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 비단에 채색. 90.4cm X 43.8cm. 호암비술관 소장.
조선 범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의 하나다. 그 조선범을 그린 천하명품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를 볼 적마다 나는 두 글귀를 떠올린다. 하나는 <논어(論語)>의 ‘위이불맹(威而不猛)’ 즉,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다.“는 말이다. 그림 속 범의 위용과 걸맞은 이 ”위이불맹“이란 말은 본래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호질>에 나오는, 범이 썩어빠진 가짜 선비를 꾸짖으면서 ”나의 본성이 너희 인간들의 본성보다 오히려 더 어질지 아니하냐!“고 호통을 치는 장면이다. 박지원은 김홍도보다 여덟 살 위의 문인으로 자기 시대를 반성하고 새 시대의 전망을 앞장서 제시했던 큰 선비다.
아래 일화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것인데, 역시 호랑이를 이끌어 정치를 말하고 있다.
공자가 태산 곁을 지나는데 어떤 부인이 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는 수레의 횡목(橫木)을 잡고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한 다음, 제자를 시켜 연유를 물었다. “부인이 곡하시는 모양이 분명 큰 슬픔이 겹친 듯합니다.”
부인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옛날 저의 시아버님께서 범에게 물려 돌아가셨습니다. 또 제 남편도 범에게 물려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아들마저 범에게 물려 죽었답니다.”
공자가 말했다. “어째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부인이 답하였다. “여기는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돌아보며 말했다. “제자들아, 명심하거라.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더 무서우니라!(苛政猛於虎)’”
후대의 한 학자가 글 말미에 주석을 달았다. “범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덫이나 함정으로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 사람을 해치는 것은 제어할 수단이 없다. 범은 높은 집과 굳게 닫은 문으로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 사람을 해칠 때는 도망할 곳이 없다. 그러기에 태산 기슭의 저 부인은 가혹한 정치가 없는 그곳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운(BC53~AD18)이란 사람은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벼슬아치를 빗대어 이렇게 탄식했다. “범이로구나, 범이로다. 진정 뿔이 나고 날개가 돋친 범이로구나.....”
율곡 이이(李珥.1536~1584) 선생도 그의 <석담일기>에 다음 기사를 남겼다. “겨울에 경기 지방에 호랑이가 자주 나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잡게 하니, 군사들이 촌마을에서 노략질하여 백성들은 호랑이보다 군사들을 더욱 괴롭게 여겼다.”
이 땅에 호랑이가 등장한 내력은 겨레의 건국 신화만큼이나 오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겨레의 한아바님 되시는 단군왕검(檀君王儉)보다도 한 세대가 위다. 왜냐하면 옛적에 곰 여인 웅녀(熊女)가 자신과 혼인해주는 사람이 없어 날마다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을 때 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해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이기 때문이다. 곰이 단군 어머니가 된 이야기, 뒤집어 말해서 호랑이가 단군어머니가 될 수 없었던 신화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사람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헤아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널리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줄 만하였다. 이에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가서 다스리라 하였다.
환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황이시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면서 줄곧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런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고는 “너희가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일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받아먹고 근심한 지 삼칠일(21일)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참아내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호랑이는 이 땅의 터줏대감이며 단군 어머니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어른이다. 다만 타고난 거친 야성을 순화하지 못하고 결국 어두운 동굴을 뛰쳐나가 영영 맹수로 머무른 점이 다를 뿐이다. 당시에 호랑이가 끝내 참고 견뎌내지 못했던 마늘의 독한 냄새는 훗날까지도 효력이 있다고 믿어져 호환(虎患)을 물리치기 위한 묘약으로 사용되었으니, 옛날 밤을 도와 산길을 넘어야 했던 나그네들은 미리 마늘을 먹고 트림을 하였다고 전한다.
