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 상
김성한 지음 / 달궁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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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의 출생에 얽힌 비밀은 아직도 베일에 감춰져 있다. 과연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설이 분분하다. 따라서 다음의 설명도 하나의 설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여불위(呂不韋. ?~BC235)는 한()나라 수도 양책(陽翟)양적이라고도 함-의 대상인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값이 쌀 때 물건을 사놓았다가, 시기를 보아 비쌀 때 비싼 값으로 파는 방법으로 천금(千金)을 모았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견문이 넓었으며, 모든 일에 감식안이 비상했다.

  

()나라는 소양왕(昭襄王)40(기원전 267), 태자가 죽고 2년 후에 그의 차남인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의 총애를 받는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20여 명의 아들 가운데 이인(異人=子楚=莊襄王은 동일인물)은 생모 하희(夏姬)가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받아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인은 사랑받지 못하는 첩의 자식인데다 인질이었기 때문에 매우 곤궁한 생활을 했다. 더구나 조국이 진()이 조나라를 자주 공격했기 때문에 인질로 간 이인(異人)에 대한 냉대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럴 즈음 여불위는 이인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기화(奇貨)이다. 구해놓고 보자. 옛말에도 기화가거(奇貨可居 : 진기한 물건은 사서 잘 보관 해 두면 장차 큰 이득을 본다.)라고 했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여불위는 이인을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돕겠다고 말했다. “지금 진나라 왕은 연세가 많고 태자는 공자의 아버지 안국군이십니다. 안국군께서는 화양부인을 총애하고 계신데 그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실 안국군의 후계를 정하는 데는 화양부인의 힘이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아버님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안국군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후계를 정하게 될 텐데 항상 안국군 곁에 있는 큰 형님이나 다른 형제분에 비해 공자께서는 훨씬 불리한 입장일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공자께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아버님에게 선물을 보내기는 고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교제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저도 별로 여유는 없습니다만, 이제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 1천금을 털어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공자를 후계자로 삼도록 공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인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공하면 진나라의 반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여불위는 5백금을 이인에게 교제비로 주고, 나머지 5백금으로는 조나라의 진귀한 물건들을 사 가지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는 즉시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여불위가 장사 일로 몇 번 만나 선물도 많이 바친 인연이 있었다. 선물로 사온 물건을 모두 바치면서 넌지시 떠 보았다. “지금 조나라에 계신 이인 왕자님은 각국의 유명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여 그 명성이 날로 높아 가는 총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항상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존경한다. 아버님과 부인을 사모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화양부인의 언니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불위는 다음과 같이 화양부인에게 말씀드리라고 일러두었다. “‘()으로 남을 섬기는 자는 색이 쇠하면 사랑도 잃는다.’라고 합니다. 지금은 태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후사(後嗣)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총명하고 효심이 두터운 왕자를 골라 태자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태자가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고, 설령 태자에게 일이 생겨도 양자가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권세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영원한 이로움을 얻는다고 합니다. 젊을 때 발판을 튼튼히 해둬야지 색향(色香)이 쇠하고 총애를 잃은 뒤에는 이미 늦습니다. 이인 왕자는 총명한 분입니다. 그는 형제들 순서로 보아도 그렇고, 생모의 순위를 보더라도 후계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므로, 그를 양자로 삼고 후계로 정한다면 당신을 끝까지 섬길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화양부인은 과연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얼마 후 화양부인은 안국군에게 이인이 총명하며, 또 그와 교제하는 많은 제후가 얼마나 그를 칭찬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그 설명은 여불위가 일러준 그대로였다. 화양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다행히도 태자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인을 후계자로 정하여 저의 장래를 맡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안국군은 그 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안국군과 화양부인은 부모로서 지극한 정성을 담아 여불위 편에 이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서 이인을 잘 돌봐주도록 부탁까지 했다. 이로써 여불위는 정식으로 이인의 보좌관이 된 것이었다. 한단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모든 상황을 이인에게 설명하고, 이를 전해들은 이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었다. ()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다. 이때부터 자초라는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호상(豪商) 여불위는 여러 나라의 수도에 저택을 지어, 그곳을 영업 지점의 기능을 갖춘 거점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한단의 저택은 초호화 저택이었다. 당시 여불위에게는 조희(趙姬)라는 애첩이 있었는데, 그녀는 한단 제일의 요염한 무희 출신 미녀였다.

