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엽의 오월춘추 고담총서 11
조엽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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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西施)는 춘추시대 월(越)나라 미인으로, 월왕 구천(句踐or勾踐.재위 BC496∼BC465)이 오(吳)나라에게 패한 뒤 미인계(美人計)로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재위BC496-BC473)에게 보내니, 부차는 서시에게 푹 빠져서 고소대(姑蘇臺)를 짓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결국 구천에게 패망했다.

 

오․월의 처절한 승부는 마치 극적인 반전(反轉) 드라마와도 같다. 그러기에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서시빈목(西施矉目) 등의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자, 두 나라의 길고 긴 부침(浮沈)의 유전(流轉)을 따라가 보자.

 

오왕(吳王) 합려(闔閭.재위 BC515~BC496)는 쿠데타로 왕이 된 뒤 오자서(伍子胥. ?~BC

485)와 손무(孫武. 생몰미상) 등의 계책을 채용하여 서쪽으로는 패자로서 이름을 떨치던 초나라를 격파하고, 북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제압했으며, 남으로는 월나라를 정복하여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니, 합려를 춘추 오패의 하나로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한편 월나라 윤상(允常. ?~BC496) 대(代)에 이르러 흩어져 있던 월나라 계통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마침내 나라의 체통을 갖출 만큼 세력을 형성한 뒤 오나라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윤상이 죽자 구천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오왕 부차와 긴 세월-기원전 473에 오나라가 멸망하니 무려 24년-동안 패권을 다툰 월왕 구천이다.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합려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침공했다. 국상(國喪)이 난 나라를 친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는 오자서의 반대를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합려는 구천의 계략에 말려 전투에서 패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그 부상이 악화되어 회생하지 못했다. 임종이 가까워진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말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네 아비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를 갈았다. 그는 섶나무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잤으며(臥薪), 자기 방에 드나드는 신하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유언을 한 번씩 외게 함으로써 항상 마음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3년이 지니지 않아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보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구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구천은 오나라의 공격을 받기 전에 먼저 치기로 했다. 그러자 대신 범려(笵蠡. BC517~?)가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부차를 우습게 본 구천은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출전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군은 호랑이같이 사나워 월나라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구천은 패잔병 5천명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 )으로 퇴각했으나, 부차가 물러나지 않고 쫓아와 월군을 포위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구천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너무 경솔하여 이 치욕을 당하는구나!”

 

구천은 땅을 치고 싶을 만큼 후회가 되었다. 사지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범려의 충언대로 대부(大夫) 문종(文種. ?~BC472)을 강화사절로 보냈다. 그리하여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주는 한편, 월나라를 송두리째 오나라에 맡기고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되고 아내는 오왕의 첩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요청했다. 부차는 처음에 아버지의 원수인 구천을 멸하려 했으나, 뇌물을 받은 백비의 의견에 따라 허락할 뜻을 보였다. 그러자 오자서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구천을 없애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구천은 훌륭한 군주이며 범려와 문종 같은 훌륭한 신하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반드시 훗날 우환(憂患)이 될 것입니다.”라는 진언이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부차는 구천을 용서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국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구천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치욕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오나라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난 뒤 구천은 겨우 월나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구천은 곁에 항상 짐승 쓸개를 놓아두고 그 쓴맛을 핥으며(嘗膽)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는 바로 부차와 구천이 각기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낸 데서 유래한 것이다.

 

구천은 몸소 밭을 갈고 부인도 옷감을 짰으며,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졌다. 구천은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빈객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백성들과 그 아픔을 같이 했다. 구천은 회계산에서 돌아온 뒤 7년 동안 백성들을 편안케 했으며, 백성들도 구천의 은혜에 감격하여 오나라로 갈 원정군에 종군하기를 원했다. 복수심에 불타던 구천이 오나라 정벌을 말하자, 신하들이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만류했다.