호랑이는 명실공히 백수의 왕이다. 전체길이 3m에 무게 250kg에 가까운 덩치로 평지에선 5m를 펄쩍 뛰어오르고, 가파른 절벽은 10m나 뛰어내리며, 한번 내달으면 하룻밤에 100km 이상을 주파한다고 한다. 힘 또한 엄청나서 큰 송아지를 한입에 덥석 물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으니, 땅위에서는 가히 그 용맹 앞에 맞설 상대가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곧 바보가 아니고서는 모두가 호랑이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그런 호랑이이지만 어린 새끼의 무게는 1kg밖에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새끼 호랑이가 일곱 달을 넘으면 사냥을 배우기 시작하고 두 살까지는 어미와 함께 살면서 삶의 다양한 지혜를 습득하게 된다. 이후에는 점차 독립해 단독생활을 하게 되는데, 세 살이 되면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여기저기 방랑하며 다섯 살이면 완전히 성장을 마친다고 한다. 평균수명은 사육된 호랑이의 경우 25년 전후지만 야생에서는 훨씬 더 오래 산다고 알려져 있다.
옛적엔 호랑이가 참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왕산 성 밖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었다. 그 호랑이가 인경궁 후원까지 넘어 들어왔으므로 군졸들을 거느리고 발자국을 되밟아 잡았다.”는 인조 4년의 기록이 있고, 영조 28년 정월에도 “호랑이가 경복궁 후원 터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지금의 남태령이며 이화여자대학교 앞 아현동 고개 역시 호랑이 출몰지역이었으니, 성질 못된 사람을 가리켜 “저 남산 호랑이는 무얼 먹고 사나?”하는 속담까지 있었던 것이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은 멸종됐다는 호랑이를 아직도 깍듯이 산신령으로 섬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옛적엔 아무리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는 맹수라 해도 이를 죽이면 그 지방에 화가 생긴다는 미신이 있었다. 게다가 호랑이가 흉포한 동물이긴 하지만 언필칭 ‘산군(山君, 산의 임금)’이기 때문에 감히 ‘임금’을 잡았다는 죄목이 추가되었다. 따라서 포수가 호랑이를 잡아 고을 수령에게 바치면 비록 형식적인 장난이었지만 형틀에 묶어 세 차례 매질을 한 다음에야 상금을 주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호랑이는 원래 대단히 조심성이 많은 동물이라 여간해서는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을 덮치는 경우는 새끼와 함께 있거나 뜻밖에 갑자기 사람과 마주쳐서 제가 먼저 놀랐을 때, 혹은 너무 늙었거나 큰 부상을 입어 오래도록 먹이를 먹지 못했을 때뿐이다. 특히 사냥꾼에게 부상을 입어 사람에게 원한을 품은 호랑이 반드시 사람에게 복수하는 무서운 식인호가 되고 마는데, 그렇게 한번 사람 고기 맛을 본 뒤로는 상습적으로 포악성을 떨친다고 한다.
옛날 스님들은 호랑이가 활동하는 밤길을 다닐 적에 육환장(六環杖), 즉 쇠고리가 여섯 개 달린 지팡이를 호기롭게 짤랑거리면서 걸었다. 그러면 그 날카로운 금속성을 싫어해서 호랑이 쪽에서 먼저 피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사람이 자기 영역 안으로 무심결에 접근해 오면 위협적으로 ‘아악-’하는 벼락같은 포효를 발한다고 한다. 이때 온 골짝을 뒤흔드는 천둥 같은 울음소리, 그리고 시퍼런 화광(火光)이 줄줄 흐르는 주먹만 한 두 눈빛은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하고 오금이 저려서 한발 짝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보통 사람이 호랑이와 갑자기 맞닥뜨리면 심하게 놀란 나머지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부지불식중에 대소변을 싸고 만다고 한다.
범의 아름다움은 뭐니뭐니해도 가죽이다. 그래서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는가. 조선 범의 터럭은 열대 호랑이의 그것보다 길고 촘촘하며 색상은 다소 옅지만 촉감이 지극히 부드럽다. 범 구경을 하자더니 웬 가죽타령이냐고 한다면 우선 <호질>의 한 대목부터 소개하겠다. 호랑이가 말한다. “우리 몸의 얼룩무늬 한 점만 엿보더라도 족히 문채(文彩. 인문적 교양이 어우러진 것을 말함)를 천하에 자랑할 만하며, 또 발톱과 이빨의 날카로움만 가지고 한 자 한 치의 칼날도 빌지 않고서 천하에 무용(武勇)을 빛내고 있다.”