  

어느 날 여불위의 집에 초대된 자초는 첫눈에 조희에게 반해버렸다. 자초는 축배를 들자마자 그 여자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순간 여불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고일설에는 여불위가 조희를 설득해서 자초에게 보내기로 하고 둘이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는데 그날 잉태했다고도 한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초의 청을 거절하면 전 재산을 털어 투자한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결국 조희는 임신한 사실을 숨긴 채 자초의 품으로 갔다. 과연 몇 달 뒤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그 아이가 정()이었다. 후에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이다. 처음으로 자식을 본 자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자초가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것도 잠시, 진나라 백기(白起) 장군이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격파하고, 뒤이어 한단을 포위했다. 이때 자초는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몰렸지만, 여불위가 뇌물로 감시관을 매수하여 자초와 조희 모자의 탈출을 도왔다.

 

자초가 진의 수도 함양에 돌아온 뒤의 세월 또한 인고(忍苦)의 나날이었다 많은 이복형제는 서로 후계자가 되려고 혈안이었는데, 자초는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6년이 흐른 뒤 소양왕 56(기원전 251) 소양왕은 노령으로 죽고, 안국군이 즉위효문왕(孝文王. 기원전 251~기원전250)했다. 이로써 자초는 당당하게 함양궁에 들어가 정해진 대로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어선 효문왕은 즉위 1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莊襄王. 기원전 250~247)이 되었다.

  

자동으로 조희는 조비(趙妃), 정은 태자가 되었으며, 화양부인은 화양 태후(太后)로 모셔졌다. 장양왕은 별 볼일 없던 자신을 기화로 인정하여 많은 돈을 들여 뒷바라지하고 몇 번씩이나 목숨을 구해주고 마침내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일들 일등공신 여불위를 칭송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문신후(文信侯)의 칭호와 낙양(洛陽) 10만호의 식읍을 하사함과 동시에 승상(丞相)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인고의 생활이 너무 길었던지 장양왕 역시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드디어 태자 정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겨우 열 세 살이었다. 여불위는 권력을 장악하여 승상보다 높은 상국(相國)에 올랐으며, 중부(仲父 : 옛날에는 ()’가 인명, 지명으로 쓰일 때 로 읽었음.)의 존칭을 하사받아 천하를 호령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중부(仲父)는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백부(伯父)이외에 아버지의 형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에서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제나라 환공(桓公. 기원전685~기원전 643)이 관중(管仲. ?~기원전 645)을 예우해서 부르던 명칭에서 유래하며, 이 경우 발음을 중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보다 앞선 예가 있는데, ()나라 무왕(武王)이 태공망(太公望)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상보도 임금이 특별한 대우로 신하에게 내리는 칭호의 한 가지로, 무왕이 주나라 창업에 공이 많은 태공망을 예외적으로 대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처럼 로 발음될 때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쓰이는 경우이며, 뜻은 ()’와 같다.

  

여불위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의 춘신군(春申君), ()의 신릉군(信陵君), ()의 맹상군(孟嘗君), ()의 평원군(平原君) 등 전국(戰國) 사공자(四公子)를 모방하여 각자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난 인사를 3천 명이나 거느리기에 이르렀다. 이들 인사의 학식과 기능을 한데 모은 것이 후세에 전하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선진(先秦)시대의 여러 학설과 사실(史實), 설화(說話) 등을 모아 편찬했으며, 26권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백과전서라 할 수 있다. 여불위가 이 책에 대해 갖는 자신감은 함양의 성문에 내건 다음과 같은 푯말로도 알 수 있다. <만약 전 26권 가운데 한 군데라도 첨삭을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1천금을 주겠다.>

  

한편 장양왕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무렵, 여불위는 문병을 가는 길에 옛날 애첩이었던 자초의 아내, 즉 왕비 조비에게 아직 사모하고 있다는 연애편지를 건넸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뜨거워졌고, 장양왕이 죽자 여불위는 태후가 된 옛 애인의 거처를 수시로 찾아갔다. 태후는 옛날보다 더욱 풍만하고 관능적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여불위가 한번 오면 반드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갈 정도였다.

