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인문학 명강 시리즈 1
강신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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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전히 의심합니다. 과연 사람의 본성이 선한가, 모든 사람에게 측은지심이나 불인지심이 있는가? 우리 주변에는 본성의 선함이나 측은지심이 의심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TV와 신문을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강력범죄, 아동성폭행, 학교폭력 등의 소식이 보도됩니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한 맹자의 주장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해자들에게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은 그들에 의해 반박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측은지심이 없으므로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까?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입니까?

 

맹자가 주장한 본성의 선함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 본래 가지고 있던 선함, 즉 본연적 성품의 선함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대인(大人)은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적자(赤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고,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순수성을 잃지 않은, 태어난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 대인입니다.

 

그런데 다들 선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났더라도 선하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맹자는 우산(牛山)이라는 산을 비유로 들면서 선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의 교외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많았다. 이러하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된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민둥산이 된 모습을 보고는 ‘우산(牛山)에는 일찍이 훌륭한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牛山之木(우산지목)이 嘗美矣(상미의)러니 以其郊於大國也(이기교어대국야)라. 斧斤(부근)이 伐之(벌지)어니 可以爲美乎(가이위미호)아 是其日夜之所息(시기일야지소식)과 雨露之所潤(우로지소윤)에 非無萌蘖之生焉(비무맹벽지생언)이언마는 牛羊(우양)이 又從而牧之(우종이목지)라. 是以(시이)로 若彼濯濯也(약피탁탁야)하니 人見其濯濯也(인견기탁탁야)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위미상유재언)이라하나니 此豈山之性也哉(차기산지성야재)리오.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다는 말은 과거 우산에는 숲이 무성하고 아름다운 녹지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제나라는 그 당시 강대국이었는데, 우산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양에서 가까운 인왕산이나 도봉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끼와 자귀로 날마다 나무를 베어 사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나라도 1960년대만 하더라도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소도시 부근의 산림에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었습니다.

 

식물은 주로 밤에 자랍니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가도 밤새 산소호흡을 하며 비와 이슬을 먹고 자라 나무에서 싹이 나옵니다. 하지만 소와 양이 싹을 뜯어 먹고 발로 망가뜨려서 우산은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민둥산이 된 모습만 보고서 저 산에는 일찍이 재목이 있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우산(牛山)의 본래 모습이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도끼와 자귀로 우산의 나무를 베어 가는 것처럼 매일같이 자신의 양심을 잃어버리고 있으니 양심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잔인한 모습, 포악한 모습을 보고서 그에게 선한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있다가 없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산의 나무나 사람의 마음이나 그 이치는 똑같습니다. p.18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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