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 상
김성한 지음 / 달궁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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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의 출생에 얽힌 비밀은 아직도 베일에 감춰져 있다. 과연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설이 분분하다. 따라서 다음의 설명도 하나의 설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여불위(呂不韋. ?~BC235)는 한()나라 수도 양책(陽翟)양적이라고도 함-의 대상인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값이 쌀 때 물건을 사놓았다가, 시기를 보아 비쌀 때 비싼 값으로 파는 방법으로 천금(千金)을 모았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견문이 넓었으며, 모든 일에 감식안이 비상했다.

  

()나라는 소양왕(昭襄王)40(기원전 267), 태자가 죽고 2년 후에 그의 차남인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의 총애를 받는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20여 명의 아들 가운데 이인(異人=子楚=莊襄王은 동일인물)은 생모 하희(夏姬)가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받아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인은 사랑받지 못하는 첩의 자식인데다 인질이었기 때문에 매우 곤궁한 생활을 했다. 더구나 조국이 진()이 조나라를 자주 공격했기 때문에 인질로 간 이인(異人)에 대한 냉대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럴 즈음 여불위는 이인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기화(奇貨)이다. 구해놓고 보자. 옛말에도 기화가거(奇貨可居 : 진기한 물건은 사서 잘 보관 해 두면 장차 큰 이득을 본다.)라고 했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여불위는 이인을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돕겠다고 말했다. “지금 진나라 왕은 연세가 많고 태자는 공자의 아버지 안국군이십니다. 안국군께서는 화양부인을 총애하고 계신데 그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실 안국군의 후계를 정하는 데는 화양부인의 힘이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아버님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안국군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후계를 정하게 될 텐데 항상 안국군 곁에 있는 큰 형님이나 다른 형제분에 비해 공자께서는 훨씬 불리한 입장일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공자께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아버님에게 선물을 보내기는 고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교제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저도 별로 여유는 없습니다만, 이제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 1천금을 털어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공자를 후계자로 삼도록 공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인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공하면 진나라의 반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여불위는 5백금을 이인에게 교제비로 주고, 나머지 5백금으로는 조나라의 진귀한 물건들을 사 가지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는 즉시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여불위가 장사 일로 몇 번 만나 선물도 많이 바친 인연이 있었다. 선물로 사온 물건을 모두 바치면서 넌지시 떠 보았다. “지금 조나라에 계신 이인 왕자님은 각국의 유명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여 그 명성이 날로 높아 가는 총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항상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존경한다. 아버님과 부인을 사모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화양부인의 언니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불위는 다음과 같이 화양부인에게 말씀드리라고 일러두었다. “‘()으로 남을 섬기는 자는 색이 쇠하면 사랑도 잃는다.’라고 합니다. 지금은 태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후사(後嗣)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총명하고 효심이 두터운 왕자를 골라 태자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태자가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고, 설령 태자에게 일이 생겨도 양자가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권세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영원한 이로움을 얻는다고 합니다. 젊을 때 발판을 튼튼히 해둬야지 색향(色香)이 쇠하고 총애를 잃은 뒤에는 이미 늦습니다. 이인 왕자는 총명한 분입니다. 그는 형제들 순서로 보아도 그렇고, 생모의 순위를 보더라도 후계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므로, 그를 양자로 삼고 후계로 정한다면 당신을 끝까지 섬길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화양부인은 과연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얼마 후 화양부인은 안국군에게 이인이 총명하며, 또 그와 교제하는 많은 제후가 얼마나 그를 칭찬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그 설명은 여불위가 일러준 그대로였다. 화양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다행히도 태자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인을 후계자로 정하여 저의 장래를 맡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안국군은 그 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안국군과 화양부인은 부모로서 지극한 정성을 담아 여불위 편에 이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서 이인을 잘 돌봐주도록 부탁까지 했다. 이로써 여불위는 정식으로 이인의 보좌관이 된 것이었다. 한단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모든 상황을 이인에게 설명하고, 이를 전해들은 이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었다. ()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다. 이때부터 자초라는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호상(豪商) 여불위는 여러 나라의 수도에 저택을 지어, 그곳을 영업 지점의 기능을 갖춘 거점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한단의 저택은 초호화 저택이었다. 당시 여불위에게는 조희(趙姬)라는 애첩이 있었는데, 그녀는 한단 제일의 요염한 무희 출신 미녀였다.