<논어> 옹야편(雍也編)에 이런 말이 있다. “속의 질박함이 바깥 꾸밈을 압도하면 촌스러워지고, 바깥 꾸밈이 속 바탕을 압도하면 얄팍해진다. 속과 바깥, 바탕과 꾸밈이 서로 잘 어우러진 다음에야 군자다.” 또 같은 책 안연편(顔淵編)에서는 “바깥 꾸밈도 속 바탕만큼 중요하고, 속 바탕 역시 바깥 꾸밈만큼 중요하다.(만약 외형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범과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나 양의 털 뽑은 가죽과 전혀 다름없는 꼴이 될 것이라”하였다.
<주역> 에 “대인호변(大人虎變) 기문병야(其文炳也)”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온 세상을 진정 새롭고 훌륭하게 고쳐나갈 큰 인물은 호랑이가 가을철에 털갈이하듯 한다.”는 뜻이다. 군자의 크나큰 덕을 입어 “온 세상이 범 가죽에 어룽진 무늬같이 아름답게 변해서 빛이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송하맹호도>의 호랑이가 바로 그러하니, 몸에는 보기 좋게 살이 올랐고 겉모습은 휘황찬란한 터럭으로 환하게 빛난다. 그러고 보니 소나무 이파리 일부가 드문드문 갈색으로 시든 것이 눈에 뜨인다. 가을이 온 것이다...
오늘날 ‘호랑이’라면 우리는 별수없이 동물원 철장이나 텔레비전 화면 속의 모습만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사육되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니다. 우리 단군 신화의 주인공은 정말 멸종되고 말았는가? 호랑이 연구가 임순남 씨는 아직도 남한 지역에 몇 마리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호랑이가 살아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호랑이가 워낙 영물(靈物)이기에 쉽사리 사람 눈에 뜨이지 않을 뿐 여러 차례 직접 채집한 조선 범의 발자국과 배설물, 그리고 그림 속에서처럼 소나무에 영역 표시를 한 흔적에서 범의 터럭까지 채집했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드넓은 지역을 호령하는 산어른이다. 그러나 남북한을 두 동강낸 철책이 사람뿐 아니라 호랑이 가족 또한 영영 오갈 수 없게 굳게 막은 채 반세기를 넘겼다. 그 때문에 몇 마리 안 되는 호랑이가 근친간에 번식할 수밖에 없어 쉽사리 병원체에 감염된 채 스스로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 호랑이 연구가인 유진 빅토르 박사는 야생 동물들의 남북한 이동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강원도 휴전선의 일부 철책만이라도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 백 미터의 철책선 만이라도....
하늘은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미물일지라도 이 세상에 불필요한 생명체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를 빼앗자마자 곧 철저하게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호랑이 박멸 작전에 나서 우리 겨레의 상징, 그 크고 씩씩하며 아름다웠던 조선 범을 전멸시키고자 했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조선 혼의 부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래도록 이어진 삼림의 벌채와 전쟁 탓으로 잣나무는 시들고, 덩달아 먹이를 잃은 멧돼지가 사라졌다. 사슴들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호랑이는 결국 우리의 곁을 떠났다.
사람은 자연을 닮고, 동물도 사람을 닮는다. 우리나라 야담에서 호랑이는 사람에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되갚는 보은(報恩)의 존재였다. 아니 그 자신이 산신령이었다. 우리가 그를 위해 철책을 뜯는 정성을 기울일 때 어찌 이 땅의 영험한 산신령께서 겨레의 통일을 이루도록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기운 생동하는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를 보면서 다시금 박지원의 <호질> 속 천둥 치는 호랑이의 포효를 듣는다. “너희 사람이 사물의 이치며 본성을 논할 적에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이거니와, 하늘이 명하신 것으로 보면 범이나 사람이나 똑같은 만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虎與人 乃物之一也)”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 p.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