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365일 - 하루 한 수
이병한 엮음 / 궁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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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消暑 (소서 : 더위를 삭이며)

                                               白居易(백거이. 772 ~ 846) 

 

何以消煩暑 (하이소번서무엇으로 짜증스런 더위를 삭일까

端居一院中 (단거일원중집안에 단정히 앉아 있으면 될 일.

眼前無長物 (안전무장물눈앞에 거추장스러운 것들 없고

窓下有淸風 (창하유청풍창 아래서 시원한 바람이 이네.

熱散由心靜 (열산유심정마음이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涼生爲室空 (양생위실공방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此時身自得 (차시신자득이러한 것 나 스스로 느끼긴 하지만

難更與人同 (난갱여인동남과 함께하기는 어렵다네.

  

여름날 뜨거운 음식을 섭취하며 땀을 흘리면서도 시원하다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땡볕아래서 오싹 한기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조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한겨울 추운 방 안에서도 땀을 흘리지만,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정(禪定)에 들면 더위나 추위가 스며들 틈이 없다.

 

한여름 땡볕 더위는 대부분 견디기가 어렵고, 열대야(熱帶夜) 더위는 밤에도 낮처럼 덥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서늘함을 찾아 나서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하지만 더위는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은 아니다. 영리한 사람은 더위 한가운데서 그 더위를 이겨내는 방안을 찾고 더운 철을 오히려 즐기면서 살 줄도 안다. 달빛 아래 대숲 저 안쪽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르르 더위가 사라지기도 한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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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의 배신
라파엘 M. 보넬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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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完璧)`의 고사가 와전되어 요즘은 `완전무결`의 뜻으로 쓰인다.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무지개를 쫓는 환상처럼 결코 만족을 모른다. 완벽한 스펙을 요구하는 현대사회가 더욱 강박을 부채질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좀더 너그러워질때 행복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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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 비행기 1등석 담당 스튜어디스가 발견한 3%의 성공 습관
미즈키 아키코 지음, 윤은혜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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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뼉 한 번의 법칙
누군가를 처음 만나 마주 본 아주 짧은 순간 첫인상이 결정된다는 이론을 미국의 이미지 컨설턴트는 ‘손뼉 한 번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짝! 하고 손뼉을 한 번 치는 짧은 순간에 사람의 뇌는 상대방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때 사람은 ‘밝다’와 ‘어둡다’, ‘느낌이 좋다‘와’느낌이 안 좋다‘, ’부유해 보인다‘와 ’가난해 보인다‘, ’시원스럽다‘와 ’답답하다‘와 같이 정반대에 있는 인상의 쌍 중에서 어느 한쪽을 순간적으로 선택하게 된다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이 1971년 제창한 ‘메라비언의 법칙’에 따르면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데는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가 55퍼센트, 귀로 받아들인 정보가 38퍼센트, 말의 내용이 7퍼센트의 비율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인식되는 첫인상은 좋았더라도 대화를 해본 순간 그 사람의 얄팍한 인격이 보였다거나 가치관이 다름을 느끼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첫인상이 좋았을수록 차이가 크게 느껴져 이미지가 큰 쪽으로 하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에 비해 첫인상은 평범했더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다’, ‘의외로 멋진 구석이 있네’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최초의 평가가 낮았던 만큼 다음번에 급격히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현상을 나는 ‘두 번째 인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첫인상이 시각정보에 의해 지배되는데 반해, 그 다음 단계인 두 번째 인상은 시각, 청각, 말의 내용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구성된 인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첫인상보다 두 번째 인상이 더 좋은 쪽이 훨씬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승무원 일에 종사하다 보면 두 번째 인상으로 그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진다.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두 번 째 인상이 좋다면 ‘의외로 좋은 사람이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좋은 의미에서 예측이 어긋난 셈이다. 그러나 첫인상이 안 좋았는데 두 번째 인상까지 나쁘다면 나중에 아무리 만회하려고 해도 회복할 방법이 없이 ‘인상이 나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계속 붙이고 있게 된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알고 보니 역시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나쁜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고 만다.
   
