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진달래꽃 - 김소월 시집, 1925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김소월 지음 / 소와다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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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 전 처음 소월의 작품을 대했을 때 여류시인인 줄 알았다. 시풍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시어 섬세함이 천생 여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후 소월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혼동의 충격에 빠졌다.

 

어쩜 남성이 저리도 여리고 순수한 감성을 지닐 수 있을까? 요즘은 이정섭 선생님 같은 분을 TV로 뵈어서 그런지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지마는 당시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생각이 사회통념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학창생활과 청춘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김소월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0~20대 한창 감성이 풍부했던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소월의 시를 연애편지에 옮겨 보기도 하고, 자랑삼아 소월의 시 몇 편은 외우고 다녔을 것이다.

 

절제된 언어의 조탁과 영롱한 시어의 구사로 단숨에 젊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천재 시인! 그기에다 동서고금에  법칙처럼 통하는 요절의 인생사까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고 가슴을 아리게 했던 소월의 인생사는 한 편의 시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진달래꽃, 먼후일, 님에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초혼,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산유화 등등 주옥같은 작품을 써내려간 소월의 작품들을 발간 당시 모습 그대로 다시 볼 수 있다니 감개무량하다. 특히, 오랫동안 가로읽기에 길들여진 나에게 세로읽기는 옛 추억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한 편 한 편 천천히 음미하면서 처음 읽었을 때의 떨림을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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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 가사집 겨레고전문학선집 39
정극인 외 지음, 현종호 엮음 / 보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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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 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 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르는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소나무 숲 울창한 속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 행화는 석양 속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했나 붓으로 그려 냈나 조물주의 솜씨가 물물마다 대단하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거니 흥이야 다를 쏘냐. 사립문에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하여 산속 하루가 적적한데 한중진미를 알 이 없어 혼자로다.

 

여보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답청일랑 오늘 하고 욕기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 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칡베로 밭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 봄바람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낙홍은 옷에 진다. 술병이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작은 아이에게 주막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맑은 모래 깨끗한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곳인가.

 

소나무 숲 가는 길에 두견화를 붙들고 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수많은 마을이 곳곳에 벌여 있네. 연하일휘는 비단을 펼쳤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 사.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으리오. 단표누항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 한들 어떠하리'

 

<풀 이>

세상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나의 이 생활이 어떠한가.옛 사람들의 운치 있는 생활을 내가 미칠까 못 미칠까?세상의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서 나만한 사람이 많건마는왜 그들은 자연에 묻혀 사는 지극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인가?몇 간 쯤 되는 초가집을 맑은 시냇물 앞에 지어 놓고,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속에 자연의 주인이 되었구나!

 

엊그제 겨울이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저녁 햇빛 속에 피어 있고,푸른 버들과 아름다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조물주의 신비스러운 솜씨가 사물마다 굉장하구나(야단스럽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기운을 끝내 이기지 못하여소리마다 아양을 떠는 모습이로다.자연과 내가 한 몸이거니 흥겨움이야 다르겠는가?사립문 주변을 걷기도 하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니,천천히 거닐며 나직이 시를 읊조려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한데,한가로운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없이 나 혼자로구나.

 

여보게 이웃 사람들이여, 산수 구경을 가자꾸나.산책은 오늘 하고 냇물에서 목욕하는 것은 내일 하세.아침에 산나물을 캐고 저녁에 낚시질을 하세.

 

이제 막 익은 술을 갈건으로 걸러 놓고,꽃나무 가지를 꺾어 잔 수를 세면서 먹으리라.화창한 바람이 문득 불어서 푸른 시냇물을 건너오니,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하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술동이 안이 비었으면 나에게 아뢰어라.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서 술집에서 술을 사 가지고,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 시냇가에 혼자 앉아,고운 모래가 비치는 맑은 물에 잔을 씻어 술을 부어 들고,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무릉도원이 가까이 있구나. 저 들이 바로 그곳인가?

 

소나무 사이 좁은 길로 진달래꽃을 손에 붙잡아 들고,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수많은 마을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네.안개와 놀과 빛나는 햇살은 아름다운 비단을 펼쳐 놓은 듯.엊그제까지도 거뭇거뭇했던 들판이 이제는 봄빛이 넘치는구나.

