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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엽의 오월춘추 ㅣ 고담총서 11
조엽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1월
평점 :
서시(西施)는 춘추시대 월(越)나라 미인으로, 월왕 구천(句踐or勾踐.재위 BC496∼BC465)이 오(吳)나라에게 패한 뒤 미인계(美人計)로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재위BC496-BC473)에게 보내니, 부차는 서시에게 푹 빠져서 고소대(姑蘇臺)를 짓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결국 구천에게 패망했다.
오․월의 처절한 승부는 마치 극적인 반전(反轉) 드라마와도 같다. 그러기에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서시빈목(西施矉目) 등의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자, 두 나라의 길고 긴 부침(浮沈)의 유전(流轉)을 따라가 보자.
오왕(吳王) 합려(闔閭.재위 BC515~BC496)는 쿠데타로 왕이 된 뒤 오자서(伍子胥. ?~BC
485)와 손무(孫武. 생몰미상) 등의 계책을 채용하여 서쪽으로는 패자로서 이름을 떨치던 초나라를 격파하고, 북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제압했으며, 남으로는 월나라를 정복하여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니, 합려를 춘추 오패의 하나로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한편 월나라 윤상(允常. ?~BC496) 대(代)에 이르러 흩어져 있던 월나라 계통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마침내 나라의 체통을 갖출 만큼 세력을 형성한 뒤 오나라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윤상이 죽자 구천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오왕 부차와 긴 세월-기원전 473에 오나라가 멸망하니 무려 24년-동안 패권을 다툰 월왕 구천이다.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합려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침공했다. 국상(國喪)이 난 나라를 친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는 오자서의 반대를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합려는 구천의 계략에 말려 전투에서 패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그 부상이 악화되어 회생하지 못했다. 임종이 가까워진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말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네 아비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를 갈았다. 그는 섶나무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잤으며(臥薪), 자기 방에 드나드는 신하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유언을 한 번씩 외게 함으로써 항상 마음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3년이 지니지 않아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보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구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구천은 오나라의 공격을 받기 전에 먼저 치기로 했다. 그러자 대신 범려(笵蠡. BC517~?)가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부차를 우습게 본 구천은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출전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군은 호랑이같이 사나워 월나라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구천은 패잔병 5천명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 )으로 퇴각했으나, 부차가 물러나지 않고 쫓아와 월군을 포위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구천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너무 경솔하여 이 치욕을 당하는구나!”
구천은 땅을 치고 싶을 만큼 후회가 되었다. 사지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범려의 충언대로 대부(大夫) 문종(文種. ?~BC472)을 강화사절로 보냈다. 그리하여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주는 한편, 월나라를 송두리째 오나라에 맡기고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되고 아내는 오왕의 첩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요청했다. 부차는 처음에 아버지의 원수인 구천을 멸하려 했으나, 뇌물을 받은 백비의 의견에 따라 허락할 뜻을 보였다. 그러자 오자서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구천을 없애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구천은 훌륭한 군주이며 범려와 문종 같은 훌륭한 신하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반드시 훗날 우환(憂患)이 될 것입니다.”라는 진언이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부차는 구천을 용서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국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구천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치욕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오나라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난 뒤 구천은 겨우 월나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구천은 곁에 항상 짐승 쓸개를 놓아두고 그 쓴맛을 핥으며(嘗膽)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는 바로 부차와 구천이 각기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낸 데서 유래한 것이다.
구천은 몸소 밭을 갈고 부인도 옷감을 짰으며,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졌다. 구천은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빈객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백성들과 그 아픔을 같이 했다. 구천은 회계산에서 돌아온 뒤 7년 동안 백성들을 편안케 했으며, 백성들도 구천의 은혜에 감격하여 오나라로 갈 원정군에 종군하기를 원했다. 복수심에 불타던 구천이 오나라 정벌을 말하자, 신하들이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만류했다.
한편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게 항복을 받은 지 5년 후에 군대를 일으켜 제(齊)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오자서가 반대하고 나섰다. “제가 듣기로 구천은 맛있는 음식을 삼가고 쓸개를 맛보면서 오직 보복할 기회만을 노리고, 소박한 생활을 하며 백성과 고락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구천이 살아있는 한 오나라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있어 뱃속의 질병과 같습니다. 어느 병을 먼저 치료해야 하겠습니까? 제나라 공격을 뒤로 미루고 월나라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부차는 근신하고 있는 월나라를 친다는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까지 크게 무찌르고 귀국했다. 그러고는 오자서를 불러 큰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나 오자서가 크게 기뻐할 일이 못 된다는 표정을 짓자, 부차는 진노하며 오자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4년이 지난 뒤 부차는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때 구천은 자진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돕는 한편 갖은 보물을 뇌물로 바쳤다. 문종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부차에게 미인계를 쓰자고 진언했다. 이리하여 수많은 미인 가운데서 뽑힌 두 여인이 서시와 정단(鄭旦)이었다. 서시(西施)는 저라산(苧蘿山) 밑에 사는 나무꾼의 딸이었다. 원래 저라산에는 동촌(東村)과 서촌(西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시씨(施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두 미인은 다 서촌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 중 하나를 서시라고 하고, 다른 미인도 출신이 같았기 때문에 서시와 구별하기 위해 정단이라 했다.
