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 소설보다 재미있는 평단 Great Classic 3
사마천 지음, 김민수 엮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於易水送人(역수에서 이별하며)

 

                             낙빈왕(駱賓王.640~684)

 

此地別燕丹 (차지별연단)  여기에서 연나라 단과 이별할 때

壯士髮衝冠 (장사발충관)  장사의 머리털이 관을 뜷었네.

昔時人已沒 (석시인이몰)  옛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今日水猶寒 (금일수유한)  오늘도 역수는 여전히 차구나.

 

 

이런 시는 사전 지식 없이 읽으면 별 감흥이 없다. 현대시든 한시든 대충 읽어도 느낌이 전해오는 시가 있고, 그 배경을 모르면 감동은커녕 작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시도 있다. 이 시는 아주 간결하지만 시대의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게다가 그 배경이란 것도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고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BC221~BC206)나라와 그 통일대업을 이룩한 진시황(秦始皇)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2,200여 년 전 광활한 중국 대륙이, 그 대륙에서 일어난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먼저 태자 연과 형가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때는 전국시대(戰國時代. BC403~BC221) 말기였다. 초기에는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 해서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진(秦) 등 7개국의 세력이 서로 엇비슷해서 호각을 이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쪽 변방에 있던 진나라가 점차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 소진(蘇秦. ?~BC317)과 장의(張儀. ?~BC309)의 ‘합종연횡책(合縱連橫策)’이 시대를 풍미했다. 진을 제외한 여섯 나라가 연대를 맺어 진을 견제하는 합종책(合縱策)이 시들해지자, 진이 한 나라씩 맹약(盟約)을 맺어 여섯 나라의 연대를 깨고자 연횡책(連橫策)이 등장했다. 이것은 강국 진나라와 나머지 약소 6개국이 빚어낸 시대적 산물이었다. 진왕(秦王) 영정(嬴政)은 정권을 잡은 후,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책략으로 점점 각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진은 맨 처음 한(韓)나라를 멸망시킨(기원전230)뒤, 조나라도 집어삼키고(기원전 228) 연나라를 세 번째 대상으로 정했다.

 

한편 진나라 군대가 진격해오자, 그 위세에 눌린 연나라 조정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진나라의 공격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보자는 주화파(主和派)의 목소리가 커졌다. 소수파인 주전파(主戰派)의 우두머리는 태자(太子) 단(丹)이었다. 단은 아버지 연왕(燕王) 희(喜. 기원전 255~기원전 222)를 대신해서 연나라의 정치, 외교를 담당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그는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것보다 먼저 영정의 목을 치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십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단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라 간에 서로 인질을 주고받음으로써 살얼음판 같은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 흔했다.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진나라 공자(公子) 자초(子楚)가 조희(趙姬)와 사이에서 아들 영정을 얻었을 무렵, 태자 단도 연나라에서 조나라로 인질로 오게 되었다. 같은 처지였던 단은 아직 어린 아기인 정을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일설에는 나이가 비슷하고 처지도 비슷해서 죽마고우처럼 지냈다고도 한다.) 얼마 뒤 자초는 영정을 데리고 진나라로 도망갔고, 단도 연나라로 돌아왔다. 그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성인이 된 단은 약소국의 비애를 안고, 이번에는 진나라의 인질로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토록 귀여워했던 영정은 강대국 진나라의 왕이 되어 있었다. 외롭고 궁핍했던 시절, 영정과 함께한 시간은 비록 3년 정도였지만, 태자 단은 새삼 그 때의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면서 영정도 이번 만남을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 여린 사내의, 혼자만의 부푼 기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단에서 둘이 같이 지내며 단이 돌봐주던 시절 영정은 너무 어렸다. 또한 그 뒤로 흘러간 세월은 너무 오래되었으니 영정이 단과 함께 지낸 추억은커녕 단의 존재조차 기억하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당시 진나라는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인질을 데리고 왔으며, 청년 왕 영정은 천하 평정의 야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겠다는 그의 의지는 하늘을 찌를 듯해서 인질에 대해서도 매우 냉정하고 냉혹했다. 단이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도착했는데도 영정은 그를 만나보지도 않은 채 초라한 숙소에 쳐 넣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푸대접에 단은 크게 놀라고, 비참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약소국의 비애와 설움이 마구 솟구쳤고, 강대국에 대한 증오가 밀려오면서 진왕 영정에 대한 복수심이 일었다. 단의 성격이 외곬이어서 생각과 기대에 어긋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탓도 있었다.

 

진왕 영정 15년(기원전232), 단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조국인 연나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영정에게 보복하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그러나 강대국인 진나라를 공격하기에는 연나라의 군사력이 너무나 미약했다. 단이 온갖 궁리를 했지만 묘책을 세우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의 턱밑까지 밀어닥쳤다. 그 즈음 진나라의 명장 번오기(樊於期. ‘於(어)’는 인명으로 쓸 때는 ‘오’) 가 진왕 영정과의 불화로 연나라로 망명하자, 단은 순순히 그를 받아 주었다. 영정을 증오한다는 점에서 동지애를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 태부(太傅) 국무(鞠武)는 번오기의 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덩이를 끌어안는 위험한 짓이라며 반대했다. 나아가 진왕을 해치겠다는 계획이야말로 연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는 거사를 맡길 만한 인물을 추천했는데, 바로 전광(田光)이었다.

