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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서 초한지를 읽다 - 전쟁같은 삶을 받아낸 천 개의 시선
신동준 지음 / 왕의서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항우가 광무에서 유방과 대치할 때 사마용저는 초나라의 대부분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 구원에 나섰다.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 때 그가 제나라를 구원하고 한신의 남하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천하대세는 급격히 유방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어떤 이가 사마용저에게 이같이 간했다.
“한나라 군사는 멀리 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기(銳氣)를 당할 길이 없습니다. 정면으로 맞붙을 경우 병서에서 지적했듯이 제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싸우는 까닭에 쉽게 패해 흩어질 것입니다. 차라리 영루(營壘)를 굳건히 지키면서 제나라 왕으로 하여금 믿음직한 신하를 한나라에 함락된 성에 보내 설득하느니만 못합니다. 함락된 성의 군민들은 군왕이 살아있고, 초나라가 구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바로 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는 2천 리 밖에서 달려와 제나라 땅에 머물고 있는 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나라 성들이 모두 저항하면 밥 얻어먹을 곳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되면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 못한 채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전에 이좌거가 진여에게 건의한 계책과 사뭇 닮았다. 지구전을 펼쳐 한신의 군대를 고사시키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병법의 대가를 자처한 사마용저는 한신을 업신여기며 단박에 이를 물리쳤다. “나는 줄곧 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어 그를 쉽게 상대할 수 있다. 그는 표모(漂母)에게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 자이다. 또한 바짓가랑이를 지나는 모욕을 받았으니 뛰어난 용기도 없다. 그러니 족히 두려워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제나라를 구원하러 왔다가 싸우지도 않고 그들을 항복시키면 무슨 전공(戰功)이 있겠는가? 지금 싸워 승리하면 제나라 땅의 반쯤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열국의 장수들 내에서 한신의 벼락출세에 관한 일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마용저가 한신을 이토록 무시하게 된 배경을 사서의 기록에서 찾아 살펴보기로 하자.
한신은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淮陰縣) 출신이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고 덕행이 없었던 까닭에 천거를 받아 관리로 뽑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생산업에 종사하거나 장사를 하는데도 능하지 못해 늘 남에게 붙어서 음식을 얻어먹었다. 사마천은 한신의 고향을 방문한 뒤 <회음후열전>에서 이같이 소개했다.
“내가 회음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말하길, ‘한신은 포의로 있을 때도 그 뜻이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모친이 돌아 가셨을 때 너무 가난해 장사(葬事)도 지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높고 넓은 평지에 무덤을 만들어 그 곁에 1만호가 들어앉을 수 있게 했다.’ 내가 그의 모친 무덤을 보니 실로 그러했다.”
계속 남의 집에 얹혀 밥을 얻어먹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몇 달이 지나자 한신이 기식하고 있던 정장 집의 아내가 그를 미워해 새벽에 밥을 지어 식구들끼리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식사시간이 되어 한신이 갔으나 밥을 차려주지 않자 한신도 그 뜻을 알고는 화를 내며 끝내 의절하고 떠났다. 하루는 한신이 성 아래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빨래하던 여인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밥을 내주었다. <회음후열전>은 빨래하는 여인을 ‘표모(漂母)’로 기록해놓았다. 한신이 기뻐하며 표모에게 말했다.
“내 훗날 반드시 당신에게 크게 보답하겠소.”
표모가 화를 냈다.
“지금 당당한 대장부가 스스로 밥벌이도 못하고 있지 않소. 내가 왕손(王孫)을 가엾게 여겨 밥을 준 것이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왕손’은 원래 왕실의 자제를 뜻하는 말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자제의 통칭으로 사용되다가 청년에 대한 존칭으로 전용되었다. 제후의 아들을 뜻하는 공자(公子)가 후대에 청년의 의미로 쓰인 것과 같다. 사마용저가 ‘표모’ 운운한 것은 바로 이 일화를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걸식표모(乞食漂母)이다. 밥을 빌어먹고 사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초지를 잃지 않고 정진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한번은 한신이 회음의 백정들이 사는 거리를 지나다가 한 청년과 시비가 붙었다. 청년은 한신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체구는 장대하고 항상 칼을 차고 있으나 실은 겁쟁이일 뿐이다.” 이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한신을 모욕했다. “네가 죽일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라. 그렇지 못하면 내 바짓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라.”
