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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4년 12월
평점 :
우리들의 생각이나 의견, 의지는 각자의 경험과 자란 환경 등에 의해 형성됩니다. 어떤 환경에서 보고 듣고 자랐느냐에 따라서 일본말도 하고 한국말도 하고 중국말도 하고 몽골말도 하듯이, 어떻게 글자를 익혔느냐에 따라서 한글도 쓰고 영어도 쓰고 일본어도 쓰지요. 어떤 음식을 먹고 자랐느냐에 따라서 마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단무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것은 흰 종이에 어떤 물감을 들이느냐와 같은 문제입니다. 어떤 색깔이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연에는 한 가지 종류, 한 가지 빛깔, 한 가지 모양의 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수만 가지 종류, 수만 가지 색깔, 수만 가지 모양의 꽃이 있듯이 인류는 이렇게 이 세상에 각양각색의 풍성한 문화를 만들어왔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의 원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을 보면 몇 가지 종만 지구상에 남기고 나머지 종은 다 없애려는 것 같습니다. 특정한 종류의 색깔과 모양을 가진 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려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한 가지 문화, 한 가지 종교, 한 가지 언어 등 한 가지를 중심에 놓고 나머지는 다 열등하고 나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류가 수십만 년에 걸쳐 축적해온 수만 가지 문화와 언어와 종교와 민족이, 마치 자연계에서 생물종이 사라지듯, 지금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생물종을 보호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갖가지 소수민족, 소수종교, 소수문화들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보호, 생물종에 대한 보호에는 눈을 뜨면서 인류의 다양한 문화를 보호하는 데는 아직 눈 뜨지 못한 걸 보면 우리는 아직도 정신문화 수준이 낮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는 개개인 저마다의 생각과 습관, 느낌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지요. 남은커녕 자신의 아내나 남편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취향조차 존중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생각, 자기의 습관, 자기의 이념, 이것을 중심으로 놓고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상대가 미워지고 원망이 듭니다. 우리가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자기만이 옳다는 뜻입니다. 자기 것만 고집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만 내려놓으면 화날 일도 없고 짜증날 일도 없고 미워할 사람도 없습니다.
다 자기 취향이고 생긴대로 사는 것이니 무조건 그냥 놓아두고 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에 수만 가지 꽃이 있고 수만 가지 식물이 있지만 내가 사는 내 뜰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을 심을 수 있는 자유 또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삶에 있어서는 내 생각을 중심으로 해 놓고 살 수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맞는 사람하고 살 수도 있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살 수도 있어요. 다만 자기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남을 미워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의 얼굴이 내 뜻에 맞지만 생각은 내 뜻에 안 맞는다고 하면 꽃 색깔은 마음에 드는데 모양은 마음에 안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그 종에 그 모양에 그 색깔인 존재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면 통째로 받아들이고, 싫으면 통째로 심지 않으면 되는데 개중 빛깔만 가져오려 들거나 모양만 가져오려 들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을 만나 함께할 때는 우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꽃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꽃의 모양과 빛깔 중에 어느 하나만 좋고 어느 하나는 싫다 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한두 가지가 좋아서 받아들였다면 그 나머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할 때도 그런 몇 가지 선택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혼자 사는 게 낫습니다.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서 같이 살고 싶다면 갈등이 생겨요.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저처럼 어떤 목표를 두고 함께하는 일 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는 별로 구애를 받고 싶지 않다면 혼자 살아야 해요. 그런데 결혼을 하려면 자기 지향에만 딱 맞게 사는 게 아니라 상대의 요구에도 맞춰줘야 합니다. 휴일에 남편과 카페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꿈이라는 여자와 결혼했다면, 남편은 무슨 일을 하러 다니든 일주일에 한 번쯤은 아내의 요구를 들어줘야 해요. 그걸 해 주지 않으면 불평이 생깁니다.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잘못인 건 아닙니다.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 때는 자기의 삶 속에서 그걸 들어줄 시간을 내야 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들어줄 시간을 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사람과 결혼하지 말았어야지요. “당신은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결혼하면 남편들은 부인에게 이런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 됩니다. 사랑이 중요한 지 종교가 중요한 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게 어찌보면 우스운 것 같지만 그게 인간 심리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상대가 자기 역시도 귀하게 여겨 주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가 중요하지 누구와 마시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커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조건을 내거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그냥 그 사람은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거예요. p.241~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