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완역 사기본기 - 전2권 ㅣ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개할 사마천의 산문은 <비사불우부(悲士不遇賦)>다. 즉 ‘때를 잘못 만난 선비를 슬퍼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비사불우부>는 궁형을 당한 뒤의 사마천의 심경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의미가 쉽게 통하도록 하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의역했다.
“슬프다! 선비가 태어나 때를 잘못 만나 평생을 뜻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외롭고 쓸쓸한 그림자를 뒤돌아보게 되다니. 늘 자신을 억제하면서 말과 행동이 예의규범에 부합하도록 애를 쓴 것은 그 뜻과 행동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능은 있었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해 평생을 걱정하며 산 것 같다.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였고, 재능이 있어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선비는 뜻을 얻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는데, 간신 소인배들은 잘도 드러내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좋고 나쁨이 구분되지 않고, 옳고 그름이 뒤섞여 있구나.
선비는 늘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하다. 역경을 맞이하여 굽히고 살면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길이 없구나! 설사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피차가 동등해질 수 있어도 사사로운 마음과 감정으로 일을 대하는 무리들 때문에 헛되이 스스로 상처받고 슬퍼하게 된다. 하늘의 도는 쇠퇴하여 보잘 것 없으니 한탄스럽고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인간의 세상사 공리는 분명하거늘 간사한 자들은 오히려 서로를 속이고 서로 싸운다. 선비는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권력과 부귀를 부러워하는 비천함은 경멸한다. 깨어 있는 철인은 더욱 혼란스럽다. 선비는 광명정대하고 마음이 활달하다. 소인은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악함이 절로 생겨난다.
명철한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또 나의 언론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이 늙도록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옛사람들은 부끄러워하였다. 아침에 이름이 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들 누가 감히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역경과 순조로움은 고리처럼 돌아서 처음으로 되돌아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다. 자연의 법칙을 근거로 삼아서도 안 되고, 지혜를 의지처로 삼아서도 안 된다. 먼저 행복을 얻는 것도 아니고 먼저 환란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시세의 변화에 순응하여 끝내는 하나, 즉 무위로 돌아갈 뿐이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이 글은 <보임안서>와 비슷한 시기에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첫 마디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뒤의 울분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궁형을 당한 뒤 사마천의 생각과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자, 당시 고난에 처한 일반 선비들의 불행한 처치를 압축하는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이 글에서 사마천은 봉건사회의 어두운 통치에서 저주를 보냄과 동시에 하층 선비의 불우함에 동정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경 속에서 쉼 없이 분투하고 세상에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는 숭고한 인격을 높이 평가한다.
사마천은 시대와 괴리를 한스럽게 생각하며 자신의 울분과 비애를 토로한다. 재능 있는 선비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처가나 누이의 치맛바람 덕에 고관대작에 오른 간신 소인배들은 멋대로 설치는 반면, 진정 학문이 깊은 선비들은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세태를 가슴 치며 한탄하고 있다. 이런 세태로 인해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이 뒤섞이는 가치관의 혼동 속에서 ‘하늘의 도’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며 천도(天道)와 천명(天命)에 대해 과감하게 의심과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진리의 견지, 정의의 수호는 사마천이 평생 지켜온 신조다. 그는 인생을 소극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고대 철인들을 모범으로 삼아 부귀와 권력만을 탐내는 천박한 인생관을 경멸한다. 그는 광명정대한 마음에서 출발해 서로 속이고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악습을 과감하게 폭로하고, 그런 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공자가 “아침에 이름이 나면(또는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말을 빌려 치욕을 견디며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하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한다.
사마천은 자신이 몸소 경험한 침통한 교훈을 통해 ‘이지(理智)’에만 의지하거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결론은 표면적으로는 소극적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이지‘만을 믿고 서로 싸우길 멈추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글의 마지막은 신랄한 풍자와 조롱을 통해 무제 시대의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한나라 초기 “시세의 흐름과 더불어 옮기고, 사물의 변화에 순응한” 황로학의 무위(無爲) 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정신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 한 걸음 물러난 다음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가 그윽하게 침잠한 뒤 분발하여 <사기>를 완성한 것도 바로 ‘물러남으로써 전진한’ 것이었다.
<비사불우부>는 전체적으로 무제 시대의 전제적이고 욕망을 충족하려는 정치를 폭로하고 간신 소인배의 처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비에 대해서는 그 고결한 인품을 칭송하고, 선비의 불우한 처지를 동정한다. 글은 슬프지만 원망의 분위기는 없다. 사람들을 격려하여 분발하게 하고 힘차게 미래를 향해 전진하게 한 태사공의 마음이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이 사마천의 글인지에 대해서는 역대로 적잖은 논란이 있었다. 워낙 후대의 책<당대 구양순(歐陽詢)이 편찬한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수록된 탓에 글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제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이나 주된 표현으로 볼 때 사마천의 글이 아니라고 부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p.63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