 

한편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게 항복을 받은 지 5년 후에 군대를 일으켜 제(齊)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오자서가 반대하고 나섰다. “제가 듣기로 구천은 맛있는 음식을 삼가고 쓸개를 맛보면서 오직 보복할 기회만을 노리고, 소박한 생활을 하며 백성과 고락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구천이 살아있는 한 오나라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있어 뱃속의 질병과 같습니다. 어느 병을 먼저 치료해야 하겠습니까? 제나라 공격을 뒤로 미루고 월나라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부차는 근신하고 있는 월나라를 친다는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까지 크게 무찌르고 귀국했다. 그러고는 오자서를 불러 큰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나 오자서가 크게 기뻐할 일이 못 된다는 표정을 짓자, 부차는 진노하며 오자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4년이 지난 뒤 부차는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때 구천은 자진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돕는 한편 갖은 보물을 뇌물로 바쳤다. 문종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부차에게 미인계를 쓰자고 진언했다. 이리하여 수많은 미인 가운데서 뽑힌 두 여인이 서시와 정단(鄭旦)이었다. 서시(西施)는 저라산(苧蘿山) 밑에 사는 나무꾼의 딸이었다. 원래 저라산에는 동촌(東村)과 서촌(西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시씨(施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두 미인은 다 서촌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 중 하나를 서시라고 하고, 다른 미인도 출신이 같았기 때문에 서시와 구별하기 위해 정단이라 했다.

 

구천은 토성(土城) 땅으로 두 미인을 보내어 필요한 범절을 배우게 했다. 토성에서는 늙은 학사(學士)들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두 미인에게 노래와 춤, 화장법과 걸음걸이까지 가르쳤다. 두 미녀는 그곳에서 3년 동안 갖은 재주를 다 배웠다. 그녀들이 주렴을 드리운 아름다운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면 천지가 향기로 가득 차는 듯했다. 여기서 서시의 아름다움에 얽힌 속담을 알아보자. 서시빈목(西施矉目)은 서시가 속병이 있어 눈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마을의 못난 여자들이 눈을 찌푸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줄 알고, 자기도 눈을 찌푸리니 더욱 못나게 보였다는 고사(故事)에서,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이다.

 

마침내 승상 범려는 서시와 정단을 데리고 부차에게 바치려고 오나라로 갔다. 범려가 오나라 궁궐에서 들어가서 부차에게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구천의 말을 전했다.

“동해의 천신(賤臣) 구천은 태산(泰山) 같은 성은을 입으면서도 친히 대왕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 한(恨)입니다. 그래서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인 둘을 뽑아서 대왕께 보내오니 좌우에 두고 부리시기 바랍니다.”

 

부차가 굽어보니 보통 여인들이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 천상의 선녀 한 쌍이 하강한 듯했다. 부차는 그만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넋을 빼앗겼다. 그 때 곁에 있던 오자서가 간했다.

 

“신이 듣건대, 하나라는 말희 때문에 망했고, 은나라는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는 포사 때문에 혼란했다고 합니다. 무릇 아름다운 여인은 나라를 망치는 요물입니다. 왕께서는 저 두 여인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요. 그런데 구천은 저런 미인을 자기 곁에 두지 않고 과인에게 바쳤으니 그 충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소. 승상은 과도히 남을 의심하지 마오.” 그 후로 부차는 천하일색인 서시와 정단을 총애했다. 그러나 요염하고 비위를 잘 맞추기는 정단보다는 서시가 월등했다. 그리하여 서시는 노래와 춤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서시는 고소대(姑蘇臺)에 거처하면서 부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서시가 출입할 때는 그 거동이 왕후(王后)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정단은 오나라 궁에 거처하며 서시를 질투하다 병이 나서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구천은 부차가 서시를 총애하여 밤낮없이 즐긴다는 정보를 듣고 다시 문종과 상의했다. 문종은 오나라에서 곡식을 꾸어옴으로써, 오나라의 실정을 파악하겠다는 계략을 세웠다. 문종은 오나라로 가서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매사를 잘 주선해달라고 청했다. 백비의 주선으로 기회를 얻은 문종은 부차를 설득했다. 그러자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나라에 곡식을 보내 주었다. 이에 오자서는 깊이 탄식했다.

‘아, 임금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시니 3년이 못 가 오나라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이후에도 부차는 내정을 돌보지 않고 오직 명예욕과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를 공격하는데 바빴다. 부차가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오자서가 또 반대했다.

