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지 않은 성'으로 처음 접했던 이리가레의 글은 어렵긴 했지만 굵직한 여성주의 관점들, 시적인 표현들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컴북스 이론총서도 찾아 읽고 '나,너,우리'도 진작에 사두었다가 '해러웨이 선언문'에서 이리가레가 언급된 것을 읽고 이 책을 이번에 읽었다. 역자가 언급하듯 내용은 비교적 최근의 글이고 이리가레의 철학을 이해하기 수월하게 서술되어있다. 여러 주제별로 짧은 글들을 모았으며. 이리가레가 인터뷰한 내용도 담겨있다. 특히 프랑스어에서 문법상 성의 지위가 달라지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고 태반의 상호작용에 관한 글, '처녀성'을 소녀들의 재산으로 인정해야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었다. 


컴퓨터(l‘ordinateur)는 물론 남성 명사이고, 타자기(la machine à écrire)는 여성 명사이다.  가치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가치를 가진 것은 분명히 남성형이다. 다시 한번 예를 들면, (남성형인) 비행기 (un avion)는 여성형인 자동차(une voiture) 보다 우월하며, (남성형의) 콩코드(le Concorde)는 말할 것도 없고, (남성형의)보잉기(le Boeing)는 (여성형의) 카라벨(la Caravelle)보다 우수하다 - P72


언어가 성별화되어 있는데 어떻게 담화가 그렇지 않을 수 있는가? 언어는 가장 근본적인 규칙들 속에 성적인 특성과 함축된 의미들과 무관하지 않은 단어의 성구분 속에 이미 성별화되어 있으며, 어휘들 속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과 여성의 담화에 나타난 차이들은 따라서 언어와 사회, 사회와 언어의 영향이다.  - P34


태반은 태아에 의해 형성된 조직이다. 그러나 태아와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모체와 태아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한다. 태반은 모체와 태아의 조직이 서로 융합(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공존하게끔 기능한다. 양쪽 모두를 위해 교환을 조정하고 모체의 물질을 변형, 저장, 재분배한다. 호르몬 분비에 있어서도 태반은 통제 기능을 함으로써 태아와 모체가 건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돕는다. 나는 여기서 남성이라는 '하나의 성'으로 융합을 이루려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태반의 이러한 기능처럼 다른 성을 존중하고 서로 공존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류에게 오래도록 섬김받고 찬양되었지만 여성은 그 창조적 능력으로 말미암에 오히려 남성적 질서에 부차적인 존재가 되었다. 



여성의 이 경이로운 작품은 어린아이, 그것도 먼저 남자아이를 낳는 의무로 바뀌고 말았다. 따라서 우주의 가장 위대한 창조자인 여성은 남자의 사회 질서 재생에 봉사하는 하녀가 되었다. 자신들의 걸작에 주어지는 명예 가운데 여성에게는 대개 출산이라는 <일>의고통과 어머니 노릇을 하는 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다 부권제 문화의 질서는 모든 창조를 여성에게 금지하고,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출산이라고 부르는 것에만 가두어 놓았다.  - P111



그렇다고 해서 이리가레는 이러한 여성의 역할을 포기하거나 성 구분을 없애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살아가야할 미래를 위해서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확립할것을 요구한다. 이리가레는 남성과 똑같아지는 평등이 아닌(융합)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확립으로 긍정적인 공존을 추구하자고 말한다. 남성만이 유일한 가치이고 질서라는 기존의 담화에서 벗어나되 여성들의 책임과 기회를 세계의 발전단계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녀들에게 처녀성을 재산으로 인정하게 하자는 이리가레의 제안도 그런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가족 · 국가 · 종교 어느 것에 의해서도 현금으로 환산될 수 없고,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 정체성의 한 구성요소로 처녀성(혹은 육체적·도덕적 순결)을 법에 기재할 것. 여성 정체성의 이요소는 소녀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주고, 자신이 원하는 한 처녀성(신과의 관계를 포함해서)을 지킬 권리를 줄 뿐 아니라, 집 안팎에서 이 권리를 해치려는 사람에 대해 법의 도움으로 불평을표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소녀가 남성들간에 교환되는 경우가 적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처녀성이 상품화되는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남성들간에 돈으로 환산될수 있는 육체로서 소녀의 정체성이 갖는 지위는 재고려되지도재형성되지도 않았습니다. 소녀들은 개인적·사회적 시민으로 의거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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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30 2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표현은 잘 모르겠는데 외국은 저렇게 성별 명사가 구분되어 있더라구요. 저런것의 배경도 어쩌면 차별이 깔려있나 봅니다 ㅜㅜ

미미 2022-05-30 21:44   좋아요 4 | URL
프랑스어만 그런게 아니군요?!! 왜 굳이 저런 차별을 뒀어야했나 싶어요.ㅠ 이리가레는 언어학자,정신분석학자이기도해서 치매연구하다 조사하게됐대요^^

mini74 2022-05-31 1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반이야기 신기하네요. 달은 여자이고 모양의 변화는 변덕스러움을 보여주고 남성은 태양이라는것도ㅠㅠ타자기가 여성형인거 은근히 기분나쁘네요 ㅎㅎ

미미 2022-05-31 12:02   좋아요 2 | URL
이런것만 쭉 나열한 책도 읽어보면 좋을것 같아요!
역사적인 유례도 되도록 찾아서요. 이리가레가 조사는 했다는데 국내 번역된건 확실히 아직 없더라구요. 아! 저 예전에 인형때문에 구입한 원서가 비슷한 책인데 아직은 어려워서 못...ㅠㅠ;;

그레이스 2022-05-31 1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성명사 남성명사 그앞에 오는 관사, 뒤에 오는 동사까지...
더구나 불규칙은 외워야하고,,,, ^^
제2외국어로 불어 할 때 정말 짜증났던 기억이 나요^^
묘하게 전통적 정서에 맞는듯한 느낌이 그런 이유였겠죠?! 차별!

미미 2022-05-31 19:54   좋아요 2 | URL
저는 독어반이었는데(독어쌤은 무섭고 히틀러같았어요ㅠ) 가끔 수업때 화장실가며 불어반 지나가면 늘 웃음소리가 나서 부러웠어요*^^* 역시 불어수업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군요!!

scott 2022-06-01 15: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문서등을 제외하고 일상에서 소설작품등에서 그/그녀 IIs로 쓰고있습니다 영어권에서
미스/미세스 구분 안하고 독일어에서 fräulein21세기 이후 남부지방에서나 쓰고있습니다 🤗

미미 2022-06-01 14:45   좋아요 2 | URL
프랑스어는 좀더 변화가 필요하군요!! 이런 차이들을 다 알고계신 스콧님 쵝오👍👍 언어는 일상으로 쓰이므로 무의식적인 고착화에 큰 영향을 주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