두 번째 인상이 좋은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많다. 설령 처음 만났을 때는 우연히 기회가 맞아떨어져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인상에까지 그런 요행수를 바랄 수는 없다. 첫인상의 허들을 뛰어넘어 상대방에게 첫인상 못지않게 호감이 가는 두 번째 인상을 안겨줄 수 있을지는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달려 있다.
   
퍼스트클래스의 승객을 통해 배우게 된 두 번째 인상을 좋게 만드는 비결이 있다. 이는 첫인상은 물론 두 번째 인상까지 좋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결이기도 하다. 첫째는 자세, 둘째는 얼굴, 셋째는 목소리, 이 3가지다.
  
앞서 언급한 ‘메라비언의 법칙’에 의하면, 처음 만난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은 고작 7퍼센트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고민하는 것 이상으로 자세와 표정, 복장과 같은 외견, 즉 비주얼에도 중점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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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가 만드는 초두효과
승무원은 끊임없이 승객의 시선을 받으며 일한다. 승무원은 유니폼과 머리 모양 같은 겉모습도 인격의 일부라는 교육을 받는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차림새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복장이나 머리 모양에서도 그 사람의 정신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에 외모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승객이 승무원의 모습을 보고 “오늘은 단정하고 지성적이고 예의바른 승무원 덕분에 비행시간 내내 기분이 좋았어요.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젊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나도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생각했답니다.”라고 칭찬의 말을 남겨줄 때면 하늘을 날 것같이 기뻤다. 일일이 말로 설명하지 않고도 우리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승무원 사이에서는 인사만 잘해도 만사형통이라는 말이 있다. 승객에게는 물론이고 선배와 직장 상사, 동료, 이웃 사람 등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 꾸준히 하면 높은 호감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인사는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 주고받기 때문에 첫인상으로 오래 기억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이 나중에까지 큰 영향을 준다는 심리효과를 심리학에서는 초두효과라고 한다. 반대로 마지막에 제시된 것이 인상적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 효과를 최신효과라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보면 제일 첫 줄에 주연 배우가, 마지막 줄에는 특별 출연 배우의 이름이 올라간다. 처음과 마지막이 가장 눈에 띄는 장소이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위치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면 만나자마자 큰 목소리로 기운차게 인사를 하자.
  
이와 같이 승무원은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줄이고 친근감을 주는 태도를 취하도록 항상 신경을 쓴다.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고 다가서려고 하는 후배를 괴롭힐 사람은 없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인사하기를 꼭 실천하기 바란다. 
p.152~155/18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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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서 초한지를 읽다 - 전쟁같은 삶을 받아낸 천 개의 시선
신동준 지음 / 왕의서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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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항우가 광무에서 유방과 대치할 때 사마용저는 초나라의 대부분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 구원에 나섰다.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 때 그가 제나라를 구원하고 한신의 남하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천하대세는 급격히 유방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어떤 이가 사마용저에게 이같이 간했다.

  

한나라 군사는 멀리 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기(銳氣)를 당할 길이 없습니다. 정면으로 맞붙을 경우 병서에서 지적했듯이 제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싸우는 까닭에 쉽게 패해 흩어질 것입니다. 차라리 영루(營壘)를 굳건히 지키면서 제나라 왕으로 하여금 믿음직한 신하를 한나라에 함락된 성에 보내 설득하느니만 못합니다. 함락된 성의 군민들은 군왕이 살아있고, 초나라가 구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바로 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는 2천 리 밖에서 달려와 제나라 땅에 머물고 있는 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나라 성들이 모두 저항하면 밥 얻어먹을 곳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되면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 못한 채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전에 이좌거가 진여에게 건의한 계책과 사뭇 닮았다. 지구전을 펼쳐 한신의 군대를 고사시키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병법의 대가를 자처한 사마용저는 한신을 업신여기며 단박에 이를 물리쳤다나는 줄곧 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어 그를 쉽게 상대할 수 있다. 그는 표모(漂母)에게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 자이다. 또한 바짓가랑이를 지나는 모욕을 받았으니 뛰어난 용기도 없다. 그러니 족히 두려워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제나라를 구원하러 왔다가 싸우지도 않고 그들을 항복시키면 무슨 전공(戰功)이 있겠는가? 지금 싸워 승리하면 제나라 땅의 반쯤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열국의 장수들 내에서 한신의 벼락출세에 관한 일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마용저가 한신을 이토록 무시하게 된 배경을 사서의 기록에서 찾아 살펴보기로 하자.

