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인문학 명강 시리즈 1
강신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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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전히 의심합니다. 과연 사람의 본성이 선한가, 모든 사람에게 측은지심이나 불인지심이 있는가? 우리 주변에는 본성의 선함이나 측은지심이 의심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TV와 신문을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강력범죄, 아동성폭행, 학교폭력 등의 소식이 보도됩니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한 맹자의 주장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해자들에게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은 그들에 의해 반박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측은지심이 없으므로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까?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입니까?

 

맹자가 주장한 본성의 선함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 본래 가지고 있던 선함, 즉 본연적 성품의 선함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대인(大人)은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적자(赤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고,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순수성을 잃지 않은, 태어난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 대인입니다.

 

그런데 다들 선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났더라도 선하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맹자는 우산(牛山)이라는 산을 비유로 들면서 선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의 교외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많았다. 이러하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된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민둥산이 된 모습을 보고는 ‘우산(牛山)에는 일찍이 훌륭한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牛山之木(우산지목)이 嘗美矣(상미의)러니 以其郊於大國也(이기교어대국야)라. 斧斤(부근)이 伐之(벌지)어니 可以爲美乎(가이위미호)아 是其日夜之所息(시기일야지소식)과 雨露之所潤(우로지소윤)에 非無萌蘖之生焉(비무맹벽지생언)이언마는 牛羊(우양)이 又從而牧之(우종이목지)라. 是以(시이)로 若彼濯濯也(약피탁탁야)하니 人見其濯濯也(인견기탁탁야)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위미상유재언)이라하나니 此豈山之性也哉(차기산지성야재)리오.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다는 말은 과거 우산에는 숲이 무성하고 아름다운 녹지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제나라는 그 당시 강대국이었는데, 우산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양에서 가까운 인왕산이나 도봉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끼와 자귀로 날마다 나무를 베어 사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나라도 1960년대만 하더라도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소도시 부근의 산림에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었습니다.

 

식물은 주로 밤에 자랍니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가도 밤새 산소호흡을 하며 비와 이슬을 먹고 자라 나무에서 싹이 나옵니다. 하지만 소와 양이 싹을 뜯어 먹고 발로 망가뜨려서 우산은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민둥산이 된 모습만 보고서 저 산에는 일찍이 재목이 있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우산(牛山)의 본래 모습이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도끼와 자귀로 우산의 나무를 베어 가는 것처럼 매일같이 자신의 양심을 잃어버리고 있으니 양심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잔인한 모습, 포악한 모습을 보고서 그에게 선한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있다가 없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산의 나무나 사람의 마음이나 그 이치는 똑같습니다. p.18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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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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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복잡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것은 복잡하고 말고 할 것 없이 그냥 그런 거예요. 날씨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켜고 조금만 추워도 히터를 켠다고 난리지만 변덕을 부리는 것은 사람일 뿐 날씨는 지금처럼 늘 그랬습니다. 늘 맑기만 해도 살 수 없고 늘 비만 와도 살 수 없어요. 맑은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어서 우리 삶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욕구에 맞지 않는다고 맑은 걸 시비하고 비 오는 것을 시비하지요. 자기 관념의 틀에 세상을 꿰어 맞추려 드니 자기 관념의 틀로 이해가 될 때에는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가도 자기 관념의 틀에 세상이 맞지 않으면 당장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럽다고 한탄합니다. 자기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사람에다 옷을 맞춰야 하는데 옷에다 사람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복잡한 것은 우리들의 생각이고 어리석은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지 세상은 어리석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아요. 세상은 그냥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 것을 고집하고, 자기가 옳다고 고집해서 결국은 자신을 괴롭힙니다.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요. 누가 날 이렇게 괴롭힐까요?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함부로 한다, 자기를 아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음을 하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서 몸이 아프다고 소리지르는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본래의 몸은 건강하지만 어리석어서 자기가 자기 몸을 병들게 만들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은 본래 청정한데 내가 일으킨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미워하고 원망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이렇게 함부로 하고 학대하는데 누가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나도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데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줄까요? 내가 나를 사랑할 줄 모르고 소중히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소중히 여기고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자유롭게 하겠으며, 내가 나 자신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이 안되지요.
 