  

어느 날 여불위의 집에 초대된 자초는 첫눈에 조희에게 반해버렸다. 자초는 축배를 들자마자 그 여자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순간 여불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고일설에는 여불위가 조희를 설득해서 자초에게 보내기로 하고 둘이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는데 그날 잉태했다고도 한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초의 청을 거절하면 전 재산을 털어 투자한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결국 조희는 임신한 사실을 숨긴 채 자초의 품으로 갔다. 과연 몇 달 뒤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그 아이가 정()이었다. 후에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이다. 처음으로 자식을 본 자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자초가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것도 잠시, 진나라 백기(白起) 장군이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격파하고, 뒤이어 한단을 포위했다. 이때 자초는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몰렸지만, 여불위가 뇌물로 감시관을 매수하여 자초와 조희 모자의 탈출을 도왔다.

 

자초가 진의 수도 함양에 돌아온 뒤의 세월 또한 인고(忍苦)의 나날이었다 많은 이복형제는 서로 후계자가 되려고 혈안이었는데, 자초는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6년이 흐른 뒤 소양왕 56(기원전 251) 소양왕은 노령으로 죽고, 안국군이 즉위효문왕(孝文王. 기원전 251~기원전250)했다. 이로써 자초는 당당하게 함양궁에 들어가 정해진 대로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어선 효문왕은 즉위 1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莊襄王. 기원전 250~247)이 되었다.

  

자동으로 조희는 조비(趙妃), 정은 태자가 되었으며, 화양부인은 화양 태후(太后)로 모셔졌다. 장양왕은 별 볼일 없던 자신을 기화로 인정하여 많은 돈을 들여 뒷바라지하고 몇 번씩이나 목숨을 구해주고 마침내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일들 일등공신 여불위를 칭송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문신후(文信侯)의 칭호와 낙양(洛陽) 10만호의 식읍을 하사함과 동시에 승상(丞相)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인고의 생활이 너무 길었던지 장양왕 역시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드디어 태자 정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겨우 열 세 살이었다. 여불위는 권력을 장악하여 승상보다 높은 상국(相國)에 올랐으며, 중부(仲父 : 옛날에는 ()’가 인명, 지명으로 쓰일 때 로 읽었음.)의 존칭을 하사받아 천하를 호령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중부(仲父)는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백부(伯父)이외에 아버지의 형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에서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제나라 환공(桓公. 기원전685~기원전 643)이 관중(管仲. ?~기원전 645)을 예우해서 부르던 명칭에서 유래하며, 이 경우 발음을 중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보다 앞선 예가 있는데, ()나라 무왕(武王)이 태공망(太公望)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상보도 임금이 특별한 대우로 신하에게 내리는 칭호의 한 가지로, 무왕이 주나라 창업에 공이 많은 태공망을 예외적으로 대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처럼 로 발음될 때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쓰이는 경우이며, 뜻은 ()’와 같다.

  

여불위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의 춘신군(春申君), ()의 신릉군(信陵君), ()의 맹상군(孟嘗君), ()의 평원군(平原君) 등 전국(戰國) 사공자(四公子)를 모방하여 각자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난 인사를 3천 명이나 거느리기에 이르렀다. 이들 인사의 학식과 기능을 한데 모은 것이 후세에 전하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선진(先秦)시대의 여러 학설과 사실(史實), 설화(說話) 등을 모아 편찬했으며, 26권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백과전서라 할 수 있다. 여불위가 이 책에 대해 갖는 자신감은 함양의 성문에 내건 다음과 같은 푯말로도 알 수 있다. <만약 전 26권 가운데 한 군데라도 첨삭을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1천금을 주겠다.>

  

한편 장양왕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무렵, 여불위는 문병을 가는 길에 옛날 애첩이었던 자초의 아내, 즉 왕비 조비에게 아직 사모하고 있다는 연애편지를 건넸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뜨거워졌고, 장양왕이 죽자 여불위는 태후가 된 옛 애인의 거처를 수시로 찾아갔다. 태후는 옛날보다 더욱 풍만하고 관능적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여불위가 한번 오면 반드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갈 정도였다.