     

한신은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淮陰縣) 출신이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고 덕행이 없었던 까닭에 천거를 받아 관리로 뽑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생산업에 종사하거나 장사를 하는데도 능하지 못해 늘 남에게 붙어서 음식을 얻어먹었다. 사마천은 한신의 고향을 방문한 뒤 <회음후열전>에서 이같이 소개했다.

   

내가 회음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말하길, ‘한신은 포의로 있을 때도 그 뜻이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모친이 돌아 가셨을 때 너무 가난해 장사(葬事)도 지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높고 넓은 평지에 무덤을 만들어 그 곁에 1만호가 들어앉을 수 있게 했다.’ 내가 그의 모친 무덤을 보니 실로 그러했다.”

   

계속 남의 집에 얹혀 밥을 얻어먹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몇 달이 지나자 한신이 기식하고 있던 정장 집의 아내가 그를 미워해 새벽에 밥을 지어 식구들끼리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식사시간이 되어 한신이 갔으나 밥을 차려주지 않자 한신도 그 뜻을 알고는 화를 내며 끝내 의절하고 떠났다. 하루는 한신이 성 아래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빨래하던 여인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밥을 내주었다. <회음후열전>은 빨래하는 여인을 표모(漂母)’로 기록해놓았다. 한신이 기뻐하며 표모에게 말했다.

내 훗날 반드시 당신에게 크게 보답하겠소.”

표모가 화를 냈다.

지금 당당한 대장부가 스스로 밥벌이도 못하고 있지 않소. 내가 왕손(王孫)을 가엾게 여겨 밥을 준 것이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왕손은 원래 왕실의 자제를 뜻하는 말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자제의 통칭으로 사용되다가 청년에 대한 존칭으로 전용되었다. 제후의 아들을 뜻하는 공자(公子)가 후대에 청년의 의미로 쓰인 것과 같다. 사마용저가 표모운운한 것은 바로 이 일화를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걸식표모(乞食漂母)이다. 밥을 빌어먹고 사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초지를 잃지 않고 정진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한번은 한신이 회음의 백정들이 사는 거리를 지나다가 한 청년과 시비가 붙었다. 청년은 한신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체구는 장대하고 항상 칼을 차고 있으나 실은 겁쟁이일 뿐이다.” 이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한신을 모욕했다. “네가 죽일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라. 그렇지 못하면 내 바짓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라.”

한신이 그를 오랫동안 주시하더니 이내 그의 바짓가랑이에 몸을 구부려 집어넣고는 엎드려 기어갔다. 저자(市場)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겁쟁이라며 비웃었다. 사마용저가 바짓가랑이운운한 것은 바로 이 일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바로 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이란 뜻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이다. 걸식표모와 같은 취지로 사용된다. 높은 뜻을 세운 까닭에 작은 모욕이나 치욕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늘 칼을 차고 다녔던 한신은 항량이 회하(淮河)를 건널 때 그의 뒤를 좇았으나 시종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항량이 패한 후 그는 항우에게 소속되었다. 항우는 그를 낭중(郎中)으로 삼았다. 한신이 자주 항우에게 계책을 올렸으나 항우는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유방이 한중으로 갈 때 한신도 초나라를 빠져나와 유방에게 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양곡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직에 있다가 다른 사람의 죄에 연루되어 참수당할 처지에 놓였다. 일당 13인이 모두 참수되고 마침내 한신의 차례가 되었다. 한신이 머리를 들어보니 마침 등공 하우영이 보였다. 한신이 말했다.

    

군주는 천하를 얻길 원치 않는 것입니까? 왜 장사(壯士)를 참하려는 것입니까!”

하우영이 호걸의 기개를 갖춘 한신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곧 그를 풀어주고 함께 얘기를 나눠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유방에게 소개했다. 그를 보급 담당의 치속도위(治粟都尉)에 제수했다. 그를 기재(奇才)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이후 승상 소하의 천거로 유방을 만나 전격적으로 군사(軍師)에 발탁됐다.