그러니 먼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더 이상 학대하고 못살게 굴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며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남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는 출발점이자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 것을 고집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학대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이것을 늘 살펴서 자기에게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이 본래 내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티끌 하나 속에도 천지의 은혜가 있고 만인의 노고가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물건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그 물건이 기꺼이 쓰이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약은 아픈 사람이 먹을 때 약이지 아프지 않은 사람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음식은 배고픈 사람이 먹어야 음식이지 배부른 사람이 먹으면 그것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혓바닥의 맛에 집착하거나 그 습관에 사로잡혀 해로운 먹을거리를 찾고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어 자신을 해칩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오랫동안 나와 주위 사람 모두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잘하는 일인 양 생각하는 것이지요. 많이 먹고는 소화제를 찾고, 많이 먹고는 살을 빼야 한다고 동동거립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에 걸려서 병원에 간다면 이해가 되지만 많이 먹고 배탈이 나고 많이 먹고 살이 쪄서 병원에 실려와 지방 제거 수술을 받고 위세척을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알지못하고 존재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법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집에서 아내를 봐도 답답하고 남편을 쳐다봐도 답답하고 애가 하는 짓을 봐도 답답합니다. 직장 상사와 동료들도 답답하고 스님이 하는 모양을 봐도 답답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새치기하는 사람을 봐도 답답하지요.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인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평불만 거리가 많은 것이 이번만, 아니면 올해만 그런 것일까? 세상은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습니다. 내년 내후년도 그럴 것입니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이걸 때리면 저게 튀어나오고 저걸 때리면 이게 튀어나오고 빨리 때리면 빨리 튀어나옵니다. ‘이것만 해결이 되면 이제 소원이 없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취직만 되면, 장가만 가면, 애만 낳으면, 애 대학만 가면 인생이 좋아질 것 같지만 갈수록 고민과 불평은 더 많아집니다. 인생이 정리되는 맛이 있기는커녕 갈수록 걱정이 많아집니다. 정년퇴직하면 삶이 한가해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살면 살수록 바빠지고 살면 살수록 복잡해집니다. 자유로워지기는커녕 걸리는 것이 점점 더 많아져요. 그래서 이 세상을 고쳐서 내가 편안해지겠다고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그리 될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이생뿐 아니라 내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늘 그런 것이니까요.
  
세상을 복잡하다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세상의 이치를 모르니까 세상이 복잡한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이치를 안다면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자동차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닛을 열어보면 어지러이 얽히고설킨 부속에 기가 죽지만 자동차를 잘 아는 사람이 보면 하나도 복잡한 게 없는 구조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을만한 것들이 있을 자리에 있고, 생길만 하니까 생겼습니다.
  
그러니 일이 없어서 한가한 게 아니라 일이 많은 가운데 한가하고, 인연을 다 끊어버려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연이 있는 가운데 자유로워야 합니다.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우리도 온갖 혼잡함 가운데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연잎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은 연잎이 스스로 매끄럽기 때문이지요. 내가 걸림이 없다면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도 나는 걸릴 게 없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p.24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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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완역 사기본기 - 전2권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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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할 사마천의 산문은 <비사불우부(悲士不遇賦)>. 때를 잘못 만난 선비를 슬퍼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비사불우부>는 궁형을 당한 뒤의 사마천의 심경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의미가 쉽게 통하도록 하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의역했다.

