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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 가사집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39
정극인 외 지음, 현종호 엮음 / 보리 / 2009년 2월
평점 :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 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 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르는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소나무 숲 울창한 속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 행화는 석양 속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했나 붓으로 그려 냈나 조물주의 솜씨가 물물마다 대단하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거니 흥이야 다를 쏘냐. 사립문에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하여 산속 하루가 적적한데 한중진미를 알 이 없어 혼자로다.
여보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답청일랑 오늘 하고 욕기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 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칡베로 밭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 봄바람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낙홍은 옷에 진다. 술병이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작은 아이에게 주막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맑은 모래 깨끗한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곳인가.
소나무 숲 가는 길에 두견화를 붙들고 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수많은 마을이 곳곳에 벌여 있네. 연하일휘는 비단을 펼쳤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 사.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으리오. 단표누항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 한들 어떠하리'
<풀 이>
세상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나의 이 생활이 어떠한가.옛 사람들의 운치 있는 생활을 내가 미칠까 못 미칠까?세상의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서 나만한 사람이 많건마는왜 그들은 자연에 묻혀 사는 지극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인가?몇 간 쯤 되는 초가집을 맑은 시냇물 앞에 지어 놓고,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속에 자연의 주인이 되었구나!
엊그제 겨울이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저녁 햇빛 속에 피어 있고,푸른 버들과 아름다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조물주의 신비스러운 솜씨가 사물마다 굉장하구나(야단스럽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기운을 끝내 이기지 못하여소리마다 아양을 떠는 모습이로다.자연과 내가 한 몸이거니 흥겨움이야 다르겠는가?사립문 주변을 걷기도 하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니,천천히 거닐며 나직이 시를 읊조려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한데,한가로운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없이 나 혼자로구나.
여보게 이웃 사람들이여, 산수 구경을 가자꾸나.산책은 오늘 하고 냇물에서 목욕하는 것은 내일 하세.아침에 산나물을 캐고 저녁에 낚시질을 하세.
이제 막 익은 술을 갈건으로 걸러 놓고,꽃나무 가지를 꺾어 잔 수를 세면서 먹으리라.화창한 바람이 문득 불어서 푸른 시냇물을 건너오니,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하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술동이 안이 비었으면 나에게 아뢰어라.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서 술집에서 술을 사 가지고,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 시냇가에 혼자 앉아,고운 모래가 비치는 맑은 물에 잔을 씻어 술을 부어 들고,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무릉도원이 가까이 있구나. 저 들이 바로 그곳인가?
소나무 사이 좁은 길로 진달래꽃을 손에 붙잡아 들고,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수많은 마을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네.안개와 놀과 빛나는 햇살은 아름다운 비단을 펼쳐 놓은 듯.엊그제까지도 거뭇거뭇했던 들판이 이제는 봄빛이 넘치는구나.
공명과 부귀가 모두 나를 꺼리니,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비록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잡스러운 생각은 아니 하네.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것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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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를 겪고 난 뒤라 그런지 봄이 그립다. 아직 봄이 오려면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어제 오늘 촉촉이 내린 비가 봄비 마냥 느껴진다. 비교적 겨울이 긴 우리나라 날씨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긴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나 엄동설한의 겨울은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 간사한 내 마음이다.
가끔 시골의 향수가 그리울 때,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가롭게 쉬고 싶을 때 생각나는 옛글이 있다. 상춘곡(賞春曲)도 내가 좋아하는 가사문학의 하난데, 이런 내 기호에 안성맞춤인 글이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이 문장을 외우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이제는 서두와 말미를 조금 빼고는 거의 다 잊어 버렸다. 가사문학이 그렇듯이 적절한 운율이 있어서 노래를 부르듯 읽으면 운율이 느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장단에 흥이 절로 나서 심심풀이로 중얼중얼 읊고 다니기도 했다.
가사의 내용을 보면 또 얼마나 목가적이고 낭만적인가? 요즘 가끔 자연인을 예찬하는 TV방송을 보는데, 부러울 때가 있다. 세속적인 잣대로 보면 인생의 실패자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산수를 벗 삼아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울하진 않을 것 같다. 하기야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을까?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게 성공한 인생이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올 봄에는 봄나들이 나가서 실컷 자연풍광을 구경하면서 옛 선비들의 고상한 정취를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다. 필자가 상춘곡을 부르면서 느꼈던 그 감정을 실어서 막걸리 몇 병 받아놓고 친구와 오붓하게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