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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1592년 음력 4월 12일 절영도(현재 부산 영도) 앞바다에 격랑이 일었다. 왜선 수백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영도에 사냥을 나가있던 정발 장군이 그것을 보고 왜군의 침략을 직감했다. 서둘러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방어에 돌입했다. 머지않아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이끄는 대군이 부산진성을 공략했다. 끝까지 항전하며 막아보려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승리에 취해 욱일승천하던 왜군은 거침없이 동래성으로 향했다. 불과 2~3일 사이에 동래성도 무너졌다. 송상현 부사가 끝까지 항전하다 순절했다. 일본의 외침外侵이 조정에 알려졌으나 뚜렷한 대책이 없었다. 이제 한양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백전 노장 신립 장군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불과 보름 남짓 만에 파죽지세의 기세로 한양 턱밑까지 점령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1392년 조선 건국이래 200년간 전쟁다운 전쟁이 없었다. 1591년 왜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통신사조차도 당리당략에 치우쳐 두 갈래로 의견이 분분했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왜는 조만간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했고,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보고했다. 선조는 민심을 혼란케 한다는 이유로 집권세력인 동인의 의견에 따랐다. 이렇듯 안이하고 혼란한 가운데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고 침략을 감행하였다.
신립장군은 조총의 위력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아직 한 번도 대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사뭇 자신감에 차 있었다. 사실상 왜군은 부산이후 충주까지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무혈입성하듯 한양으로 전진했다. 역사에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겠지만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 것은 왜 신립장군이 천연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활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소서행장도 자인하였듯이 문경새재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쳤더라면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인데,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 버린 아쉬움은 두고두고 역사에 회자되고 있다. 순변사 신립은 문경새재를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8천의 군사로 배수의 진을 쳤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결전의 한판이었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그렇게 용맹했던 신립장군도 조총의 위력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삼열로 조직된 조총부대의 총알세례에 조선 군사는 피할 틈도 없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선조는 신립장군의 패배소식을 듣고 피란길에 올랐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왕조시대 왕이 잡히면 조선은 멸망과도 다를 바 없었다. 백성들 몰래 급히 떠난 몽진은 백성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6.25 전쟁 때도 그랬듯이, 끝까지 한양(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천명해 놓고선 사태가 급해지자 몰래 도망간 것이다. 허탈감에 빠진 백성은 궁궐을 불사르고 쌀과 금은보화 등 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훔쳐갔다. 사실상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몽진을 떠나고 3일만인 5월 2일에 소서행장의 군사들이 한양을 점령했다. 불과 20일만에 조선의 수도를 왜군에 내준 것이다. 전쟁의 참상은 말해 무엇하랴? 애지중지 키우던 가축과 식량을 약탈해 가는 것도 모자라 장정들을 죽이고 젊은 처자들은 왜군의 성노리개로 삼아 처절히 유린했다.
평양성에 갖은 고초를 겪으며 도착한 선조는 좌불안석이었다. 한양과 불과 이틀이면 닿을 거리였기에 왜군의 추격에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한양을 점령하고 군사들이 지쳐선지 평양성의 공격은 미뤄졌다. 그나마 평안도는 잉류지역(조세 면제)이라 곡물이 다소 풍부했다. 1592년 4월~6월까지 조선은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어떠한 희망도 없었고 목숨만 연명해 사는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이런 와중에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희소식이 있었으니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그해 7월에 ‘한산도대첩’이라 불리는 대승리를 거뒀다. 가뭄에 단비 같은 기쁜 소식이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던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경남 의령에서 4월 22일 최초로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를 거쳐 전라도로 입성하려는 왜군을 의령 정암진(1592.5)에서 장쾌하게 물리쳤다. 왕과 신료들은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한양을 등졌지만 민초들은 끝까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군과 맞서 싸웠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어나는 건 힘없는 백성이요, 민초들이었다.
평양성에 머물고 있던 선조는 6월 들어 왜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또다시 몽진을 주장했다. 그것도 명나라 땅인 요동으로 대피하려 한 것이다. 조선왕이 조선 땅을 두고 명나라로 간다면 조선은 멸망이나 다름없다는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로 결국 의주로 몽진을 떠났다. 철석같이 평양성을 사수하리라 믿었던 평양의 백성들은 또한번 배신에 치를 떨었다. 6월 15일에 결국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떠나면서 조선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분조를 시행한다. 광해군에게 삼남이남 지방을 통치하게 전권을 위임하여 왜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두 조정을 세워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광해군의 눈부신 활약으로 소기 성과를 거두지만 이를 시기한 선조는 머지않아 분조를 통합하기에 이른다.
1592년 12월 드디어 명나라 5만 대군이 조선의 간곡한 요청으로 조선 땅에 들어와 왜군과 일전을 겨루면서 평양성을 탈환하고 전쟁의 기세를 단숨에 바꿔 놓았다. 왜군은 한양으로 물러나고 조선은 기회를 살려 한양까지 치려 하지만 명의 경략 송응창과 이여송 제독의 반대로 주춤하게 된다. 명나라 입장에선 자기 땅도 아닌 조선에서 수많은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는 적극적인 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노략질 폐해도 만만찮았다. 항간에 “왜군의 노략질은 얼레빗이고 명군의 노략질은 참빗”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인 것을 보면 왜군보다 명군의 괴롭힘이 더 컸던 모양이다. 이래저래 백성들은 이중, 삼중고를 겪으며 죽지 못해 연명하는 처참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1593년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임진년 말에 명나라가 전쟁에 참여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기세도 한풀 꺾이고 명나라도 전쟁의 쓴맛을 본터라 명과 왜는 강화하자는 쪽으로 급선회하였다. 6.25전쟁 시 남북한의 휴전반대에도 아랑곳없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듯이, 조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명과 왜 사이에 강화협상에 돌입하였다. 조선의 임진왜란 3대첩으로 유명한 한산도대첩(1592.7), 진주대첩(1592.10), 행주대첩(1593.2)의 성과로 왜도 더 이상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소서행장 같은 주화파도 풍신수길의 의사와 달리 협상을 꾀하였다. 결국 속고 속이는 협상 끝에 전모가 탄로나 정유재란의 발발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징비록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류성룡 선생(1542~1607)이 관직에서 물러나 병산서원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지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반성하며 저술(1599~1604년 완성)한 것으로 여러 임진왜란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자세하고 치밀하게 고증했다. 왜에서 간행소식을 듣고 오래지 않아 징비록을 왜로 몰래 들여와서 임진왜란의 연구자료로 삼았다고 하니 우리의 주요기밀이 왜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다. 류성룡의 저술 의도는 왜 그토록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동인(동인 중에서도 남인)의 거두로서 반성의 차원에서 썼겠지만 더 큰 목적은 두 번 다시 이러한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계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러함에도 우리 선조들은 불과 30여 년 후 병자호란의 수치와 300여년이 지난 1910년에 다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을 맛봤다.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는가? 지나간 일들을 오늘날 상고하며 공부하는 이유는 오직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류성룡 선생이 경계한 교훈을 후손들이 가슴에 새겨듣고 대응책을 마련했더라면 병자호란도, 조선의 멸망도, 일제강점기 35년의 압제도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지난일이니 차치하고 오늘날 정세를 떠올려 보아도 징비록은 충분히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꽃 같은 조선여인들의 정신대 동원과 근자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에 조선 청년들의 강제징용 사실조차 부인하는 그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호시탐탐 독도를 자기 땅이라 외치며 뺏을 기회만 엿보고 있는 일본의 작태를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고 대비할 것인지를 징비록을 읽고 그 실마리를 얻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