  

슬프다! 선비가 태어나 때를 잘못 만나 평생을 뜻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외롭고 쓸쓸한 그림자를 뒤돌아보게 되다니. 늘 자신을 억제하면서 말과 행동이 예의규범에 부합하도록 애를 쓴 것은 그 뜻과 행동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능은 있었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해 평생을 걱정하며 산 것 같다.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였고, 재능이 있어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선비는 뜻을 얻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는데, 간신 소인배들은 잘도 드러내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좋고 나쁨이 구분되지 않고, 옳고 그름이 뒤섞여 있구나.

  

선비는 늘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하다. 역경을 맞이하여 굽히고 살면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길이 없구나! 설사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피차가 동등해질 수 있어도 사사로운 마음과 감정으로 일을 대하는 무리들 때문에 헛되이 스스로 상처받고 슬퍼하게 된다. 하늘의 도는 쇠퇴하여 보잘 것 없으니 한탄스럽고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인간의 세상사 공리는 분명하거늘 간사한 자들은 오히려 서로를 속이고 서로 싸운다. 선비는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권력과 부귀를 부러워하는 비천함은 경멸한다. 깨어 있는 철인은 더욱 혼란스럽다. 선비는 광명정대하고 마음이 활달하다. 소인은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악함이 절로 생겨난다.

  

명철한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또 나의 언론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이 늙도록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옛사람들은 부끄러워하였다. 아침에 이름이 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들 누가 감히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역경과 순조로움은 고리처럼 돌아서 처음으로 되돌아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다. 자연의 법칙을 근거로 삼아서도 안 되고, 지혜를 의지처로 삼아서도 안 된다. 먼저 행복을 얻는 것도 아니고 먼저 환란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시세의 변화에 순응하여 끝내는 하나, 즉 무위로 돌아갈 뿐이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이 글은 <보임안서>와 비슷한 시기에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첫 마디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뒤의 울분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궁형을 당한 뒤 사마천의 생각과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자, 당시 고난에 처한 일반 선비들의 불행한 처치를 압축하는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이 글에서 사마천은 봉건사회의 어두운 통치에서 저주를 보냄과 동시에 하층 선비의 불우함에 동정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경 속에서 쉼 없이 분투하고 세상에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는 숭고한 인격을 높이 평가한다.

  

사마천은 시대와 괴리를 한스럽게 생각하며 자신의 울분과 비애를 토로한다. 재능 있는 선비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처가나 누이의 치맛바람 덕에 고관대작에 오른 간신 소인배들은 멋대로 설치는 반면, 진정 학문이 깊은 선비들은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세태를 가슴 치며 한탄하고 있다. 이런 세태로 인해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이 뒤섞이는 가치관의 혼동 속에서 하늘의 도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며 천도(天道)와 천명(天命)에 대해 과감하게 의심과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진리의 견지, 정의의 수호는 사마천이 평생 지켜온 신조다. 그는 인생을 소극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고대 철인들을 모범으로 삼아 부귀와 권력만을 탐내는 천박한 인생관을 경멸한다. 그는 광명정대한 마음에서 출발해 서로 속이고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악습을 과감하게 폭로하고, 그런 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공자가 아침에 이름이 나면(또는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말을 빌려 치욕을 견디며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하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한다.

  

사마천은 자신이 몸소 경험한 침통한 교훈을 통해 이지(理智)’에만 의지하거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결론은 표면적으로는 소극적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이지만을 믿고 서로 싸우길 멈추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글의 마지막은 신랄한 풍자와 조롱을 통해 무제 시대의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한나라 초기 시세의 흐름과 더불어 옮기고, 사물의 변화에 순응한황로학의 무위(無爲) 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정신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한 걸음 물러난 다음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가 그윽하게 침잠한 뒤 분발하여 <사기>를 완성한 것도 바로 물러남으로써 전진한것이었다.

