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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양장) - 제왕학의 영원한 성전 ㅣ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2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윤(伊尹 : 은나라 탕임금의 신하)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百里奚 : 춘추시대 진秦 목공穆公의 대부)가 노예가 된 것은 모두 군주에게 등용되고자 한 일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이었으나 스스로 저급한 일을 해서 등용되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구차스러운가!
그러나 이제 자기 말言이 요리사나 노예의 말言과 같이 될지라도 등용되어 세상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능력 있는 사람이 수치로 여길 일이 아니다. 군주와 신하로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 군주의 은혜가 깊어졌을 때는 원대한 계획을 바쳐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논쟁을 일으켜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해득실을 명확히 해 공적을 세우고, 옳고 그름을 곧이곧대로 지적해 군주를 바로잡는다. 이처럼 군주와 상대할 수 있게 되면 이 유세는 성공한 것이다.
옛날 정鄭나라 무공武公은 호胡나라를 정벌하려고 할 때, 먼저 딸을 호나라 왕에게 출가시켜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이 출병하고자 하는데 어느 나라가 정벌할 만하오?”
대부 관기사關其思가 대답했다.
“호나라가 칠 만합니다.”
그러자 무공이 화를 내며 그를 처벌하면서 말했다.
“호나라는 형제 나라다. 그대가 호나라를 정벌하라고 하나, 이 무슨 말인가?”
이 소식을 들은 호나라 왕은 정나라가 자기 나라와 친하다고 생각해서 정나라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정나라의 군대는 호나라를 습격해 그 나라를 빼앗았다.
송나라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비가 내려 담장이 무너졌다. 아들이 말했다.
“담장을 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도둑이 들 것입니다.”
이웃의 노인 또한 같은 말을 했다. 그날 밤 과연 많은 재물을 도둑맞았다. 그러자 집안사람들은 아들은 매우 지혜롭다고 여겼지만 그 이웃 노인에 대해서는 의심했다. 이 두 사람이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적중하였다. 그러나 심하게는 형벌을 받고 작게는 의심을 사니, 정말로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바를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옛날 미자하彌子瑕<뛰어난 외모 때문에 남색을 좋아하는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는 위나라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은 왕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에게 발이 잘리는 형벌을 내리도록 했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밤에 몰래 와서 미자하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미자하는 슬쩍 왕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왕은 이 일을 듣고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발이 잘리는 형벌도 잊었구나!”
다른 날 미자하는 왕과 함께 정원에서 노닐다가 복숭아를 따 먹게 됐는데, 맛이 아주 달자 왕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왕이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구나. 맛이 좋으니까 과인을 잊지 않고 맛보게 하는구나.”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미모가 쇠하고 왕의 사랑도 식게 되었을 때, 한번은 왕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옛날에 과인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타기도 하고, 또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과인에게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미자하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으나 전에는 칭찬을 받고 후에는 벌을 받은 까닭은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에게 사랑을 받을 때는 지혜를 내는 것마다 다 왕의 마음에 들고 더 친밀해지지만, 왕에게 미움을 받을 때는 아무리 지혜를 짜내어도 왕에게는 옳은 말로 들리지 않아 벌을 받고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따라서 간언을 하거나 논의를 하고자 하는 신하는 군주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미리 살핀 뒤에 유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용이라는 동물은 유순해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 밑에 한 자쯤 되는 거꾸로 난 비늘, 바로 역린逆鱗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유세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p.136~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