  

진왕 정이 다 성장한 후에도 두 사람의 통정(通情)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남자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사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시황제가 성장함에 다라 여불위의 불안감도 커졌다. 태후와의 관계가 들통 나는 날이면, 자신의 파멸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온갖 정성과 공을 들여 쌓아놓은 자신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불위는 그만 만나고 싶었지만 태후가 놓아주지 않았다. 여불위는 고심 끝에 거대한 남근(男根)을 가진 노애(嫪毐)라는 자를 식객(食客)으로 들였다. 그리하여 잔치가 벌어지면 노애의 물건에 오동나무 바퀴를 달아서 그것을 굴리도록 시켰다. 소문을 내서 태후의 관심을 끌려는 계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후로부터 그 남자를 손에 넣고 싶다는 내밀한 부탁이 왔다. 여불위는 미리 궁리해놓은 계획대로 노애를 궁형(宮刑)을 받은 새로운 환관으로 가장시켜서 궁으로 들여보냈다. 노애는 진짜 환관처럼 보이기 위해 수염도 눈썹도 다 뽑아야 했다. 태후와 노애는 천정배필(天定配匹)인 듯했다. 남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태후는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인 노애를 만나 그야말로 환락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었다.

  

노애 또한 타고난 정력을 발산할 길이 없던 차에 태후를 만나자 날 새는 줄 모르고 즐겼다. 노애는 정력 하나로 동네 거렁뱅이에서 일약 태후를 휘두르는 남자가 되어 임도 보고 뽕도 따게 되었다. 그렇게 밤낮 없이 즐기던 태후는 그만 애까지 임신하게 되었다. 여불위는 그 소식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으나 이내 대책을 강구해냈다. 그는 진왕에게 상주(上奏)하여 점괘에 따른다는 명목으로, 태후의 궁전을 함양에서 서쪽으로 100km나 떨어진 옹()땅에 지어 태후와 노애를 이주시켰다. 진왕 정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아예 터놓고 즐겼다. 노애는 태후의 추천으로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졌으며, 하인이 수천 명에 식객만도 천 명이 넘었다. 노애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태후는 옹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진왕 9(기원전 238), 고발장 하나가 접수되었다. <노애가 환관이라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태후와 몰래 관계를 가져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더구나 왕이 돌아가시면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진왕 정은 즉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자 여불위가 이 일에 관여한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왕 정에게 모든 사실이 알려졌음을 안 노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옹의 궁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강력한 진나라 정규군의 상대는 아니었다. 노애는 산 채로 손과 발이 오라에 묶여 거열형(車裂刑 )에 처해졌으며, 노애의 친족들은 물론 태후가 낳은 두 아들도 참수되었다. 진왕은 여불위도 죽여 버릴 작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라의 큰 공신인 데다 여러 대신과 유세객들이 그를 변호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 조 태후는 궁중의 한적한 곳에 연금시키고, 여불위는 상국의 지위를 박탈하여 하남(河南) 지방의 소제후로 봉하여 추방했다.

 

그러나 여불위의 명성은 여전했으며, 제후들과 호상, 빈객이 여불위를 만나기 위해 날마다 줄을 이었다. 이에 여불위의 모반을 두려워한 진왕은 <귀공께서는 무슨 공적이 있어 하남 땅을 가지게 되었으며, 10만호의 영지를 받았는가? 또 진나라와 어떤 혈연관계가 있어 중보(仲父)로 행세하는가? 즉시 일가를 이끌고 촉()으로 옮겨 살 것을 바라노라.>라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여불위는 이러다가 끝내 주살(誅殺)되고 말 것이다. 치욕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하고는 독배(毒杯)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왕 12(기원전235)의 일이었다. 진왕은 여불위의 장례 행렬에서 슬피 운 자들을 잡아 모두 처형시켰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기원전 221, 진왕은 나머지 6국을 모두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중국 통일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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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5-10-1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는 시황제를 장양왕(이인, 자초)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고, 사기열전(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와 조희 사이에 태어난 여불위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여불위의 역작 ‘여씨춘추’에서도 시황제를 자신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어 아직까지 누구의 아들인지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진실로 여불위의 아들이라면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