  

진왕 정이 다 성장한 후에도 두 사람의 통정(通情)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남자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사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시황제가 성장함에 다라 여불위의 불안감도 커졌다. 태후와의 관계가 들통 나는 날이면, 자신의 파멸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온갖 정성과 공을 들여 쌓아놓은 자신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불위는 그만 만나고 싶었지만 태후가 놓아주지 않았다. 여불위는 고심 끝에 거대한 남근(男根)을 가진 노애(嫪毐)라는 자를 식객(食客)으로 들였다. 그리하여 잔치가 벌어지면 노애의 물건에 오동나무 바퀴를 달아서 그것을 굴리도록 시켰다. 소문을 내서 태후의 관심을 끌려는 계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후로부터 그 남자를 손에 넣고 싶다는 내밀한 부탁이 왔다. 여불위는 미리 궁리해놓은 계획대로 노애를 궁형(宮刑)을 받은 새로운 환관으로 가장시켜서 궁으로 들여보냈다. 노애는 진짜 환관처럼 보이기 위해 수염도 눈썹도 다 뽑아야 했다. 태후와 노애는 천정배필(天定配匹)인 듯했다. 남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태후는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인 노애를 만나 그야말로 환락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었다.

  

노애 또한 타고난 정력을 발산할 길이 없던 차에 태후를 만나자 날 새는 줄 모르고 즐겼다. 노애는 정력 하나로 동네 거렁뱅이에서 일약 태후를 휘두르는 남자가 되어 임도 보고 뽕도 따게 되었다. 그렇게 밤낮 없이 즐기던 태후는 그만 애까지 임신하게 되었다. 여불위는 그 소식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으나 이내 대책을 강구해냈다. 그는 진왕에게 상주(上奏)하여 점괘에 따른다는 명목으로, 태후의 궁전을 함양에서 서쪽으로 100km나 떨어진 옹()땅에 지어 태후와 노애를 이주시켰다. 진왕 정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아예 터놓고 즐겼다. 노애는 태후의 추천으로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졌으며, 하인이 수천 명에 식객만도 천 명이 넘었다. 노애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태후는 옹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진왕 9(기원전 238), 고발장 하나가 접수되었다. <노애가 환관이라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태후와 몰래 관계를 가져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더구나 왕이 돌아가시면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진왕 정은 즉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자 여불위가 이 일에 관여한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왕 정에게 모든 사실이 알려졌음을 안 노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옹의 궁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강력한 진나라 정규군의 상대는 아니었다. 노애는 산 채로 손과 발이 오라에 묶여 거열형(車裂刑 )에 처해졌으며, 노애의 친족들은 물론 태후가 낳은 두 아들도 참수되었다. 진왕은 여불위도 죽여 버릴 작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라의 큰 공신인 데다 여러 대신과 유세객들이 그를 변호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 조 태후는 궁중의 한적한 곳에 연금시키고, 여불위는 상국의 지위를 박탈하여 하남(河南) 지방의 소제후로 봉하여 추방했다.

 

그러나 여불위의 명성은 여전했으며, 제후들과 호상, 빈객이 여불위를 만나기 위해 날마다 줄을 이었다. 이에 여불위의 모반을 두려워한 진왕은 <귀공께서는 무슨 공적이 있어 하남 땅을 가지게 되었으며, 10만호의 영지를 받았는가? 또 진나라와 어떤 혈연관계가 있어 중보(仲父)로 행세하는가? 즉시 일가를 이끌고 촉()으로 옮겨 살 것을 바라노라.>라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여불위는 이러다가 끝내 주살(誅殺)되고 말 것이다. 치욕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하고는 독배(毒杯)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왕 12(기원전235)의 일이었다. 진왕은 여불위의 장례 행렬에서 슬피 운 자들을 잡아 모두 처형시켰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기원전 221, 진왕은 나머지 6국을 모두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중국 통일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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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5-10-1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는 시황제를 장양왕(이인, 자초)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고, 사기열전(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와 조희 사이에 태어난 여불위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여불위의 역작 ‘여씨춘추’에서도 시황제를 자신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어 아직까지 누구의 아들인지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진실로 여불위의 아들이라면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될 지도 모르겠다.
 