 

공명과 부귀가 모두 나를 꺼리니,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비록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잡스러운 생각은 아니 하네.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것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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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를 겪고 난 뒤라 그런지 봄이 그립다. 아직 봄이 오려면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어제 오늘 촉촉이 내린 비가 봄비 마냥 느껴진다. 비교적 겨울이 긴 우리나라 날씨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긴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나 엄동설한의 겨울은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 간사한 내 마음이다.

 

가끔 시골의 향수가 그리울 때,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가롭게 쉬고 싶을 때 생각나는 옛글이 있다. 상춘곡(賞春曲)도 내가 좋아하는 가사문학의 하난데, 이런 내 기호에 안성맞춤인 글이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이 문장을 외우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이제는 서두와 말미를 조금 빼고는 거의 다 잊어 버렸다. 가사문학이 그렇듯이 적절한 운율이 있어서 노래를 부르듯 읽으면 운율이 느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장단에 흥이 절로 나서 심심풀이로 중얼중얼 읊고 다니기도 했다.

 

가사의 내용을 보면 또 얼마나 목가적이고 낭만적인가? 요즘 가끔 자연인을 예찬하는 TV방송을 보는데, 부러울 때가 있다. 세속적인 잣대로 보면 인생의 실패자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산수를 벗 삼아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울하진 않을 것 같다. 하기야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을까?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게 성공한 인생이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올 봄에는 봄나들이 나가서 실컷 자연풍광을 구경하면서 옛 선비들의 고상한 정취를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다. 필자가 상춘곡을 부르면서 느꼈던 그 감정을 실어서 막걸리 몇 병 받아놓고 친구와 오붓하게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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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 시리즈 세트 - 전6권 완역 사기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사마천 지음, 신동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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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삼국지를 백 번 읽는 것 보다 사기 한 번 읽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전 국민의 애독서인 삼국지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사기(史記)’가 삼국지보다 훨씬 교훈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고, 인생을 성찰할 수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와 다르게 역사적 사실을 살짝 비틀어 삼국지(연의)’를 흥미 위주로 썼다면,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몸소 여러 고을을 방문하여 수많은 일화와 입으로 전해오는 얘기를 채록하여 썼기에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고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된다. 하지만 유학자가 쓴 정통 사서라 읽을 때 문장이 딱딱하고 다양한 고사의 인용으로  이해가 어려워 사기를 완독하기란 쉽지 않다.  짧은 시간에 사기를 완독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으면 인간미 넘치는 사기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양각색의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과 협객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되돌아보고 내 인생의 좌표를 정하는 데 거울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이제껏 김원중 교수의 사기와 김영수 교수의 사기가 번역되어 시중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이번에 또 신동준 박사의 사기가 한자 원문까지 실려 완역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또 한 번 사기를 읽으며 예전에 느꼈던 진한 감동을 재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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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보급판) - 사기 130권을 관통하는 인간통찰 15
김영수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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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최고의 태평성세는....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만약 이를 목표로 삼아 요즘 풍속을 옛날로 돌이키려하거나 백성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눈과 귀는 아름다운 소리나 좋은 모습을 보고 들으려 하고, 입은 맛있는 고기 따위를 먹고 싶어 한다.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고, 마음은 권세와 유능하다는 영예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런 풍속이 백성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든 지는 벌써 오래다. 그러므로 묘한 이론을 가지고 집집을 교화시키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일에 힘쓰고 각자 일에 즐거워하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밤낮 멈추는 때가 없다.

 

세간에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이 길거리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천하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드는 것도 이익 때문이고, 소란을 떨며 흩어지는 것도 이익 때문이다. 1,000승의 마차를 가진 왕, 1만 호를 가진 제후, 100채의 집을 가진 갑부들도 가난을 걱정하는데 하물며 호적에 간신히 이름이나 올라 있는 백성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물자를 축적하는 이치는 물건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힘쓰는 데 있으니 자금이 (흐르지 않고) 막히게 해서는 안 된다.

 

재물과 자금은 물이 흐르듯 원활하게 유통시켜야 한다.

 

무릇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두루 알려지게 된 까닭은 (부유한) 자공이 공자를 앞뒤로 모시고 도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력을 얻으면 세상에 더욱 드러난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상인들)1만 승()의 제왕과 대등한 예를 나누고 명성을 천하에 드러냈으니 이 어찌 그들의 재력 때문이 아니리요?