한신이 그를 오랫동안 주시하더니 이내 그의 바짓가랑이에 몸을 구부려 집어넣고는 엎드려 기어갔다. 저자(市場)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겁쟁이라며 비웃었다. 사마용저가 ‘바짓가랑이‘ 운운한 것은 바로 이 일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바로 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이란 뜻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이다. 걸식표모와 같은 취지로 사용된다. 높은 뜻을 세운 까닭에 작은 모욕이나 치욕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늘 칼을 차고 다녔던 한신은 항량이 회하(淮河)를 건널 때 그의 뒤를 좇았으나 시종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항량이 패한 후 그는 항우에게 소속되었다. 항우는 그를 낭중(郎中)으로 삼았다. 한신이 자주 항우에게 계책을 올렸으나 항우는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유방이 한중으로 갈 때 한신도 초나라를 빠져나와 유방에게 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양곡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직에 있다가 다른 사람의 죄에 연루되어 참수당할 처지에 놓였다. 일당 13인이 모두 참수되고 마침내 한신의 차례가 되었다. 한신이 머리를 들어보니 마침 등공 하우영이 보였다. 한신이 말했다.
“군주는 천하를 얻길 원치 않는 것입니까? 왜 장사(壯士)를 참하려는 것입니까!”
하우영이 호걸의 기개를 갖춘 한신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곧 그를 풀어주고 함께 얘기를 나눠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유방에게 소개했다. 그를 보급 담당의 치속도위(治粟都尉)에 제수했다. 그를 기재(奇才)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이후 승상 소하의 천거로 유방을 만나 전격적으로 군사(軍師)에 발탁됐다.
사마용저도 한신의 이런 전설적인 얘기를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심 조심하며 작전 계획을 짜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는 자만하며 한신을 업신여겼다. 고금을 막론하고 적장을 얕보고도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한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병법의 대가였다. 사마용저는 싸움도 하기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갔다. 기원전 204년 11월,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이 한나라 군대와 유수를 사이에 두고 진세(陣勢)를 펼쳤다. 유수는 산동성 동부에 있는 고밀현 서쪽을 흐르는 강이다. 한신이 밤에 사람을 시켜 자루 1만여 개를 만든 뒤 그 속에 모래를 가득 채워 유수 상류를 막게 했다. 이어 군사를 이끌고 유수를 반쯤 건너 사마용저를 공격하다가 짐짓 돌아서서 도망쳤다. 이에 사마용저가 매우 우쭐대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일찍이 한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군사를 이끌고 한신의 뒤를 바삐 쫓았다. 한신은 유수를 건너자마자 신호를 보내 물막이 자루를 터뜨리게 했다. 물이 일시에 흘려내려와 사마용저의 군사들을 덮치자 강을 사이에 두고 초나라 군대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한신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맹공을 가했다. 초나라의 용장 사마용저는 맥없이 전사하고 말았다. 유수 동쪽에 있던 양국 연합군 군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제나라 왕 전광도 곧바로 몸을 숨겨 도망쳤다. 한신이 이들을 추격한 끝에 성양에서 전광을 포로로 잡았다. 관영도 제나라 장수 전광을 사로잡은 뒤 박양까지 진격했다.
재상 전횡은 전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군사들을 이끌고서 관영에게 역공을 가했다. 그러나 영하(산동성 내무)에서 오히려 관영에게 대패하자 위나라 쪽으로 달아나 팽월에게 몸을 의탁했다. 관영이 여세를 몰아 제나라 장수 전흡(田吸)을 천승(千乘 : 산동성 고원)에서 격파했다. 교동에 주둔하고 있던 전기는 조참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이로써 제나라 땅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강물이 마른 것처럼 위장해 사마용저의 군사를 끌어들인 뒤 통렬히 반격해 20만 대군을 대파한 한신은 실로 용병의 귀재였다. 사마용저 역시 진여처럼 한신을 얕잡아봤다가 자신은 물론 제나라마저 패망하게 만들었다. 명나라 때 작가인 모곤은 <사기초>에서 한신을 이같이 평했다.
“내가 고대 전략가들을 살펴보니 한신이 최고였다. 나무통으로 위나라를 격파했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 조나라를 격파했고, 모래주머니로 제나라를 격파했다. 이런 전략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 절묘하기 짝이 없어 적과 혈전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같이 말하고자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태사공 사마천은 문장의 신선인 문선(文仙), 이백(李白)은 시의 신선인 시선(詩仙), 굴원(屈原)은 사부(辭賦)의 신선인 사부선(辭賦仙), 유령(劉怜)과 완적(阮籍)은 술의 신선인 주선(酒仙),이다. 그렇다면 한신(韓信)은 무엇인가? 바로 전쟁의 신선인 병선(兵仙)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한신에 대한 극찬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신선(神仙) 위에 성인(聖人)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선 이백 위에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언급했다. 그렇다면 한신 위의 병성(兵聖) 내지 무성(武聖)은 누구일까? 바로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孫武)이다. 손무가 과연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 예로부터 논란이 많았던 만큼 현존 인물 가운데 무략과 병법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바로 한신(韓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41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