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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이 책은 저자가 1년 동안 하버드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로 있는 동안 옛 책과 나눈 사적인 대화의 기록이다. 한․중․일 당대 책을 좋아하는 지식인들, 책에 미쳐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던 책벌레들의 이야기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도 즐겨한다. 옛 선비들은 주로 낭독하면서 필요할 때 책에 메모도 적고, 분량이 많을 때는 빽빽이 적은 메모지를 책에 붙이기도 하였다.
첫부분의 ‘한중일의 장서인’의 코너를 읽고 색다른 흥미를 느꼈다. 한,중,일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같이 살아왔지만 책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찍는 장서인(藏書印)의 풍습은 제각기 달랐다. 조선의 선비들은 책을 소유하면 먼저 찍혀있던 장서인을 도려내고 새 종이를 덧대서 자신이 책 주인이라는 장서인을 새로 찍었다.그만큼 책 소유욕이 강했다고 생각되고, 이 책은 내것이니 내 집안의 가보로서 천년 만년 같이 할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인은 어떠했을까? 일본의 고서에서는 몇 사람의 장서인 어지러이 찍혀있다. 먼저 소유했던 장서인 위에 붉고 굵은 글씨로 ‘소(消)’자를 덧찍어 옛주인의 소유권이 소멸했음을 분명히 하고 이제는 내것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매사에 분명하고 깔끔한 셈법을 좋아하는 일본인다운 행동이지만 너무 매몰차고 잔정이 없다.
중국인은 어떨까? 역시 통이 크고 스케일이 크다. 주인이 바뀌어도 이전 주인의 장서인에 손을 대는 법이 없다. 길게 보면 책이란 돌고 도는 것이 당연하기에 장서인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서인이 많이 찍혀 있을수록 파는 값도 사는 값도 올라간다. 그중에 유명한 장서인이 하나라도 찍혀 있으면 값이 몇 배로 뛴다. 한 권의 책에 어지러울 정도로 줄줄이 찍힌 중국 책의 장서인을 보고 있으면 그 책에 어떻게 전해왔는지 다 보인다.
책에 찍는 장서인만 보더라도 한,중,일 지식인들의 각기 다른 소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책은 세월 따라 돌고 도는 법인데, 조선의 책 소유문화는 너무 배타적이고 옹색한 것 같다. 지식은 서로 나누고 공유해야 하는데, 조선 선비들은 가문의 위신이나 자신의 체통을 지키느라 쉽게 빌려주지도 않았고 본인의 장서인을 찍어 남에게 과시했던 것 같다. 일본 또한 개인의 소유욕이 대단했던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은 모름지기 중국인처럼 자연스럽게 유전되었으면 싶다. 장서인이 많이 찍힌 것이 자랑이고 가치를 더하듯, 몇 십명을 거쳐 온 이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옛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서야 말로 말그대로 보물이요 후손들이 고이 간직할 유물이다.
책을 펼쳐보면 조선조 한 시대를 풍미한 친근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홍석주 삼형제, 추사 김정희, 이상적, 그리고 추사연구의 대가인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 이마니시 류, 중국학자 등등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지식인이 나오는데, 공통점은 모두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서가이자 장서인(藏書人)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이덕무와 정약용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 책의 주인공인가 싶다.
이덕무는 50여년의 삶을 살면서 오로지 독서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나 깨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책을 읽고 싶은데 살돈이 없어서 지인들에게 사정하여 빌려서 책을 읽었다. 때론 귀한 책을 빌려서 밤을 새워가며 베껴 쓰고 아침에 돌려주기도 하였다. 출판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는 ‘용서(傭書)’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남에게 사례를 받고 그를 위해 책을 베껴 써주는 일을 했다. 이덕무도 너무나 책을 좋아한 나머지 어려운 형편에 보탬이 될까 싶어 ‘용서인(傭書人)’ 이 되어 세상을 전전하기도 하였다. 책을 베껴 써 주면서 내용을 외우기도 하고 필사를 통해 공부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글깨나 읽은 선비가 남의 품팔이나 해서 끼니를 해결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덕무는 평생 몇 천 권의 책을 베껴썼고, 그 밖에 둘둘 말아 제본하지 않은 채 옮겨 적은 것이 수십 아름, 규장각 검서관 시절 베껴 써서 내각에 보관된 것이 다시 그만큼 될 것이라고 한다. 이덕무가 자신의 편지에서 열 손가락이 모두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이 밤톨만하게 부어 올라 피가 터질 지경인데도 하루에 수천 자씩을 베껴 썼다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이는 고금에도 드문 경우라 하겠다. 정조는 그를 초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채용하여 500여 차례의 상을 내렸을 정도로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다산은 책 읽기도 즐겨하였지만 메모광으로 더 유명하다. 18년간의 유배시절에 쓴 책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글쓰기를 즐겨했는지 알 수 있다. 500여 권의 책을 엮으면서 얼마나 많은 교정을 보고 메모를 했을지 짐작이 된다. 다산의 메모가 남아있는 대표적인 책이 <독례통고>이다. 독례통고는 예학에 관한 책인데, 워낙 방대한 자료를 망라한지라 예학을 중시하던 조선조 선비들이 이 책을 보고는 그만 기가 팍 질렀을 정도다. 다산은 이 책을 늘 곁에 두고 열심히 메모해가며 자신의 학설을 가다듬었다. 다산은 메모를 할 때마다 그저 내용만 적은 것이 아니라 메모한 날짜까지 적어 두었다. 어떤 날은 ‘우중(雨中)’이라고 날씨를 적었고, 때로는 ‘병중(病中)‘이라고 그날의 건강상태까지 메모해두었다. 여러 번 보이는 ’강진적중(康津謫中)‘은 강진의 유배지에서 썼다는 의미다. ’억무아(憶武兒)‘라고 조카 학무(學武)를 생각하며 적었다는 대목도 있다. 이런 메모 앞에서는 황량한 유배지에서 아픈 중에도 붓을 들고 책의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옮겨 적는 다산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해진다.
다산은 어디서든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기발한 생각은 잠시 머무르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떠오를 때 기록해 놓지 않으면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다산은 공부 방법에 있어서도 초록(베껴쓰기)를 강조했다. 건성으로 책을 수십 번 읽어서는 머리에 남는 게 없다. 정성들여 책 한 권을 베껴 쓰다 보면 책 속의 지식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학연, 학유 두 아들에게도 유배지에서 수시로 초록을 권장하고 게을리 할 때에는 훈계하거나 유배지로 직접 불러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초록하여 만든 책을 갖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정한 다산의 제자들은 모두 초록한 책에 이름 붙여 자신만의 독특한 책을 남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