   

사마용저도 한신의 이런 전설적인 얘기를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심 조심하며 작전 계획을 짜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는 자만하며 한신을 업신여겼다. 고금을 막론하고 적장을 얕보고도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한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병법의 대가였다. 사마용저는 싸움도 하기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갔다. 기원전 20411,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이 한나라 군대와 유수를 사이에 두고 진세(陣勢)를 펼쳤다. 유수는 산동성 동부에 있는 고밀현 서쪽을 흐르는 강이다. 한신이 밤에 사람을 시켜 자루 1만여 개를 만든 뒤 그 속에 모래를 가득 채워 유수 상류를 막게 했다. 이어 군사를 이끌고 유수를 반쯤 건너 사마용저를 공격하다가 짐짓 돌아서서 도망쳤다. 이에 사마용저가 매우 우쭐대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일찍이 한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군사를 이끌고 한신의 뒤를 바삐 쫓았다. 한신은 유수를 건너자마자 신호를 보내 물막이 자루를 터뜨리게 했다. 물이 일시에 흘려내려와 사마용저의 군사들을 덮치자 강을 사이에 두고 초나라 군대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한신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맹공을 가했다. 초나라의 용장 사마용저는 맥없이 전사하고 말았다. 유수 동쪽에 있던 양국 연합군 군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제나라 왕 전광도 곧바로 몸을 숨겨 도망쳤다. 한신이 이들을 추격한 끝에 성양에서 전광을 포로로 잡았다. 관영도 제나라 장수 전광을 사로잡은 뒤 박양까지 진격했다.

   

재상 전횡은 전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군사들을 이끌고서 관영에게 역공을 가했다. 그러나 영하(산동성 내무)에서 오히려 관영에게 대패하자 위나라 쪽으로 달아나 팽월에게 몸을 의탁했다. 관영이 여세를 몰아 제나라 장수 전흡(田吸)을 천승(千乘 : 산동성 고원)에서 격파했다. 교동에 주둔하고 있던 전기는 조참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이로써 제나라 땅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강물이 마른 것처럼 위장해 사마용저의 군사를 끌어들인 뒤 통렬히 반격해 20만 대군을 대파한 한신은 실로 용병의 귀재였다. 사마용저 역시 진여처럼 한신을 얕잡아봤다가 자신은 물론 제나라마저 패망하게 만들었다. 명나라 때 작가인 모곤은 <사기초>에서 한신을 이같이 평했다.

   

내가 고대 전략가들을 살펴보니 한신이 최고였다. 나무통으로 위나라를 격파했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 조나라를 격파했고, 모래주머니로 제나라를 격파했다. 이런 전략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 절묘하기 짝이 없어 적과 혈전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같이 말하고자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태사공 사마천은 문장의 신선인 문선(文仙), 이백(李白)은 시의 신선인 시선(詩仙), 굴원(屈原)은 사부(辭賦)의 신선인 사부선(辭賦仙), 유령(劉怜)과 완적(阮籍)은 술의 신선인 주선(酒仙),이다. 그렇다면 한신(韓信)은 무엇인가? 바로 전쟁의 신선인 병선(兵仙)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한신에 대한 극찬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신선(神仙) 위에 성인(聖人)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선 이백 위에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언급했다. 그렇다면 한신 위의 병성(兵聖) 내지 무성(武聖)은 누구일까? 바로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孫武)이다. 손무가 과연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 예로부터 논란이 많았던 만큼 현존 인물 가운데 무략과 병법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바로 한신(韓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4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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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莊子)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지혜의 샘
장자 지음, 완샤 풀어쓴이, 심규호 옮김 / 일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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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행복한가?

작은 참새는 대붕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저것이 또 어디로 가려는 게야?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펄쩍 뛰어올라도 불과 몇길을 오르지 못해. 쑥대 사이를 낮게 날아다니는 정도라도 대단히 잘 나는 편인데 말이야. 그런데 저 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는 거야?"