 

“제나라는 점령해본들 자갈밭과 같아서 쓸모가 없습니다. 제나라보다 월나라를 치는 일이 더 급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사신으로 삼아 제나라에 다녀오도록 명령했다. 오자서는 제나라에 갈 때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되돌아올 때 아들에게, “이제 오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고는 제나라의 대부 포씨(鮑氏)에게 아들을 맡기고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자서를 모함하는 데 혈안이었던 백비는 이 사실을 알고는, ”제나라에 아들을 맡기고 온 오자서는 이미 오나라를 섬길 마음이 없는 자입니다.“라고 부차에게 참소했다. 오왕은 어리석게도 백비의 말만 믿고 사자를 시켜 촉루지검을 주며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반드시 내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다오. 내 시체로 그 나무를 길러 왕(부차)의 관을 만들게 하겠다. 그리고 내 눈을 빼내어 오나라의 동쪽 관문을 걸어 놓아라. 그 문 위에서 월나라 도적들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오자서가 유언을 마치고 자결하니, 오왕 부차가 즉위한 지 11년째의 일이었다.(기원전 485년). 오자서의 유언을 전해들은 부차는 크게 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 후 오나라 사람들은 오자서를 가엾이 여겨 강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胥山)이라고 했다.

 

한편 오자서가 죽은 해에 제나라에서는 실권자 전씨(田氏) 일족이 임금인 도공(悼公. 재위 BC489~BC485)을 죽이고 나이어린 간공(簡公. BC485~BC481)을 세웠다. 부차는 이를 핑계 삼아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2년 후 부차는 노(魯)나라 왕과 위(衛)나라 왕을 탁고(橐皐)에 불러 모아 회맹했으며, 이듬해에는 북쪽으로 올라가 제후들을 황지(黃池)에 모아 회맹했다. 일개 오랑캐 추장에 지나지 않았던 오왕이 마침내 중원의 제후와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패자(覇者)의 기쁨도 한순간이었다. 월나라가 이 틈을 이용하여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모두 부차를 따라가고 국내에는 태자와 함께 노약자들만 머무르고 있었다. 구천으로서는 십 수 년을 벼르고 벼른 복수전이었다.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군대를 쉽게 격파하고 태자를 잡아 죽였다. 부차는 즉시 월나라로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구천과 범려는 의논 끝에 강화를 수락했다. 오나라의 북벌군이 돌아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천은 휴전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오나라의 멸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휴전 후 월나라는 계속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나, 오나라는 이미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고갈되고 병력 손실도 너무나 컸다.

 

그로부터 4년 후 부차는 총공격령을 내려 오나라에 다시 쳐들어왔다. 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 수도를 포위했다. 마침내 제후의 맹주로서 천하에 위엄을 떨쳤던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기원전 473년) 구천은 부차를 불쌍히 여겨 살려주고자 했으나, 부차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할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부차는 “죽어서도 충신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겠다.”라며 얼굴을 헝겊으로 덮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후하게 장례지내 주었으며, 간신 백비는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여 주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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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2 - 항우와 유방 스타북스 초한지 2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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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垓下歌 (해하가 : 해하의 노래)

 

                                           항우(項羽. 초나라. BC232~BC202)

 

力拔山兮氣蓋世 (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時不利兮騶不逝 (시불리혜추불서) 때가 불리하여,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내약하)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을까?

 

 

우리가 어렸을 때 국어나 한문시간에 역발산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를 배웠다. 더불어 유방과 항우의 손에 땀나는 전쟁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이나 더 젊은 친구들은 역도산(力道山. 1925~1963)은 알아도 역발산과 항우는 모른다. 배우지 않았으니 모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논술과 입시에 관계되지 않는 것들은 보지도, 배우지도 않으려 드는 것이 요즘 세태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국지(三國志)>는 몇 번씩 읽어도 <초한지(楚漢志 )>는 결코 읽지 않는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아니,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 태반이다. 그러다가 1993년,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가 뜨자, 사정은 일변했다. 사람들은 금세 장국영(張國榮. 1956~2003)과 항우와 우희에게 빠져든 것이다.

 

<패왕별희(覇王別姬)>는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용맹성과 그 애첩 우희(虞姬. ?~BC202)와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중국의 대표적 고전 경극(古典京劇)이다. 경극 <패왕별희>가 처음 창작된 것은 1918년 무렵이다. ‘패왕별희’라는 제목은 ‘초패왕과 우미인, 즉 우희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한나라 건국 때의 역사를 담은 <초한지(楚漢志)>에 나오는 극적인 장면이다.