구천은 토성(土城) 땅으로 두 미인을 보내어 필요한 범절을 배우게 했다. 토성에서는 늙은 학사(學士)들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두 미인에게 노래와 춤, 화장법과 걸음걸이까지 가르쳤다. 두 미녀는 그곳에서 3년 동안 갖은 재주를 다 배웠다. 그녀들이 주렴을 드리운 아름다운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면 천지가 향기로 가득 차는 듯했다. 여기서 서시의 아름다움에 얽힌 속담을 알아보자. 서시빈목(西施矉目)은 서시가 속병이 있어 눈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마을의 못난 여자들이 눈을 찌푸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줄 알고, 자기도 눈을 찌푸리니 더욱 못나게 보였다는 고사(故事)에서,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이다.
마침내 승상 범려는 서시와 정단을 데리고 부차에게 바치려고 오나라로 갔다. 범려가 오나라 궁궐에서 들어가서 부차에게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구천의 말을 전했다.
“동해의 천신(賤臣) 구천은 태산(泰山) 같은 성은을 입으면서도 친히 대왕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 한(恨)입니다. 그래서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인 둘을 뽑아서 대왕께 보내오니 좌우에 두고 부리시기 바랍니다.”
부차가 굽어보니 보통 여인들이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 천상의 선녀 한 쌍이 하강한 듯했다. 부차는 그만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넋을 빼앗겼다. 그 때 곁에 있던 오자서가 간했다.
“신이 듣건대, 하나라는 말희 때문에 망했고, 은나라는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는 포사 때문에 혼란했다고 합니다. 무릇 아름다운 여인은 나라를 망치는 요물입니다. 왕께서는 저 두 여인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요. 그런데 구천은 저런 미인을 자기 곁에 두지 않고 과인에게 바쳤으니 그 충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소. 승상은 과도히 남을 의심하지 마오.” 그 후로 부차는 천하일색인 서시와 정단을 총애했다. 그러나 요염하고 비위를 잘 맞추기는 정단보다는 서시가 월등했다. 그리하여 서시는 노래와 춤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서시는 고소대(姑蘇臺)에 거처하면서 부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서시가 출입할 때는 그 거동이 왕후(王后)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정단은 오나라 궁에 거처하며 서시를 질투하다 병이 나서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구천은 부차가 서시를 총애하여 밤낮없이 즐긴다는 정보를 듣고 다시 문종과 상의했다. 문종은 오나라에서 곡식을 꾸어옴으로써, 오나라의 실정을 파악하겠다는 계략을 세웠다. 문종은 오나라로 가서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매사를 잘 주선해달라고 청했다. 백비의 주선으로 기회를 얻은 문종은 부차를 설득했다. 그러자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나라에 곡식을 보내 주었다. 이에 오자서는 깊이 탄식했다.
‘아, 임금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시니 3년이 못 가 오나라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이후에도 부차는 내정을 돌보지 않고 오직 명예욕과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를 공격하는데 바빴다. 부차가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오자서가 또 반대했다.
“제나라는 점령해본들 자갈밭과 같아서 쓸모가 없습니다. 제나라보다 월나라를 치는 일이 더 급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사신으로 삼아 제나라에 다녀오도록 명령했다. 오자서는 제나라에 갈 때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되돌아올 때 아들에게, “이제 오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고는 제나라의 대부 포씨(鮑氏)에게 아들을 맡기고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자서를 모함하는 데 혈안이었던 백비는 이 사실을 알고는, ”제나라에 아들을 맡기고 온 오자서는 이미 오나라를 섬길 마음이 없는 자입니다.“라고 부차에게 참소했다. 오왕은 어리석게도 백비의 말만 믿고 사자를 시켜 촉루지검을 주며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반드시 내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다오. 내 시체로 그 나무를 길러 왕(부차)의 관을 만들게 하겠다. 그리고 내 눈을 빼내어 오나라의 동쪽 관문을 걸어 놓아라. 그 문 위에서 월나라 도적들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오자서가 유언을 마치고 자결하니, 오왕 부차가 즉위한 지 11년째의 일이었다.(기원전 485년). 오자서의 유언을 전해들은 부차는 크게 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 후 오나라 사람들은 오자서를 가엾이 여겨 강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胥山)이라고 했다.
한편 오자서가 죽은 해에 제나라에서는 실권자 전씨(田氏) 일족이 임금인 도공(悼公. 재위 BC489~BC485)을 죽이고 나이어린 간공(簡公. BC485~BC481)을 세웠다. 부차는 이를 핑계 삼아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2년 후 부차는 노(魯)나라 왕과 위(衛)나라 왕을 탁고(橐皐)에 불러 모아 회맹했으며, 이듬해에는 북쪽으로 올라가 제후들을 황지(黃池)에 모아 회맹했다. 일개 오랑캐 추장에 지나지 않았던 오왕이 마침내 중원의 제후와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패자(覇者)의 기쁨도 한순간이었다. 월나라가 이 틈을 이용하여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모두 부차를 따라가고 국내에는 태자와 함께 노약자들만 머무르고 있었다. 구천으로서는 십 수 년을 벼르고 벼른 복수전이었다.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군대를 쉽게 격파하고 태자를 잡아 죽였다. 부차는 즉시 월나라로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구천과 범려는 의논 끝에 강화를 수락했다. 오나라의 북벌군이 돌아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천은 휴전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오나라의 멸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휴전 후 월나라는 계속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나, 오나라는 이미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고갈되고 병력 손실도 너무나 컸다.
그로부터 4년 후 부차는 총공격령을 내려 오나라에 다시 쳐들어왔다. 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 수도를 포위했다. 마침내 제후의 맹주로서 천하에 위엄을 떨쳤던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기원전 473년) 구천은 부차를 불쌍히 여겨 살려주고자 했으나, 부차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할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부차는 “죽어서도 충신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겠다.”라며 얼굴을 헝겊으로 덮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후하게 장례지내 주었으며, 간신 백비는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여 주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