빅데이터 전쟁 - 글로벌 빅데이터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
박형준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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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서비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요즘, 빅데이터의 중요성은 매우 커지고 있다. 데이터 분석에 의한 경쟁력 강화 및 서비스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빅데이터의 활용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키가 되고 있다. 이 책은 빅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 자세하게 안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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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 소설보다 재미있는 평단 Great Classic 3
사마천 지음, 김민수 엮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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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於易水送人(역수에서 이별하며)

 

                             낙빈왕(駱賓王.640~684)

 

此地別燕丹 (차지별연단)  여기에서 연나라 단과 이별할 때

壯士髮衝冠 (장사발충관)  장사의 머리털이 관을 뜷었네.

昔時人已沒 (석시인이몰)  옛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今日水猶寒 (금일수유한)  오늘도 역수는 여전히 차구나.

 

 

이런 시는 사전 지식 없이 읽으면 별 감흥이 없다. 현대시든 한시든 대충 읽어도 느낌이 전해오는 시가 있고, 그 배경을 모르면 감동은커녕 작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시도 있다. 이 시는 아주 간결하지만 시대의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게다가 그 배경이란 것도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고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BC221~BC206)나라와 그 통일대업을 이룩한 진시황(秦始皇)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2,200여 년 전 광활한 중국 대륙이, 그 대륙에서 일어난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먼저 태자 연과 형가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때는 전국시대(戰國時代. BC403~BC221) 말기였다. 초기에는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 해서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진(秦) 등 7개국의 세력이 서로 엇비슷해서 호각을 이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쪽 변방에 있던 진나라가 점차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 소진(蘇秦. ?~BC317)과 장의(張儀. ?~BC309)의 ‘합종연횡책(合縱連橫策)’이 시대를 풍미했다. 진을 제외한 여섯 나라가 연대를 맺어 진을 견제하는 합종책(合縱策)이 시들해지자, 진이 한 나라씩 맹약(盟約)을 맺어 여섯 나라의 연대를 깨고자 연횡책(連橫策)이 등장했다. 이것은 강국 진나라와 나머지 약소 6개국이 빚어낸 시대적 산물이었다. 진왕(秦王) 영정(嬴政)은 정권을 잡은 후,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책략으로 점점 각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진은 맨 처음 한(韓)나라를 멸망시킨(기원전230)뒤, 조나라도 집어삼키고(기원전 228) 연나라를 세 번째 대상으로 정했다.

 

한편 진나라 군대가 진격해오자, 그 위세에 눌린 연나라 조정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진나라의 공격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보자는 주화파(主和派)의 목소리가 커졌다. 소수파인 주전파(主戰派)의 우두머리는 태자(太子) 단(丹)이었다. 단은 아버지 연왕(燕王) 희(喜. 기원전 255~기원전 222)를 대신해서 연나라의 정치, 외교를 담당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그는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것보다 먼저 영정의 목을 치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십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단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라 간에 서로 인질을 주고받음으로써 살얼음판 같은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 흔했다.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진나라 공자(公子) 자초(子楚)가 조희(趙姬)와 사이에서 아들 영정을 얻었을 무렵, 태자 단도 연나라에서 조나라로 인질로 오게 되었다. 같은 처지였던 단은 아직 어린 아기인 정을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일설에는 나이가 비슷하고 처지도 비슷해서 죽마고우처럼 지냈다고도 한다.) 얼마 뒤 자초는 영정을 데리고 진나라로 도망갔고, 단도 연나라로 돌아왔다. 그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성인이 된 단은 약소국의 비애를 안고, 이번에는 진나라의 인질로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토록 귀여워했던 영정은 강대국 진나라의 왕이 되어 있었다. 외롭고 궁핍했던 시절, 영정과 함께한 시간은 비록 3년 정도였지만, 태자 단은 새삼 그 때의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면서 영정도 이번 만남을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 여린 사내의, 혼자만의 부푼 기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단에서 둘이 같이 지내며 단이 돌봐주던 시절 영정은 너무 어렸다. 또한 그 뒤로 흘러간 세월은 너무 오래되었으니 영정이 단과 함께 지낸 추억은커녕 단의 존재조차 기억하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당시 진나라는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인질을 데리고 왔으며, 청년 왕 영정은 천하 평정의 야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겠다는 그의 의지는 하늘을 찌를 듯해서 인질에 대해서도 매우 냉정하고 냉혹했다. 단이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도착했는데도 영정은 그를 만나보지도 않은 채 초라한 숙소에 쳐 넣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푸대접에 단은 크게 놀라고, 비참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약소국의 비애와 설움이 마구 솟구쳤고, 강대국에 대한 증오가 밀려오면서 진왕 영정에 대한 복수심이 일었다. 단의 성격이 외곬이어서 생각과 기대에 어긋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탓도 있었다.