 

초패왕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은 홍구(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 강화하고 5년간에 걸친 패권(覇權) 다툼을 멈췄다(기원전 203). 힘과 기(氣)에만 의존하다가 범증(范增. ?~BC204) 같은 유일한 모신(謀臣)까지 잃고, 밀리기 시작한 항우의 휴전 제의를 유방이 받아들인 것이다. 항우는 곧 초나라 도읍인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장량(張良. ?~BC168)과 진평(陳平. ?~BC178)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에서 한신(韓信. ?~BC196)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진영(陣營)은 군사가 격감한 데다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四面楚歌)’ 소리가 들려오니 말이다. 초나라 군사들은 그리운 고향 노랫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심리 작전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항우는 깜짝 놀랐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들이 많은고?’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을 베풀었다. 항우는 우희가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해하의 노래(垓下歌)>를 읊고 또 읊었다. 우희도 이별의 슬픔에 목메어 화답했다. 역발산을 자처하는 천하장사 항우의 뺨에는 어느덧 몇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좌우에 배석한 장수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우희는 마침내 항우의 보검을 뽑아 젖가슴에 꽂아 자결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미인들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에 걸맞게 나라를 망하게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데 비해, 우미인은 절개를 지키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한 보기 드문 경우였다. 항우는 역사의 승부에서는 유방에게 졌지만, 여자 보는 눈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한편 <소설 십팔사략(진순신 지음)>에 우희의 마지막을 묘사한 대목이 있어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항우는 자작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읊조렸다. 우희도 옆에서 그것을 따라 읊었다. 그 후 우희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사(正史)는 역사의 동향과 관계가 없는 한 여자의 운명을 그다지 상세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다만 <초한춘추(楚漢春秋)>라는 책에 항우의 시에 대한 답가를 싣고 있을 뿐이다.

 

漢兵已略地 (한병이약지)  한나라 군대 이미 영토를 점령했고

四方楚歌聲 (사방초가성)  사방에 들리는 것은 초나라의 노래 소리뿐.

大王義氣盡 (대왕의기진)  대왕의 기개가 다했는데

賤妾何聊生 (천첩하료생)  천첩이 어찌 살기를 바라오리까!

 

우희는 항우가 자신 때문에 번뇌하지 않도록 이 노래를 읊고 나서 검을 청해 받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한다. 한편 항우가 쉽게 검을 주지 않자, 자신도 포위를 뚫고 따라 가겠으니 검을 달라고 했다고도 한다. 혹은 항우가 자신의 번뇌를 끊고자 우희의 목을 쳤다는 말도 전해진다.

 

역대 중국의 미인들 가운데서도 우희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항우와의 마지막 장면을 빼고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니 미인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도 없고, 그녀에 대한 비난도 없다. 흔히 패자는 포악하고, 패자의 여자는 표독스럽다고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자신을 총애했던 남자를 망치게 했다는 욕을 얻어먹는 것이 대부분인데, 유독 우희에게는 나쁜 소문이 없는 것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우희의 가족에 대한 비난도 없다. 과문(寡聞)해서인지 몰라도 우희의 가족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항우가 서른 살에 죽었다면 우희는 그보다 몇 살 아래였을텐데, 젊은 여자치고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내조를 잘했든지, 성품이 조용했던 모양이다. 항우가 유방을 이겨서 우희가 황후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방의 부인 여태후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설치더니, 나중에 남편이 죽자, 남편의 애첩을 잔인하게 죽이고, 자신의 친척들을 정치 일선에 내세우는 등 여장부다운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어쨌거나, 우희의 무덤에 한 떨기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우미인초(虞美人草 : 개양귀비)’라 했으며, 당송 팔대가 중 한 사람인 증공(曾鞏.1019~1083)은 우희를 주제로 시를 남겼으니, 우희는 이래저래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우희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별로 없어 아쉬운 마음을 증공의 <우미인초>일부를 소개하면서 달래본다.

 

三軍散盡旌旗倒 (삼군산진정기도)  삼군은 흩어지고 깃발은 꺾이었으니

玉帳佳人坐中老 (옥장가인좌중로)  옥 장막의 아리따운 여인 앉은 채 늙었네.

香魂夜逐劍光飛 (향혼야축검광비)  향기로운 혼이 밤중에 검광을 쫓아 날아가니

靑血化爲原上草 (청혈화위원상초)  푸른 피는 들녘의 풀이 되었네.

芳心寂寞寄寒枝 (방심적막기한지)  미인의 꽃다운 마음 성긴 가지에 깃들었는데

舊曲聞來似斂眉 (구곡문래사렴미)  옛 노래 들려오니 눈썹을 찡그린 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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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관자 - 깊이 생각하고 빨리 결정하라
류예 지음, 하진이 옮김 / 미래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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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과 교류할 때 거짓이 많고 진심이 없으며 모든 것을 사사로이 취하려는 것을 까마귀 떼의 사귐이라고 한다. 잔머리를 굴려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직스러울지언정 진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낫다.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타인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며 상쾌한 느낌을 주어 호감을 느끼게 만든다.

