 똑같이 행동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고 또 옆에 같은 자세로 멈춰 있는 사람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지배의 입장에서 통치의 일환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거기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의례이며 개인뿐 아니라 여럿의 군소집단이 여러 군데에서 같은 의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유 지식과 의례가 반드시 군중이나 집단이 한곳에 모여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그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텔레비전이 인간 생활에서 하나의 결속의 도구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해졌다는 사실도 인지할 수 있다. 나/당신/그(들)/그녀(들)는 각자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다른 사람들도 같은 광고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신문, 잡지, 책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독자는 다른 독자들도 같은 것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p.136)― 이것을 위에서 인용한 개리 베커의 말과 섞어 보면,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책들에 동요해 나 또한 그것을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책을 구입하는 줏대 없는 독자들 또한 양산된다는 답이 나올 수도 있다(위의 ‘같은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물론 정부가 혁명의 단초를 제거하려 하거나 회사가 노조의 분열을 바랄 경우 이러한 공유 지식은 ‘이간질’에 의해 깨질 수도 있다. 조정 문제를 둘러싼 문화적 갈등을 통해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과는 달리 공론장의 부재는 바로 이런 곳에서 문제시된다. 나는 어제저녁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접했다. 지난 4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밤 10시까지 벌어진 야간 시위를 두고 ‘해가 진 뒤부터 해 뜨기 전까지 벌어진 시위를 금지한다’는 집시법 조항이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이, 이 조항에 대해 ‘자정까지는 야간 시위를 허용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한정 위헌 결정으로 인해 처벌받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법원은 야간 시위와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일몰 후부터 24시까지 시위를 주최한 해당 사건은 무죄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도 재심을 청구해 구제받을 수 있을 걸로 보았다). 자, 나와 당신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한곳에 모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공유 지식을 통해 조정 문제에 다가갈 수 있고, 그 시간에 시청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앞으로 집회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파급효과는 더욱 눈에 띄게 두드러질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특이할 만하다고는 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정말 특이한 것은 뒤쪽의 부록이야말로 외려 내용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내 정신상태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깊이’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저자 스스로도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에 내재된 온갖 복잡성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구분과 비교에 대해서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에 대해 유의미하게 분석하고 설명한 것에는 나는 동의하고 있으며, 그의 말처럼 공유 지식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메타지식의 무한 회귀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질문 ― 인지(cognition)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공유 지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주장에서 기인한 ― 이 있다. 「아이스크림 파는 차가 어디에 있는지를 메리가 알고 있는지 존은 알까?」(p.116)



덧) 그런가하면 이런 거짓 공유 지식도 있다. 메이저리그 감독이었던 화이티 허조그의 말이다. 「한 사람을 멋들어지게 속여 넘기는 길은, 당신이 생각한 것을 상대가 어떤 식으로 알아냈으면 좋겠는지 하는 것을 당신이 실제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걸 그가 알아내리라고 당신이 생각한다는 것을 그가 알아낼 것임을 당신이 알아냈다고 그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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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욕망의 샘 - 정치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20
김재명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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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다녔고,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내 아들은 전용기를 타고 다니겠지만, 내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ㅡ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도는 이야기. (책 출간과 지금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뼈대는 같다) OPEC이 만들어지고, 석유 파동이 일어나고, (한국에서는 '오일 특수'를 누리게 되고) 산지는 석유를 팔아 무기를 사고, 다시 그 무기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고ㅡ 책에서 다이아몬드(bloody diamond)를 설명하며 '숙녀들의 영원한 친구이면서 동시에 반군들의 영원한 친구'라고 묘사한 것처럼, '검은 황금'이라 일컬어지는 석유 또한 bloody oil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다……. 미국은 중동 쪽의 유가가 높아지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낮으면 낮을수록 자국 경제에 도움이 되니 말이다. 10여 년 전 이라크 침공에서 다친 후세인은 '미국이 이라크로부터 석유를 값싸게 얻기 위해' 희생된 것이며, 그보다 1년 전 후세인이 석유 수출을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침공은 없었을지 모른다. 한마디로 지구상에 석유란 것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전쟁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역사는 잉크로 기록되는 게 아니라, 석유로 기록된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있을까. 어찌 되었든 뚜렷한 진실 하나는, 바로 석유는 피를 부른다는 것. 수요와 공급이 적절한 긴장을 유지한다면 모르겠지만 석유라는 것은 매장된 것을 끌어올려 사용하는 순간 끝이 난다. 동물처럼 새끼를 까거나 식물처럼 씨앗을 틔워 무한정 생산되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니라 포물선을 그려 가다가 결국엔 바닥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석유 공급은 줄어드는데 수요가 그에 반한다면 당연히 유가는 치솟기 마련이고. 2005년에 나온 미국 에너지부의 연구보고서는 전 세계적으로 석유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석유 부족의 시작을 2015년으로 잡았다고 한다. 