 

진왕 영정 15년(기원전232), 단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조국인 연나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영정에게 보복하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그러나 강대국인 진나라를 공격하기에는 연나라의 군사력이 너무나 미약했다. 단이 온갖 궁리를 했지만 묘책을 세우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의 턱밑까지 밀어닥쳤다. 그 즈음 진나라의 명장 번오기(樊於期. ‘於(어)’는 인명으로 쓸 때는 ‘오’) 가 진왕 영정과의 불화로 연나라로 망명하자, 단은 순순히 그를 받아 주었다. 영정을 증오한다는 점에서 동지애를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 태부(太傅) 국무(鞠武)는 번오기의 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덩이를 끌어안는 위험한 짓이라며 반대했다. 나아가 진왕을 해치겠다는 계획이야말로 연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는 거사를 맡길 만한 인물을 추천했는데, 바로 전광(田光)이었다.

 

전광은 지략이 뛰어나고 사려가 깊으며, 지조 높은 청렴한 선비이자, 검술에서도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었다. 검술을 배우는 명문가의 자제들,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 협객(俠客)들에게도 존경을 받아 그의 도장(道場)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국무의 인도로 궁에 들어와 태자를 알현한 전광은 “저는 이미 나이 들어 대사를 맡기에는 역부족입니다.”라며 고사(固辭)하고는 대신 형가(荊軻)를 추천했다. 형가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대장부라는 것이었다. 단은 그 대장부를 하루 빨리 만나게 해달라면서, “ 이 일은 나라의 대사인지라 결코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그 순간, 전광의 얼굴빛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지는 것을 단은 눈치 채지 못했다.

 

형가는 본래 위(衛)나라 사람으로, 검술에 정통하고 책과 술을 좋아했다. 위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한 후 형가는 진나라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아 연나라로 도피했다. 협객 기질이 있었던 형가는 축(竺)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와도 통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마음을 나누는 술친구가 되어, 고점리가 축을 타면 형가는 그에 화답하여 자작(自作)한 시를 노래했다.

 

전광은 형가를 찾아가 대사를 맡아줄 것을 청했다 형가가 흔쾌히 승낙하자, 전광은 “태자 단이 이 일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므로 말이 새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면서 “내가 죽으면 일이 누설될 염려가 없을 것이오.”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가는 전광이 태자에게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반드시 대사를 이루어야 함을 죽음으로써 분발시킨 것임을 깨달았다. 형가는 진왕에게 접근하려면 먼저 그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진왕은 자신과 진나라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도망친 번오기에게 상금 천 냥을 걸 정도로 그를 죽이는 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형가는 번오기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지고 진왕을 만나볼 계략을 짜냈다. 이렇게 해야만 진왕이 비로소 자신을 접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단은 번오기를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그 계획에 반대할 것이 뻔했다. 형가는 스스로 번오기를 찾아가 자신이 온 뜻을 설명했다. 번오기도 진왕을 몹시 증오했기 때문에 형가가 진왕을 죽이는 것 역시 자신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리하여 형가는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가지고, 거짓으로 진왕에게 보물을 헌상한다고 둘러댄 뒤 진왕을 알현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형가는 머나먼 진나라로 떠나는 길, 거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그 눈물 어린 배웅의 장소가 바로 역수(易水)였다. 형가는 태자 단과 고점리의 처연한 전송을 받으며 자신의 결연한 심정을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장사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읊었다. 그때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형가의 머리털이 자신의 관을 뚫었을 것이다. 그렇듯 비장하게 읊은 형가는 유유히 수레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도를 진왕에게 헌상(獻上)했다. 진왕이 천천히 지도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다 펼치자 갑자기 비수(匕首)가 나타났다. 형가는 진왕의 소매를 붙들고 비수로 찔렀지만, 진왕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형가가 쫓아가자 진왕은 대전(大殿)의 기둥을 돌면서 피했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멍하니 있었는데, 진왕의 시의(侍醫) 하무차(夏無且)가 약상자를 형가에게 집어던지자, 형가가 잠시 멈칫했다. 약상자가 형가의 이마를 강타한 것이었다. 진왕은 그 기회를 틈타 검을 빼들고 형가의 다리를 찔렀다. 형가는 바닥에 넘어지면서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다. 그러나 진왕은 그마저도 피하고, 검을 들어 형가를 수없이 찔렀다. 형가의 거사는 이렇듯 허망하게 실패하고 말았다.(기원전227)