 

與人交(여인교), 多詐僞無情實(다사위무정실), 偸取一切(투취일절), 謂之烏集之交(위지오집지교)                                                                                                <관자. 형세해>

 

 

관중은 사람과 교류할 때 거짓이 많고 진심이 없으며 모든 것을 사사로이 취하려는 것은 까마귀 떼의 사귐이다.”라고 했다. 까마귀 떼의 사귐은 처음에는 서로 친하다가 나중엔 사이가 틀어지고 반목하기 일쑤다. 그래서 까마귀 떼의 사귐은 겉으로 대단히 우호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결코 친밀하지 않는 사이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까마귀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새가 아니다. 울음소리는 자극적이고 투박하며,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다니며 먹잇감을 찾는다. 얼핏 보기에는 단결력이 뛰어난 것 같아도 막상 먹잇감을 눈앞에 두면 이들은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물어뜯으며 다툰다.

 

관중은 이러한 까마귀를 예로 들어 순전히 이익만 추구하며 이합집산하는 사람들의 교류를 풍자했고, 이러한 우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람들과 교류할 때는 반드시 진심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며,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진심어린 사람은 거짓으로 일을 꾸미거나 교묘하게 머리를 굴려 사람을 대하지 않을 뿐더러, 속이고 기만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진심어린 마음을 품는다. 그들은 오직 진실한 사랑만이 온통 고독과 좌절에 빠져버린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고, 진심어린 관심과 도움만이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며, 진심어린 마음만이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진심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여유롭고, 화목하고,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며 사람들 간에 관심과 이해를 돈독하게 해준다.

 

진심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진심어린 대접을 받을 수 없다. 무릇 진심으로 감동시킨 사람만이 진심어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타인에게 진심어린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

  

누군가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는 것에 회의적일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대해도 상대방에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지 않아서 괜히 손해 보면 어떡하나, 혹은 나만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위선적이고 교활하며 나쁜 속셈으로 타인의 진실한 마음을 농락하는 사람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타인의 순수한 마음을 악용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물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의 비열한 진면목이 폭로될 때에는 반드시 사회 구성원들에게 질시와 배척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량함과 진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우롱 당해도 결과적으로 크게 손해를 보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당신을 해하려는 사람은 당신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아 결국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실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항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진심어린 관심을 베풀면 된다. 가령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우울해하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위선과 기만에서 멀어지면서 차츰 진심어린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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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집 - 동양고전총서 10
제갈량 / 홍익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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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공명의 중원 회복 전략은 촉과 형주, 두 방면에서 관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주를 잃은 뒤로는 촉으로부터 북쪽 방면으로 정벌하는 방법밖에는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릉전투(夷陵戰鬪. 222년)에서 패배한 후, 오와 국교를 회복한 것이나 남중(南中)을 평정하려 했던 것도 이를 위한 준비였다. 남중 평정 작전의 결과, 군수 물자를 상납 받게 된 덕분에 국가의 재정이 풍요로워지자 공명은 군사를 훈련하고 대대적인 공격에 나설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촉의 상대는 중국 대륙의 북쪽 절반을 손에 넣고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위나라였다. 쉽사리 싸움을 걸 수 있는 호락호락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촉 땅은 험악한 산지로 둘러싸여 수비하기는 쉬웠지만, 공격하기에는 군대의 진군이나 군량미 보급 등에 어려움이 많아, 중원 토벌에 나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229년 5월 위나라의 문제(文帝) 조비(曹丕. 재위220~226)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曹叡 . 재위226~239)가 22세로 즉위했다. 오나라 손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차례에 걸쳐 공격했지만 격퇴 당했다.

 

공명은 이러한 동쪽의 정세를 주시하면서 227년 3월에 북방 정벌군을 한중(漢中)으로 옮겼다. 이 때 후주(後主) 유선은 아직 20세로 모든 정치를 공명에게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공명은 출발에 앞서 여러 신하에게 조정의 정무처리 및 승상부 사무 처리를 맡겼다. 이렇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의 업무를 위임한 공명은 출전에 즈음한 상주문(上奏文), 이른바 <출사표(出師表)>를 유선에게 올렸다.

