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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莊子)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지혜의 샘
장자 지음, 완샤 풀어쓴이, 심규호 옮김 / 일빛 / 2011년 12월
평점 :
누가 더 행복한가?
작은 참새는 대붕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저것이 또 어디로 가려는 게야?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펄쩍 뛰어올라도 불과 몇길을 오르지 못해. 쑥대 사이를 낮게 날아다니는 정도라도 대단히 잘 나는 편인데 말이야. 그런데 저 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는 거야?"
장자가 볼 때 작은 참새는 물론이고 대붕 또한 진정한 자유의 경계에 이르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의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참새는 숲속의 협소한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유라고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비해 대붕은 거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높이 날아오르니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붕이 그처럼 높이 날기 위해서는 거대한 바람의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둘 다 모두 더 높은 경지의 초월을 통해 의존하는 것이 없는 경계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장자는 둘 가운데 대붕을 더 높이 친다. 그래서 참새에 대한 표현은 풍자와 해학의 어조를 띤다. 대붕은 높이 올라 넓은 시야를 확보하므로 광활한 대지를 굽어 살필 수 있다. 기세가 웅장하고 영웅의 기개를 지니고 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존경심을 지닐 만하다. 대붕 앞에서 작은 참새는 어릿광대처럼 가소롭기만 하다. 기껏 날아오른다는 것이 몇 길 되지도 않는데, 그나마 그 정도도 높이 날았다고 자만하고 있다. 이런 하찮은 참새가 어찌 위대한 대붕을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역시 상대적이고 비교적인 시각에서 얻은 결론이다. 만약 궁극적인 시각, 다시 말해 장자가 말한 도의 각도에서 본다면 대붕과 참새 사이에는 실질적인 구별이 없다. 대붕이 오히려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가 무한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면, 대붕이 제아무리 높고 멀리, 그리고 오랜 시간을 날아간다고 할지라도 끝내 무한에 다가설 수 없다. 무한은 근본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접근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한이 아니다. 대붕은 구만 리 창천을 날아오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무한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쑥대 사이를 뛰노는 작은 참새나 다를 바 없다.
장자가 볼 때 지식이란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따져본다면 대붕은 불행하다. 그의 불행은 자신이 지닌 역량이 막강하고, 또한 자신보다 더 막강한 존재를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 앞에 무궁한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안다. 우주는 바라볼 수 있을 뿐, 끝내 다가설 수 없는 무한이다. 무한, 무궁의 우주 앞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설사 아무리 오랜 시간이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참새는 오히려 행복하다. 그 행복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참새는 자신이 노니는 숲 밖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욱 거대하고 광활한 무한의 우주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작고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날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작다는 것을 모른다. ‘작다’는 것은 대붕처럼 큰 존재만이 알 수 있다. 참새는 이렇듯 스스로 작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족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대붕이나 참새는 각기 나름대로 소요의 세계를 지니는 동시에 불행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류의 불행은 의식(意識)에 있다. 무궁한 시간과 마주하고 있지만 무궁 속에서 노닐 수 없고, 세계와 인생을 파악하려고 애쓰지만 끝내 파악할 수 없다. 앞에는 영원히 낯선 영역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불확정의 세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살아야 하므로 삶은 언제나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하고,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무궁한 우주를 바라보면 인류는 어쩔 수 없는 현실과 하찮은 존재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무지하면 두려움이 없어 자기 나름의 행복과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무지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의식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비극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인류의 비극은 생활의 어려움이나 동족상잔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 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광활한 우주의 시각에서 본다면 양자는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개미는 땅바닥을 기어 다닌다. 그들에게는 작은 몸 위, 채 1cm도 되지 않는 곳이 바로 하늘이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면 그들은 아예 존재감조차 없을 것이다. 괘엽국(掛葉菊)이라는 국화의 잎은 손바닥만큼이나 크다. 그 잎에 사는 바늘귀만한 벌레를 속칭 ‘밀충자(密蟲子)’라고 한다. 그 녀석들은 죽을 때까지 그 잎에서 사는데,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껏 움직인다고 해도 그 움직임이 극히 미세하고 짧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잎이 세계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겨우 손바닥만한 세상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욕망이 적고, 욕망이 적기 때문에 고통도 적다. 이처럼 작은 생명을 바라보며 인류를 생각해 보자. 시작도 끝도 없이 광활하기만 한 우주에서 인류란 어쩌면 작은 잎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밀충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처럼 생각한다면 마땅히 모든 욕망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는 것이 없는 무대(無待)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소요유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인식하고, 수양을 통해 자신의 불행을 보완해야 한다. 오직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따라 자생자멸(自生自滅)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이 넓고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로지 세속의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더욱 많은 번뇌와 고통에 사로잡혀 불행도 늘어날 것이다. p.8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