 

전광은 지략이 뛰어나고 사려가 깊으며, 지조 높은 청렴한 선비이자, 검술에서도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었다. 검술을 배우는 명문가의 자제들,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 협객(俠客)들에게도 존경을 받아 그의 도장(道場)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국무의 인도로 궁에 들어와 태자를 알현한 전광은 “저는 이미 나이 들어 대사를 맡기에는 역부족입니다.”라며 고사(固辭)하고는 대신 형가(荊軻)를 추천했다. 형가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대장부라는 것이었다. 단은 그 대장부를 하루 빨리 만나게 해달라면서, “ 이 일은 나라의 대사인지라 결코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그 순간, 전광의 얼굴빛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지는 것을 단은 눈치 채지 못했다.

 

형가는 본래 위(衛)나라 사람으로, 검술에 정통하고 책과 술을 좋아했다. 위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한 후 형가는 진나라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아 연나라로 도피했다. 협객 기질이 있었던 형가는 축(竺)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와도 통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마음을 나누는 술친구가 되어, 고점리가 축을 타면 형가는 그에 화답하여 자작(自作)한 시를 노래했다.

 

전광은 형가를 찾아가 대사를 맡아줄 것을 청했다 형가가 흔쾌히 승낙하자, 전광은 “태자 단이 이 일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므로 말이 새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면서 “내가 죽으면 일이 누설될 염려가 없을 것이오.”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가는 전광이 태자에게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반드시 대사를 이루어야 함을 죽음으로써 분발시킨 것임을 깨달았다. 형가는 진왕에게 접근하려면 먼저 그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진왕은 자신과 진나라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도망친 번오기에게 상금 천 냥을 걸 정도로 그를 죽이는 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형가는 번오기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지고 진왕을 만나볼 계략을 짜냈다. 이렇게 해야만 진왕이 비로소 자신을 접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단은 번오기를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그 계획에 반대할 것이 뻔했다. 형가는 스스로 번오기를 찾아가 자신이 온 뜻을 설명했다. 번오기도 진왕을 몹시 증오했기 때문에 형가가 진왕을 죽이는 것 역시 자신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리하여 형가는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가지고, 거짓으로 진왕에게 보물을 헌상한다고 둘러댄 뒤 진왕을 알현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형가는 머나먼 진나라로 떠나는 길, 거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그 눈물 어린 배웅의 장소가 바로 역수(易水)였다. 형가는 태자 단과 고점리의 처연한 전송을 받으며 자신의 결연한 심정을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장사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읊었다. 그때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형가의 머리털이 자신의 관을 뚫었을 것이다. 그렇듯 비장하게 읊은 형가는 유유히 수레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도를 진왕에게 헌상(獻上)했다. 진왕이 천천히 지도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다 펼치자 갑자기 비수(匕首)가 나타났다. 형가는 진왕의 소매를 붙들고 비수로 찔렀지만, 진왕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형가가 쫓아가자 진왕은 대전(大殿)의 기둥을 돌면서 피했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멍하니 있었는데, 진왕의 시의(侍醫) 하무차(夏無且)가 약상자를 형가에게 집어던지자, 형가가 잠시 멈칫했다. 약상자가 형가의 이마를 강타한 것이었다. 진왕은 그 기회를 틈타 검을 빼들고 형가의 다리를 찔렀다. 형가는 바닥에 넘어지면서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다. 그러나 진왕은 그마저도 피하고, 검을 들어 형가를 수없이 찔렀다. 형가의 거사는 이렇듯 허망하게 실패하고 말았다.(기원전227)

 

이때부터 진왕은 태자 단을 응징하고자 군대를 보내 더욱 연나라 공격에 박차를 가했고, 그 다음 해 연나라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은 요동(遼東)까지 물러났지만, 진왕의 분노는 결코 풀리지 않았다. 그는 태자 단을 산 채로 잡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연왕(燕王) 희(喜)는 하는 수 없이 단을 죽이고, 진나라와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기원전 222년, 진은 마침내 연을 멸망시키고야 말았다. 연나라에 앞서 진은 기원전 225년 위(魏)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3년 초(楚)를 멸망시켰다. 드디어 연을 멸망시킨 다음 해인 기원전 221년 제(齊)나라 마저 멸망시킨 진왕은 마침내 중국 통일을 실현하고 진시황(秦始皇, 생몰 기원전259~기원전210, 진왕 기원전247~기원전221, 초대황제 기원전221~기원전210)이 되었다. 지나간 역사를 가정(假定)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단과 형가의 거사가 성공했다면 오늘날 중국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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