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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한기
이지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젠장, 사랑합니다~
띠지에 붙어있는 이 말은 너무나 웃기면서도 사랑스럽다.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야 물론 행복한 일이지만, 그렇게 사랑하게 된 계기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주는 문장, 젠장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혹은 사랑을 느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바이러스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부당하진 않겠다. 이럴 땐 아주 좋은 것이,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장 후회하더라도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바람에 고백을 하더라도 제 진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자기를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상대방의 처분만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저리는지, 그 시간을 그 바이러스로 인해 행복하게 지나갈 수만 있다면 이 변종 바이러스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뭐, 적절한 처방을 못 받으면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질병이긴 하지만.
이름도 독특한 옥택선은 서른 중반의 재능 없는 작가로, 오랜 만에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과학자를 하나 소개받았다. 한눈에 반할 만한 인간이 소개팅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제 인생에서 남자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변화나 주어볼까 하는 마음에서 나간 자리였다. 하지만 별 특징도 없이 금방 자리를 떠야 하는 남수필을 보곤 그저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특이한 일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뜬금없이 자기 이름도 모를 거라 여겼던 그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선 그녀가 사는 곳까지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설마 진심이랴 싶어 알려준 집주소에 맞게 찾아와 쉴새없이 제 어린 시절 이야기나 실컷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이야기로 하룻밤을 센 후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그를 보냈는데 뜬금없이 그가 죽었다고 하질 않는가.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바이러스재난구조협회라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큰일은 그녀에게도 이상 발열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괜시리 기분이 좋기도 하고, 환상이 여럿 보이기도 하고... 그녀도 격리해서 치료해야 하는데 G-10 바이러스의 변종이라는 이 놈은 기존의 처방제로서는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약이라도 먹으면 그대로 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다급히 보내온 남수필의 문자는 보건국 사람들을 믿지 말라는 음모론적인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경고와 제 친구라는 동료과학자 이균을 찾으라는 힌트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기묘한 동거 관계, 이균과 옥택선...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삐딱선을 타는듯한 그의 태도가 화가 나고 분통이 터서 사사건건 맞서게 택선이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도와주는 이균을 믿고 성 교수의 연구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 병의 증상은 딱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며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고 갑자기 고백을 해버리고 싶어지는 것인데, 처음부터 아니꼬웠던 이균을 상대로 택선을 그만 사랑을 느끼고 만 것이다!!!
젠장, 사랑합니다.
아이고, 염병할, 사랑한다고요. 앗, 죄송해라. 욕을 했네.
내가 이균 씨를 사랑한다니까요. 제길.
웃기죠? 황당하죠? 전 오죽하겠어요. (...)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이렇게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요! (p. 187~188)
이제 이 바이러스가 퍼지고 나면 인류는 제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려하는 혼란이 올 것이다. 멀쩡한 가정이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진정으로 제 감정을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질 것이다. 그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택선, 그녀의 바이러스를 길들여야한다. 그런데... 혹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바이러스가 과연 그렇게 절망적이기만 할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감정이 어떤 대상에게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제 과거에 있었던 추억의 시간이 누구나 꼭 좋으리란 법도 없지만, 죽는 그 마지막에까지 행복해하면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끊임없는 가난과 힘든 노동과 손자의 우윳값도 못 내는 서러움만 안겨주는 무정한 인생을 뜨겁게 껴안으려고 했던 어떤 할머니처럼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오래 살든 운 나쁘게 일찍 죽든 그 가치는 동일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과거의 강렬한 기억을 다시 체험하면서 인생에 대해 다시 숙고해볼 시간을 얻게 되어 더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일런지도...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일까? 행복일까? 아픔도 젊은 아픔이 더 센 것처럼, 이 바이러스도 젊을 때 크게 아프고 나면 인생에 대해 더 폭넓게 살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젠장맞게도 이균을 사랑하게 된 택선이는 그 사랑을 치료했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