대체연료를 개발하지 않는 한 석유를 둘러싼 전쟁 특히 산유국을 상대로 하는 침략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석유는, 축복으로 시작해 재앙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스미스가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너희의 유일한 생존 방식은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거야.」 이것이 그의 인간에 대한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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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강신주.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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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들고나왔을 때보다 강신주는 이쪽이 좋다. 『김수영을 위하여』도 괜찮았지만 사사건건 김수영에 옭아 드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도 장(章)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그를 끄집어내고는 있지만 차라리 이편이 나은 점은 그만큼 김수영에 구애되는 비중이 적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조금 더 거시적이 되고 조금 더 '맨얼굴'이 된 셈이다. 궁극적으로 인문/인문학이 당당해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고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모이고, 묻고, 답하고, 토론하고, 촉구하는 논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문학은 달큼한 사탕 껍질을 벗어던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문/인문학이 감당해야 할 용기는 일순 약해졌다가 다시 제힘을 되찾고 건강한 인문학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을 보면 말발과 글발이 고르지 못한 이들이 인기를 얻는 것만 같다. 고르지 못하다는 건 쉽게 변질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쉽게 변질되면 그것은 더 이상 당당하지 못하게 되고, 사람들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은 펜대에 현혹되어서는 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편승만 하게 된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니까, 저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주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사탕 껍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안경을 삐딱하게 쓰고서 내가 밟고 있는 땅이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스스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해서는 누군가가 와서 내 머리를 난타했다고 말한다. 말을 쉬 하지 못하고 언제나 차렷하고만 있으면 언제나 타인에게서 답을 구하게 된다. 묻고 답하는 것은 외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ㅡ 그럴 바에야 균형을 버리고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이 낫다, 적어도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자각은 하지 못할 테니.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겠다? 지도자는 항상 옳은 말만을 한다? 누군가를 가리켜 지도자라 한다면 자신은 추종자에 불과해진다. 그리고 그 지도자라는 것은 지배자와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 모든 논의가 성립하려면 사회과학이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럴듯한 인문학은 사회과학을 죽여 왔고 번지르르한 말들은 커리큘럼 없는 유행이 되었다.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응당 그래야 하는' 것들이 판을 쳐야 하지 않겠나. 당당한 인문학이 되자고? 역설적이게도 사회과학을 죽인 허튼 인문학은 죽었다 깨도 당당할 수 없다. 진열장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사회과학이건 인문학이건 언죽번죽한 치렛말에서 벗어나 맨얼굴을 보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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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 폴리티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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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 빌어먹을 양반들, 한국을 좀먹는 부장들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권력 어딘가에 촉수를 들이밀어 끈덕지게 들러붙어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면 그/그들을 부리는 자들이 부장들의 필요성에 의심을 품지 못하고 있거나……. 과거의 중앙정보부 부장들은 남산에 있었다. 저자는 그것을 일컬어 양산박(梁山泊)이라 했다. 양산박은 중국 산둥성 서부에 있는 늪인데, 지형이 험준해서 예로부터 도적이나 모반군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다. 양산박이건 복마전이건 확실히 남산은 한국 정치에 있어 어떤 의미로든 빼놓을 수 없는 곳임에 틀림없다ㅡ '남산에 간다'는 것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남산은 중앙정보부의 별칭으로 남산 중턱의 1호 터널 북측에 그 본부가 존재한 데서 비롯되었다. 숱한 가혹행위와 정치 공작의 산실이다. 심지어 국회의원도 수십 명씩 잡혀 가 얻어맞거나 고문을 당하지 않았나. 김지하가 「오적(五賊)」을 썼을 때도 매한가지였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상 국가원수모독죄가 존재하는 현실이다. 시국 선언을 하거나 그림 한 장을 그려도 조사를 받거나 고발 당하기 일쑤다. (비록 이 책이 박정희 시대만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로 2014년 현재까지 이어져 온 한국 사회의 전통이다. 달라진 것이 없다ㅡ 세간에서 '박통 시즌 2'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다른 것을 보아도 그렇다. 이후락이 떡을 만지는 사람 손에 떡고물이 묻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듯 어느 면을 보나 과거의 한국과 현재의 한국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김두한이 국회에 분뇨를 뿌렸을 때가 새삼 정겹게만 느껴지는 연유는 바로 이런 모습들에서 기인한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탈락하고 귀국한 축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엿을 던질 일이 아니다. 차라리 국회에 던지라. 엿이 아깝다……. 돌아보면 한국 정치 혹은 한국 사회에서는 참으로 다종다양하고 다이내믹한 일들이 많이도 일어났다. 군부의 쿠데타 이후 국회의원의 초산 테러, 의문의 여인 정인숙 피살, 말로만 듣던 채홍사의 실체, 여야 가릴 것 없는 남산의 공작, 개헌, 유신, 부정 선거, 국회의원 납치와 살인미수, 망명, 비자금, 평양 밀행, 대통령과 영부인 피살, 또 다른 쿠데타…… 이 외에도 규모가 작아 '해프닝'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던 일들도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지금, 박정희를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박정희를 제외시킬 수는 없다고 말이다. 물론 그를 빼놓고는 한국 정치는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하의 시민들의 집회에서 최루액과 물대포가 등장하는 마당에 박정희 연구라니. 과연 그런 논의가 있어야 할까 싶다. 이렇게도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다이내믹한 한국 사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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