 

관중 지역 땅은 천하의 3분의 1이고 인구는 10분의 3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부를 계산해보면 천하의 10분의 6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자가 조정에 들어가 일을 깊게 도모하고 정사를 토론하고 믿음과 절개를 지키며 죽는 것이나, 선비가 동굴에 숨어 명성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결국은 부귀를 위한 것이다.

 

()는 인간의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모두들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속담에 '100리 먼 곳에 나가 땔나무를 팔지 말고, 1,000리 먼 곳에 나가 곡식을 팔지 말라.‘고 했다.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고, 100년을 살려거든 덕을 베풀어야 한다.

 

오늘날 관에서 주는 녹봉도 없고 작위나 토지에 따른 수입도 없는데, 마치 이런 것을 가진 사람들처럼 즐겁게 사는 사람이 있으니 이들을 일러 소봉(素封)’이라 한다. 이들은 조세수입(오늘날 이자수입)으로 사는 것이다.

 

재산이 없는 사람은 힘써 생활하고, 조금 있는 사람은 지혜를 써서 더 불리고, 많은 사람은 시기를 노려가며 이익을 더 얻으려 한다. 이것이 삶의 진리다.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 몸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서 돈 버는 것은 현명한 자들이 힘쓰는 바다. 따라서 가장 기본이 되는 농업으로 부를 얻는 것이 최상이고, 말류인 장사로 치부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간악한 수단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최하책이다. 반면에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벼슬하지 않으려는 이상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오랫동안 궁색하게 살아오면서 말로만 인의(仁義) 어쩌구 하는 자들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무릇 보통사람들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고,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바른 길이다.

 

부자가 되는 것에 정해진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물에 주인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재능이 있는 자에게 재물이 모이고, 못난 사람에게는 기왓장 흩어지듯 재물이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시의 군주와 맞먹고, 수만금을 모은 자는 왕처럼 즐겼다. 이것이 소봉(素封)’이다.

 

어떤가? 이 정도면 오늘날의 전문적이고 설득력 있는 경제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한 걸음 앞서 있지 않은가? 특히 정치와 경제를 연계시키면서, 가장 못난 정치를 백성들과 더불어 부()를 다투는 것으로 본 대목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에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재벌가 자녀)이 저잣거리에서 죽는 법이 없다.’는 말이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이상이면 헐뜯고, 백 배 이상이면 두려워하고천 배 이상이면 그 사람 일을 해주고, 만 배 이상이면 노예가 된다.’는 대목 등은 지금 현실과도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 말들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p.5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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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보급판) - 사기 130권을 관통하는 인간통찰 15
김영수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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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친구>라는 영화는 우정의 변질을 통해 인간관계의 덧없음을 잘 보여주었으나, 오히려 우정의 참뜻을 제대로 모르는 철딱서니들은 깡패들의 싸구려 우정과 의리에 환호를 보냈다. 어떤 종류가 되었건 인간관계라는 것이 복잡하고 미묘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사마천은 인상여와 염파의 문경지교를 아름답게 그리고 난 다음 또 한 쌍의 문경지교를 소개하는데, 이번에는 인상여와 염파의 우정과는 사뭇 다른 경우이다. 사마천의 문경지교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변질되고 끝에 가서는 서로 원수가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까지 느끼게 한다. 얄미우리만치 진솔한 <사기>의 매력이 바로 이런 대목에서 번득이는데, <사기>는 인간과 세상이 그러하듯 종종 두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선택과 사색을 다그치곤 한다.

   

대량(大梁 :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출신의 장이(張耳. 기원전?~기원전202)와 진여(陳餘. 기원전?~204)는 모두 전국시대라는 약육강식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나이가 약간 위인 장이는 위나라 현령으로 있으면서 진여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고, 진여도 그런 장이를 친형 이상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그야말로 두 사람은 문경지교를 나누는 사이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점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위나라의 숨은 인재들이란 명성을 얻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기원전 225년 위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진나라는 차례차례 초제나라 등을 멸망시켜 마침내 천하 통일에 성공했다. 그 때가 기원전 221년이었다. 진나라는 위나라의 인재로 명성이 높았던 장이와 진여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두 사람은 함께 진(: 하남성 회양현)으로 도망쳐 신분과 명성을 숨긴 채 성문을 지키는 일을 하며 지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위기를 피하고 난관을 헤쳐 나갔다. 이렇게 10여 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사이 진시황이 갑자기 쓰러졌고, 천하는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