 

이때부터 진왕은 태자 단을 응징하고자 군대를 보내 더욱 연나라 공격에 박차를 가했고, 그 다음 해 연나라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은 요동(遼東)까지 물러났지만, 진왕의 분노는 결코 풀리지 않았다. 그는 태자 단을 산 채로 잡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연왕(燕王) 희(喜)는 하는 수 없이 단을 죽이고, 진나라와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기원전 222년, 진은 마침내 연을 멸망시키고야 말았다. 연나라에 앞서 진은 기원전 225년 위(魏)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3년 초(楚)를 멸망시켰다. 드디어 연을 멸망시킨 다음 해인 기원전 221년 제(齊)나라 마저 멸망시킨 진왕은 마침내 중국 통일을 실현하고 진시황(秦始皇, 생몰 기원전259~기원전210, 진왕 기원전247~기원전221, 초대황제 기원전221~기원전210)이 되었다. 지나간 역사를 가정(假定)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단과 형가의 거사가 성공했다면 오늘날 중국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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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 한국적 행서 시리즈 8
황성현 지음 / 서예문인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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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歸去來辭)는 “돌아가련다!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명구로 시작된다. 전반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해방감을 가을 정경 속에 그려냈고, 후반에는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천명에 맡기는 심경을 봄의 정경 속에 묘사했다. 전체적으로 영탄조가 강하나, 신선한 정경 묘사와 청아한 풍취가 넘쳐흐르는 걸작으로, 관직을 내놓고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선언의 뜻이 담겼다. 원문은 생략하고 우리말로만 옮긴다.

 

돌아가련다!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미 내가 잘못하여 스스로 벼슬살이를 하는 바람에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혼자 한탄하고 슬퍼만 해야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은 따질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올 것은 바른 길을 따를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내가 길을 잃고 헤매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리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각성하여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잘못이었음도 깊이 깨달았노라.

 

집으로 돌아가는 배는 출렁출렁 가볍게 바람을 타고 떠가며, 표표(飄飄)히 부는 바람은 옷자락을 불어 날리고 있네. 어서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으로 길 가는 행인에게 앞으로 길이 얼마나 남았는가 묻기도 하고, 또 새벽 일찍 길에 나서며 아직도 새벽빛이 희끄무레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도 하네.

 

마침내 저 멀리 나의 집 대문과 지붕이 보이자, 나는 기뻐서 뛰었네. 머슴아이가 길에 나와 나를 맞이하고, 어린 자식은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네. 뜰 안의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그대로구나.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가니, 술 단지에는 아내가 정성들여 담근 술이 가득 차 있네.

 

술 단지와 술잔을 끌어당겨 혼자 따라 마시며, 뜰의 나뭇가지들을 보며 즐거운 낯으로 미소를 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느긋한 기분을 맛보니, 비록 방은 무릎을 두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지만 충분히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수 있음을 실감하네.