  

<비사불우부>는 전체적으로 무제 시대의 전제적이고 욕망을 충족하려는 정치를 폭로하고 간신 소인배의 처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비에 대해서는 그 고결한 인품을 칭송하고, 선비의 불우한 처지를 동정한다. 글은 슬프지만 원망의 분위기는 없다. 사람들을 격려하여 분발하게 하고 힘차게 미래를 향해 전진하게 한 태사공의 마음이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이 사마천의 글인지에 대해서는 역대로 적잖은 논란이 있었다. 워낙 후대의 책<당대 구양순(歐陽詢)이 편찬한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수록된 탓에 글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제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이나 주된 표현으로 볼 때 사마천의 글이 아니라고 부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p.63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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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평전 박스 세트 - 전2권
수징난 지음, 김태완 옮김 / 역사비평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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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四書)를 집대성한 주자는 조선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중국 고대 경전의 체계화에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신 분이다. 주희의 일생을 낱낱이 파헤쳐 일생일대의 저작을 완성한 저자 수징난의 공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번역한 김태완 역자의 노고에 위로를 전한다. 대작을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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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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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두고 국정화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결국 국정화하기로 결론이 났는데, 찬반 논란이 뜨겁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반대 여론이 조금 우세한 가운데 집권 여당에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야당에서는 적극 반대하고 있는 형세다. 왜 정치권(현 집권당)에서는 국정화를 추진하는가? 그들의 말대로 우리 역사가 너무 좌파적이고 진보적으로 기술되어 그런가. 아니면 자라나는 중,고생이 검정화된 역사교과서로 배우면 패배의식에 빠지고, 주체의식이 결여되기 때문인가. 갈수록 다원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인식을 획일화하여 가르치는 것은 세계화의 추세에도 역행하는 것 같다.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오직 한 가지로 고착하려 드는지 의문스럽다. 

  

우리 반만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실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는 역사적인 사실을 뒷받침할 자료가 너무도 빈약하다. 900여회의 외침(外侵) 속에서 그 많던 자료가 모두 불타 버렸는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어용학자들이 우리의 고대 역사자료를 모두 불태우거나 일본의 밀실 창고로 빼돌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살펴 보아도 우리 고대 역사만큼 사료가 부실한 민족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하려면 사료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단군신화를 비롯한 고대사 부문의 기술은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 거의 신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체사관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조선 중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 말기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나 이암의 환단고기, 박은식의 한국통사처럼 우리 고대 역사를 자주적 사관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소장파가 있지만 아직 기존의 사관을 뒤엎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역사는 랑케가 주장한 사실로서의 역사와 카가 주장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구분하는데,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의 결정적 차이는 '가치 부여'입니다. 어떤 가치나 평가를 내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사실만을 나열한다면 그것은 사실로서의 역사이며, 반대로 어떤 가치나 평가를 내려 규범적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기록으로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조시대 사관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에는 사실로서의 역사보다는 기록으로서의 역사에 무게를 둔 것 같습니다(조선왕조실록은 예외).  역사의 기술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역사적 사실로서의 기록보다는 집권층을 대변하는 사관의 입맛에 맞게 기술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문종때 쓰여진 고려사는 조선의 입장에서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기록으로서의 역사에 가까운 사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처럼 역사서는 당대의 집권층의 의도에 맞게 기술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새삼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고 집권층이 바뀔 때마다 시각이 다른 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겠지요. 새누리당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정통성과 친일문제 때문에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그들의 기호에 맞게 윤색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비일비재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를 기술하되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 대해 좋게 쓰는 게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고대 역사에 있어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식민사관처럼 주변국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서로 조화를 이뤄서 기술될 때 역사에 대한 '가치 부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작금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도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어리석음이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염려가 됩니다. 핍박과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된 우리의 역사입니다. 유대인이 2000여 년간의 온갖 핍박과 고통 속에서 꿋꿋이 재기하여 세계에 우뚝 섰듯이 우리 민족도 과거 변방에 지나지 않았을망정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면 됩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거울삼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면 그보다 좋은 교훈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왜곡하여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교육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입니다. 유시민의 한국현대사 읽기도 기존 시각과는 다른, 사실로서의 역사 위에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잘 가미된 훌륭한 역사서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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