 

선제(先帝 : 유비)께서는 창업의 뜻을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삼분되어 있으며 익주는 피폐해져 있어, 진실로 우리의 흥망을 다투는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폐하를 모시는 신하들은 궁궐 안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실한 장수들은 궁궐 밖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도 잊은 채 돕고 있습니다. 이는 선제께서 내려주신 각별한 은총을 추모하며 폐하께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뜻입니다. 폐하께서는 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뜻있는 신하들의 기개를 격려하셔야 할 것입니다. 공연히 스스로를 비하하는 경솔한 언행으로 충신들의 간언을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궁중과 정부가 함께 일치하여 상과 벌을 주는 일에 불공평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간사한 짓을 하거나 법률을 어긴 자, 또는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응당 담당 관청에 넘겨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평한 정치를 널리 알리셔야 합니다.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 안팎으로 법률이 달라져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공명은 <출사표>의 첫머리에서 어린 유선에게 황제의 소양을 조목조목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이어서 자신이 북방 정벌에 임하는 동안의 업무 처리를 맡긴 신하들의 성향이나 장점을 상세히 설명한 뒤 다시 글을 이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이것이 전한(前漢)이 흥성한 원인이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 이것이 후한(後漢)이 쇠퇴하여 멸망한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항상 신과 함께 이 일을 논의하시며, 일찍이 후한 말의 환제(桓帝 .재위146~167)와 영제(靈帝. 재위167~189)가 소인을 가까이 하여 나라를 쇠퇴의 길로 이끌었던 일을 탄식하고 통탄하셨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의 벼슬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성실하고 선량하며 절개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신하들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가까이하여 믿으시면 한(漢) 황실의 융성은 날로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공명은 되풀이하여 제왕학(帝王學)을 강조한 다음, 북방 정벌에 대한 자신의 결의를 서술한다. 이것이 바로 후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출전이 된 대목이다.

 

신은 본래 한낱 평민의 신분으로 남양(南陽)에서 직접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고 있었을 뿐, 제후(諸侯)에게 가서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굽히시어 세 번씩이나 신의 초려(草廬)를 찾아오셔서 저에게 당대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신은 감격하여 선제를 위하여 몸 바쳐 일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후에 형주가 함락되고 당양(當陽)전투에서 패전하여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신이 군사(軍師)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은 지도 벌써 21년이 흘렀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신중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임종할 때 신에게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선제의 명령을 받은 이래로 신은 밤낮없이 걱정하고 탄식하며 선제께서 맡기신 일에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 행여나 선제의 명철함에 손상을 입히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노수(瀘水. 현재의 금사강)를 건너 불모의 땅 남방(南方)으로 깊숙이 원정을 나섰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군대와 무기도 풍족하므로 마땅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中原)을 평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우둔한 재능을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을 물리쳐 한(漢) 황실을 부흥시켜 옛 도읍지(洛陽)로 돌아가는 일뿐입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명에게 중원 회복과 한(漢)황실의 부흥은 지상 명령과도 같았다.

 

신은 큰 은혜를 받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멀리 떠나며 표(表)를 대하니-상주문(上奏文)을 앞에 두니-눈물이 흘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명은 눈물을 흘리며 상주문을 마무리하고 유선에게 올린 다음, 20만의 정벌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공명의 첫 북방 정벌은 228년 봄에 시작되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그 해 겨울 2차 북방 정벌을 결행하게 된다. 공명은 이때도 상주문을 올렸는데, 이를 <후 출사표(後出師表)>라고 한다. 이 <후 출사표>는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글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이 <후 출사표>에는 만년에 접어든 공명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동시에 <전 출사표>에 견줄 만한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당시 삼국의 상황이 간결하게 잘 나타나 있다. 결국 두 차례 북방 정벌은 다 실패로 끝이 나고, 공명은 54세로, 유비의 부름을 받아 그의 군사가 된지 27년째 되는 해에 천하통일의 꿈을 펴지 못한 채 오장원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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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 - 완역 제갈량문집
제갈량 지음, 장주 엮음, 조희천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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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위, 오, 촉의 형세는 대략 6:3:1이나 7:2:1 정도라 역사가는 평가합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촉나라를 약 40년간 지켜낸 것도 제갈공명의 지혜와 탁월한 병법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유비가 죽은 후에도 그 유지를 받들어 오로지 촉(蜀)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충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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