  

장자가 볼 때 작은 참새는 물론이고 대붕 또한 진정한 자유의 경계에 이르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의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참새는 숲속의 협소한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유라고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비해 대붕은 거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높이 날아오르니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붕이 그처럼 높이 날기 위해서는 거대한 바람의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둘 다 모두 더 높은 경지의 초월을 통해 의존하는 것이 없는 경계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장자는 둘 가운데 대붕을 더 높이 친다. 그래서 참새에 대한 표현은 풍자와 해학의 어조를 띤다. 대붕은 높이 올라 넓은 시야를 확보하므로 광활한 대지를 굽어 살필 수 있다. 기세가 웅장하고 영웅의 기개를 지니고 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존경심을 지닐 만하다. 대붕 앞에서 작은 참새는 어릿광대처럼 가소롭기만 하다. 기껏 날아오른다는 것이 몇 길 되지도 않는데, 그나마 그 정도도 높이 날았다고 자만하고 있다. 이런 하찮은 참새가 어찌 위대한 대붕을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역시 상대적이고 비교적인 시각에서 얻은 결론이다. 만약 궁극적인 시각, 다시 말해 장자가 말한 도의 각도에서 본다면 대붕과 참새 사이에는 실질적인 구별이 없다. 대붕이 오히려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가 무한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면, 대붕이 제아무리 높고 멀리, 그리고 오랜 시간을 날아간다고 할지라도 끝내 무한에 다가설 수 없다. 무한은 근본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접근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한이 아니다. 대붕은 구만 리 창천을 날아오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무한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쑥대 사이를 뛰노는 작은 참새나 다를 바 없다.

   

장자가 볼 때 지식이란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따져본다면 대붕은 불행하다. 그의 불행은 자신이 지닌 역량이 막강하고, 또한 자신보다 더 막강한 존재를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 앞에 무궁한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안다. 우주는 바라볼 수 있을 뿐, 끝내 다가설 수 없는 무한이다. 무한, 무궁의 우주 앞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설사 아무리 오랜 시간이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참새는 오히려 행복하다. 그 행복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참새는 자신이 노니는 숲 밖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욱 거대하고 광활한 무한의 우주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작고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날고 있을 뿐이다. 나 그는 자신이 작다는 것을 모른다. ‘작다는 것은 대붕처럼 큰 존재만이 알 수 있다. 참새는 이렇듯 스스로 작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족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대붕이나 참새는 각기 나름대로 소요의 세계를 지니는 동시에 불행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류의 불행은 의식(意識)에 있다. 무궁한 시간과 마주하고 있지만 무궁 속에서 노닐 수 없고, 세계와 인생을 파악하려고 애쓰지만 끝내 파악할 수 없다. 앞에는 영원히 낯선 영역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불확정의 세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살아야 하므로 삶은 언제나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하고,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무궁한 우주를 바라보면 인류는 어쩔 수 없는 현실과 하찮은 존재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무지하면 두려움이 없어 자기 나름의 행복과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무지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의식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비극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인류의 비극은 생활의 어려움이나 동족상잔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 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광활한 우주의 시각에서 본다면 양자는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개미는 땅바닥을 기어 다닌다. 그들에게는 작은 몸 위, 1cm도 되지 않는 곳이 바로 하늘이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면 그들은 아예 존재감조차 없을 것이다. 괘엽국(掛葉菊)이라는 국화의 잎은 손바닥만큼이나 크다. 그 잎에 사는 바늘귀만한 벌레를 속칭 밀충자(密蟲子)’라고 한다. 그 녀석들은 죽을 때까지 그 잎에서 사는데,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껏 움직인다고 해도 그 움직임이 극히 미세하고 짧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잎이 세계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겨우 손바닥만한 세상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욕망이 적고, 욕망이 적기 때문에 고통도 적다. 이처럼 작은 생명을 바라보며 인류를 생각해 보자. 시작도 끝도 없이 광활하기만 한 우주에서 인류란 어쩌면 작은 잎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밀충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처럼 생각한다면 마땅히 모든 욕망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는 것이 없는 무대(無待)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소요유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인식하고, 수양을 통해 자신의 불행을 보완해야 한다. 오직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따라 자생자멸(自生自滅)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이 넓고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로지 세속의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더욱 많은 번뇌와 고통에 사로잡혀 불행도 늘어날 것이다. p.8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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