   

기원전 209년 평범한 고용 농민 출신인 진승이 진의 타도를 외치며 농민들을 모아 들불처럼 천하를 휩쓸었다. 이때 장이와 진여는 진승 밑에 들어가 교위(장군의 보좌관) 벼슬을 받고 조나라 땅을 공격했다. 그런데 얼마 뒤 장이가 진나라 군대의 협격을 받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친구진여는 이 위급한 상황을 알고서도 제때에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생기고 말았다.

   

이윽고 초패왕 항우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관중지방을 압박함으로써 장이는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항우는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난 군소 세력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였는데, 장이가 상산왕에 임명된 데 비해 진여는 세 개의 현을 관할하는 작은 자리에 머무르는데 그쳤다. 진여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분함과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진여는 제나라왕 전영을 부추겨 장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장이는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조나라 전체가 진여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진여에게 패해 각지를 전전하던 장이는 한왕 유방에게 투신했다. 이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기원전 205, 항우에게 선전포고를 결행한 유방은 초나라로 진격하기에 앞서 사신을 보내 조나라의 협조를 구했다. 그러자 진여는 교환조건으로 장이의 목을 요구했다. 장이를 죽일 수 없었던 유방은 장이와 닮은 사람을 찾아 그 목을 베어 진여에게 보냈고, 진여는 약속대로 군사를 파견하여 유방을 도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머리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진여는 군대를 바로 철수시켰고, 그 결과 유방과 등을 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204, 유방은 한신과 장이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나라는 크게 패했고, 진여 또한 전사했다. 그리고 장이는 조왕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우여곡절이 많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을 맺었다. 서로를 위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던 우정이 서로의 목을 원하는 원수관계로 변질되고서야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난세의 인간관계는 죽음으로 맺어진 문경지교조차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들고, 같은 하늘 밑에서는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지간으로 만든다. 인간관계를 이렇게 비정하게 변질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사마천이 <장이진여열전>의 마지막 대목에 남긴 논평이 아쉬운 대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장이와 진여는 세상에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이 자자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식객은 물론 마부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준걸이 아닌 사람이 없었으며. 그들이 머물던 나라에서 경이나 재상이 되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는 당초 가난하고 보잘것없었을 때 목숨을 걸고 서로 믿기로 맹세하였으니,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몸을 맡겨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없애려 했다. 처음에는 서로 사모하고 믿는 마음이 그리도 진실하더니 뒤에는 어찌 그리도 심하게 서로 배반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들의 명성이 높고 빈객이 많았다고는 하나, 그들이 걸어온 길은(나라를 서로 사양하면서 개인적 이익을 초월했던) 오나라의 태백이나 연릉(延陵)의 계자(季子)와는 엄연히 달랐다.

   

사마천은 이 열전에서 진나라 말기에는 진에 대항했고 그 뒤 초한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던 조나라의 상황과 이곳에서 일어나 활약한 장이와 진여의 시대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당시 숱한 영웅들의 반열에 올라 천하를 울렸던 장이와 진여의 진한 우정과 그 뒤 생사존망의 다급한 상황에서 오해로 인해 우정을 끊고 대립하다 결국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과정을 안타까운 어조로 묘사했다. 이렇게 사마천은 두 사람의 결별을 대세에 따른 이해관계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이보다는 인간관계의 비정함에 울적함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도 비정한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때로는 거기에 동조하곤 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란, 인간의 마음이란 주변 환경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변질된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뛰어넘고, 빈부를 뛰어넘고, 신분을 뛰어넘어 진정한 우정을 쌓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 있으면 우정의 진심을 알게 되고, 한 사람은 가난하고 한 사람은 부유하면 우정의 태도를 알게 되고, 한 사람은 출세하고 한 사람은 천하면 우정의 진정성이 나타난다.”[<급정열전> 중 적공(翟公)의 말]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변질된 우정만큼 악취 나는 인간관계도 없다. 변질은 늘 애당초의 진의마저 의심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회의까지 일게 한다. 인간관계가 참으로 어려운 까닭도 변질되어버린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늘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P.20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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