 

전원을 날마다 돌아보니 제법 운치 있게 되었으며, 대문이 비록 있기는 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노상 닫혀 있네. 지팡이 짚고 이리저리 소요(逍遙)하다가 아무 곳이나 내키는 대로 앉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하네. 구름은 무심히 산굴에서 나오고, 새들도 날기에 지쳤는지 둥지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마침 해도 어둑어둑 저물어 들어가려 할 무렵,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고 맴돌고 있네. 돌아왔네! 이제부터는 세속적인 교제를 그만두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리라! 속세와 나는 서로가 어긋나고 맞지 않거늘, 내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찾아다닐까보냐!

 

일가친척들과 정이 넘치는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주고받으며, 혼자 있을 때는 거문고와 독서를 즐김으로써 세상사를 잊는다.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서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네. 포장 친 수레를 타고 육로로 가기도 하고, 혹은 혼자서 조각배를 젓고 물길을 따라 멀리까지 농사를 지으러 가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꾸불꾸불 깊은 골자기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번에는 우툴두툴 높고 험한 산을 넘기도 하네.

 

초목은 나날이 무성해가고, 샘물은 졸졸 흐르기 시작하네. 만물이 때를 만나 생동함을 볼 때, 내 인생이 장차 끝나게 될 것임을 느끼네. 아! 이제는 나의 인생도 그만인가 보다! 내 몸을 이 세상에 맡기고 살날도 앞으로 얼마나 될 까? 그러나 어찌 나의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죽으나 사나 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황(遑遑)한 마음으로 욕심내고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실적으로 나는 부귀도 바라지 않고, 또 죽은 후에 천제(天帝)가 사는 천국에 가서 살 것이라는 기대고 하지 않네. 때가 좋다고 생각되면 혼자 나서서 거닐고, 또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놓고 김매기도 하네. 동쪽 언덕에 올라가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네.

모름지기 천지조화에 따라 인생을 마치려고 하노라. 천명(天命)을 한껏 즐긴다면 또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가슴 벅차게 고향을 예찬하는 이 선언문(?)에서 작자의 의도가 들어 있는 빼어난 구절을 하나 꼽으라면 다음의 구절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굴에서 나오고, 새들도 날기에 지쳤는지 둥지로 돌아올 줄 아는 구나”(雲無心而出岫, 鳥倦飛而知還) 이 구절은 비록 구름과 새를 예로 들었지만, 거기에는 자유를 사랑하고 자연을 그리워하는 시인 자신의 마음이 한껏 녹아 들어가 있다. ‘수(岫)‘는 <이아(爾雅)>에 보면, “산에 있는 굴을 수(岫)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산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동굴을 가리키는 듯하다. 종종 산에 가면 풍혈(風穴)이라는 것이 있어서 더운 여름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 나오는데, 계절에 따라서는 안개가 뿜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면 흡사 구름이 산굴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원전거(歸園田居 : 고향집으로 돌아와 밭에 살다.)> 다섯 수 역시 자유로운 전원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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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서 - 임서시리즈 14
정주상 지음 / 이화문화출판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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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의 예술을 탄생시킨 난정(蘭亭)은 현재 소흥(紹興)시내 서남 12.5Km에 있는 난저산(蘭渚山) 아래 자리하고 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이 일대에 난을 심어 난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동진 목제(穆帝. 345~361) 영화(永和)9년(353) 3월 초사흘 월주(越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서남 20리에 위치한 명승지 난정에는 왕희지의 주재 아래 그의 아들 현지(玄之), 환지(渙之), 휘지(徽之), 헌지(獻之) 등과 당시의 명사였던 손통(孫統), 손작(孫綽), 사안(謝安), 지둔(支遁) 등 42인(일설에는 43인)이 모여 수계사(修稧事)를 행하고 있었다.

 

마치 신라(新羅)의 경주(慶州) 포석정(鮑石亭)과 같이 곡수(曲水)를 만들어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흘러가게 하여 술잔이 도달하면 그 앞에 앉은 사람이 지체 없이 술을 마시고 즉석에서 시를 짓는 모임이었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석 잔을 마셔야 했다. 이 모임을 통하여 26명이 지은 주옥같은 37수의 시가 모아졌다. 이 모임의 주재자였던 왕희지는 이 시들을 모아서 편집하고, 이 모임을 통해 만난 여러 명사와 나눈 대화에서 느낀 감상을 적어 앞에 붙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이다.  다음이 난정서의 전문(全文)이다.

