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들은 늘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이것이 바로 수용소 인간들의 아편이었다. (p. 21)
이 무시무시한 독일 수용소에서 다시금 그는 확신과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딱 한가지 불안이 그를 짓누른 채 떠나지 않았다. 청년 시절의 명확하고 온전한 감각, 즉 동지들 사이에서는 동지가 되고 낯선 이들 사이에서는 낯선 이가 되는 감각을 도무지 되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p. 34)
그가 청년 시절 감옥에 있었을 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였다. 전에는 친구들이나 동지들과 있을 대면 모든 것이 친근하고 이해 가능했다. 적의 생각과 적의 시각은 그 하나하나가 낯설고 야만스럽게만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낯선 이의 생각 속에서 갑자기 수십년 전 그에게 소중했던 것을 만나는가 하면, 어찌 된 영문인지 친구들의 생각이나 말에서 낯선 것이 보이곤 했다. (p. 34)
사실 소련 전쟁포로들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조국을 배반하느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블라소프 군대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화와 논쟁을 거듭할 수록 이들은 서로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상대에 대한 증오와 경멸에 가득 차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p. 36)
이 벙어리 같은 웅얼거림과 눈먼 대화 속에, 공포와 희망과 고통으로 묶인 이들의 빽빽한 뒤섞임 속에,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몰이해와 증오 속에, 20세기의 재앙들 중 하나가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p.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