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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보급판) - 사기 130권을 관통하는 인간통찰 15
김영수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상대방에게 인정받는 것이다.이는 누구나 진심으로 바라는 바다. 이해는 피차간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일단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껴지면 관계는 그걸로 끝나기 십상이다.
오늘날의 산서성 지역에 기원전 11세기에 일어나 기원전 4세기에 망한 진(晉)이란 나라가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그 땅이 지금의 하남성과 하북성 전체에 미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기로 접어들면서 기득권층인 경·대부들의 세력이 커지고 군주의 힘이 점점 약해지면서 마침내 하극상의 풍조가 퍼져버렸다.
진나라의 실권은 한,조,위,범씨,중행씨,지씨 등 여섯 세도 가문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고, 결국 이들 세력들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기원전 5세기 중엽, 범씨와 중행씨가 소멸되고 남은 세력들이 진나라 땅을 서로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남은 네 세력들 중에서 지백知柏이 가장 교만하고 비인간적이어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남의 땅이나 재산을 빼앗는 등 만행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에 한,위, 조가 연합하여 지백을 공격하여 죽여 버렸다. 특히 조양자趙襄子는 지백을 얼마나 증오했던지 그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해골에 옻칠을 하여 술그릇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 지백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사기> 권86 <자객열전>의 한 주인공 예양의 뒤를 따라가 보자.
처참하게 살해된 지백의 참모 가운데 예양이란 인물이 있었다. 예양은 일찍이 범씨와 중행씨를 도왔으나 제대로 기용되지 못하고 지백에게 흘러들어 갔다. 지백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큰일을 맡겼다. 지백이 죽자 가신들은 놀란 짐승이 도망치듯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예양도 산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처량한 신세가 된 예양은 말없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오호라! 뜻을 세운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내를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다. 지백은 나를 알아주었으니, 그를 위해 죽음으로 복수하여 보답하는 것이 내 혼백에 부끄럽지 않으리!”
이후 예양은 성과 이름을 바꾸고 조양자의 궁궐에 몰래 숨어들어 변소를 청소하는 비천한 인물로 위장하고는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어느 날 조양자는 변소에 가려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호위 병사를 시켜 변소를 조사하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수를 감춘 채 변소에 숨어 있던 예양이 붙잡혀 나왔다. 호위 병사는 예양을 죽이려 했으나 조양자는 예양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며 놓아주었다.
하지만 예양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몸에 기름을 바르고 나환자처럼 가장한 뒤 뜨거운 숯을 삼켜 성대를 끊고는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기회를 엿봤다. 예양의 얼굴은 그 아내조차 몰라볼 정도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 외출하던 조양자가 한 다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말이 놀라 껑충 뛰어올랐다. 호위 병사가 즉각 다리 밑을 뒤져 조양자를 습격하려던 예양을 찾아냈다.
조양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예양에게 물었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백이 그들을 멸망시켰을 때는 그들을 위해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지백의 부하가 되지 않았던가? 헌데 지금 지백은 죽고 없는데 어째서 그대 혼자 이토록 집요하게 지백을 위해 복수하려 든단 말인가?”
이에 예양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나를 그저 평범한 인물로 대우했고, 나 역시 평범한 인물로서 그들에게 보답했을 뿐이오. 허나 지백이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했으니, 나 역시 국사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이에 조양자는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을 내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오, 예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하려는 일은 그 명분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놓아주는 일 또한 한계에 이르렀다. 이제 그대는 각오하라. 다시는 놓아줄 수 없으니!”
그러고는 호위 병사를 시켜 예양을 에워싸게 했다. 그러자 예양은 조양자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신이 들으니 현명한 군주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감추지 않으며, 충신에게는 절개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의리가 있다고 합니다. 지난 번 군君이 신을 너그럽게 용서함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군이 어질다고 칭찬합니다. 오늘의 일로 신은 마땅히 죽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부디 군의 옷을 칼로 쳐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신다면 죽어 여한이 없겠습니다. 감히 그렇게 할 수 없겠지만 마음속에 있는 바람을 내보였을 뿐입니다.”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탄복한 조양자는 주저하지 않고 옷을 벗어 예양에게 건네주었다. 예양은 칼을 휘둘러 조양자의 옷에 구멍을 몇 개 낸 다음 “이제 비로소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구나!” 라고 외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나라의 뜻있는 인물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사마천은 이 말로 극적인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백은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예양은 지백이 베푼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목숨으로 자신을 알아준 지백에게 보답했다.
예양의 의리는 무모하고 명분도 약하다. 배신과 음모가 판을 치던 전국시대 막바지. 예양은 변화해가는 인간관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예양은 살벌했던 전국시대에 로맨틱한 인간관계의 마지막 잔상을 남겼으며, 그 진한 여운이 사마천에 의해 감지된 것이다.
인간관계는 단순한 물리적 관계가 아닌 복잡한 화학적 관계와 같다. 그래서 오묘하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군주와 신하 사이가 되었건,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가 되었건, 깡패와 깡패의 관계가 되었건 그 사이에는 “신의(信義)‘라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예양의 의리는 우리에게 인간관계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리와 관계가 바른 방향으로 줄타기를 하면 세상을 밝게 하는 쪽으로 작용하지만, 그 반대가 되면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이런 점에서 세상에 대해 진지하고 바른 뜻을 품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후원해주는 사람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칠 수 있는 분위기와 통로가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뜻이 흔들리고 인내심이 바닥나면 그들은 자신이 타고 있던 줄의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준다는 것’,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철석같던 소신을 굽히게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내던지게도 하니 말이다. p.185~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