 

영화9년 계축(癸丑) 늦은 봄 초승에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여 계사(禊事 : 부정을 씻기 위한 목욕재계의 행사 계제(禊祭)를 거행하는 일로 요사(妖邪)를 떨쳐버리는 제사)의 모꼬지(여러 사람이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에 다른 일로 모이는 일)를 행했다. 여러 어진 분이 왔고 젊은이와 어른이 다 한자리에 모였다. 이곳은 산이 높고 고개가 험하며 무성한 수풀과 긴 대가 들어찬 죽림(竹林)이 있는데, 또 맑은 냇물과 거센 잦은 여물물이 좌우를 비추며 띠처럼 둘러져 있다.

 

그 물을 끌어내어 술잔을 흘리는 구곡(九曲)의 유수(流水)를 만들었는데, 우리들은 차례대로 죽 벌려 앉았으니 비록 사(絲), 죽(竹)으로 만든 관현악기의 성대함은 없으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한 수의 시를 지어 읊으니 이 또한 마음속의 깊숙한 정서를 펼치기에 충분했다. 이날은 하늘이 활짝 개고 대기는 맑아서 온화한 봄바람이 화창하게 불었다. 하늘을 우러러 우주가 무한히 큼을 보고, 아래를 굽어 지상 만물의 무성한 자태를 살펴볼 수 있었다. 사방으로 눈을 돌려 바라보고 마음 가는 대로 생각을 달려 보니 그로써 보고 듣는 즐거움을 한껏 누릴만했다. 실로 즐거운 일이었다.

 

대저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살아감에, 어떤 사람은 평소 가슴 속에 축적했던 식견을 풀어내며 친구와 한 방에 마주 앉아 서로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의탁하는 바를 따라 육체의 속박을 초월해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나아감과 멈춤이 제각기 다르고, 고요히 지내고 시끄럽게 지냄이 같지 않으나, 사람은 저마다의 경우를 즐겨 잠시 자기 마음에 흡족한 때를 당해서서는 쾌연(快然)히 스스로 만족해서 바야흐로 노년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지낸다.

 

그러나 그 마음 가는 데가 어느덧 물리게 되고 감정도 세사(世事)를 따라 바뀌게 되는 날에는 거기 따라서 감개(感慨)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지난 날에 즐기던 바가 고개를 숙였다 드는 동안에 묵은 자취가 되어버리면 더더욱 감정이 복받쳐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장수하거나 단명하거나 간에 마침내 그 생명도 다할 날이 있음에야 더욱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인(古人)은 말했다. 살고 죽는 것 또한 인생의 중요한 일이라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옛사람이 감동을 일으킨 까닭을 살펴볼 적마다 그것이 한 문서를 맞추는 듯이 나의 생각함과 동일하니 지금까지 그 문장을 읽으면서 슬퍼하고 한탄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슬퍼하지 않도록 마음을 깨치지 못했다. 죽음과 삶이 동일하다는ㅡ장자의 ㅡ말이 진실이 아닌 허황된 주장이라는 것과 칠백 세나 살았던 팽조(彭祖. 요임금~주나라 초까지 살았다는 전설적인 인물)와 갓난아이 때 요절한 자의 나이가ㅡ영원에 비하면ㅡ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망령된 주장임을 진실로 알 수 있다. 뒷사람이 지금의 우리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지금의 우리가 옛사람의 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나 매양 한가지일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열거하고 그 사람들이 지은 글을 한군데 모아보았다. 비록 나중에 세상이 달라지고 세사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사람의 감회를 일으키는 소이(所以)는 일치할 것이니 뒤에 이 글을 보는 사람 또한 장차 이것에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325자로 된 이 <난정서>는 남조 사대부들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산수에 대한 사랑,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몸을 맡겨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정신, 영원한 것에 대한 사모, 유한한 인생의 덧없는 유전(流轉)에 대한 슬픔이 통절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문장보다 이 <난정서>의 필체는 고금(古今) 최고의 서법가인 왕희지가 득의(得意)한 작품으로 더 알려져 있다. 특히 그 가운데 나오는 20자의 지(之)는 각각 다른 풍채(風采)를 가지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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