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에 대한 명랑하고 심오한 탐구"

삶이 심오할수록 죽음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EBS클래식 책이고, 제목에 의하면 관심가는 주제이고, 저자의 이름을 보니 필력은 보장되는 것 같고, 두루두루 땡기는 요소를 가진 책을 발견했으니, 그 다음은? 읽어야지! ㅎㅎ

인류 지성사의 모든 영역,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과 예술 등은 죽음을 이해하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기도 하다. 하긴 당연하지 않은가. 죽음을 모르면 삶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분리될 수 없는 법, 고로 생사는 하나다! 동서양의 고전이 수천 년간 전승해 온 진리다. 그 지혜와 방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가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8인의 현자들이 그 최고의 전령사가 될 것이다. (p. 7)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입에 올리면 안 될 것 같은 주제가 되었다. 너무 무겁고 너무 두려워진 단어가 됐달까.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 있으니 삶이 더 가치가 있어진다. 죽음은 늘 슬픔을 동반하지만 역사적으로 과거엔 지금처럼 죽음이란 주제가 터부시되진 않았던 것 같다. 회피할 수록 알수 없고 모를수록 더 무겁고 두려워진다. 사유와 성찰이 사라진 시대, 죽음에 대한 담론도 없어진지 오래, 하지만 잘 살기위해서라도 죽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말했다. 근대 권력은 '삶은 촘촘히 관리하고 죽음은 내팽개친다'라고. 자본의 관점에선 당연한 노릇이다. 죽은 자는 노동할 수 없으니까. 화폐 증식도, 소비 탕진도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눈앞에서 바로 치워 버린다. 아니, 그 전에 노인과 병자 역시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 그 결과 삶과 죽음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생겨났다. 근대 권력이 목전에서 죽음을 치워버렸다면,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죽음이라느 단어를 증발시키고 있다. 자살은 '극단적 선택'으로, 반려동물의 죽음은 '무지개다리'로, 가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한 '개인 정보'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을 외면하고, 그리고 은폐한다. 고로, 죽음은 없다! 죽음을 환기하는 모호하고 흐릿한 기호들만 떠다니고 있을 뿐!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모른다. (p. 16, 17)

그리고 여기엔 이미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다. 죽음은 참혹하고 끔찍하고 슬프고 비극적인 것이라는! 과연 그런가? (p. 18)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죽음을 이렇게 해석해버리고 말면 삶의 지반 또한 지극히 협소해지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이 대지에 생의 의지가 약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고. 죽음을 마주하는 그만큼 삶의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p. 19)

십여년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진 않았는데, 몇년전부터 고전과 인문학 서적들을 찾아읽다보니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튀어나와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저자의 책들을 찾아읽고 싶었던건 아니었는데 이번에 마침 오랜만에 저자의 책을 읽을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문장이 술술 읽혀서 좋았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도 저자에겐 무겁지 않게 다루는 재주가 있는듯 하다.

솔직히 인류의 문명사는 삶의 역사이면서 죽음의 역사다. (...) 모두가 겪는 코스라면 그것에 대한 지혜 또한 우리의 기억 정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 이 책에 등장하는 현자들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데이터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어둠 그 자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나게 될 8인의 현자들은 죽음을 평화와 지복으로 맞이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아득한 나락 혹은 깜깜한 어둠으로의 침몰이 아니라 '빛 혹은 평화'로의 비상이었다. 이들의 죽음에는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이 함께한다. (p. 23)

죽음이라는 주제를 심오하지만 명랑하게 전달시켜줄 수 있는 현자 8인으로 저자에게 선택된 이들은, 소크라테스와 장자, 간디와 아인슈타인, 연암과 다산, 사리뿟따와 붓다 다. 현자라고 해서 철학자 중심이려나 싶었는데 철학자부터 정치가, 과학자, 종교인까지 다양했고 8인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닮아 있다는 것일까.

소크라테스 윤회론의 핵심은 '영혼불멸설'이다.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프시케의 발견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을 만하다' 미케네 문명의 영웅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고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잘 보여 주듯이, 그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다 특정한 신들의 활약이라 여겼다. (...) 그러니 인간은 내면을 돌보고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영혼의 발견돠 더불어 마음의 모든 활동과 변화를 신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p. 42)

여기서 반드시 환기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육체의 주인임을 강조해 마지않았지만, 현대인은 정반대로 육체가 영혼의 주인이다. 육체를 잘 다듬고 지키는 것이 영혼이 해야 할 주된 소명이다. '물구나무선 이원론'이라고나 할까. (...) 생에 대한 집착은 더한층 증폭되고 죽음에 대한 이해는 나날이 빈곤해진다. 소크라테스가 안다면 진짜 기겁할 일이다. (p. 44)

소크라테스가 안다면 기겁할 일이 또 있는데 그에 대한 잘못된 가짜뉴스다. ''다른 사람에게서 해악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갚아 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오, 놀라운 도약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가짜뉴스'(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가 탄생하게 된 맥락도 이 지점일 듯하다. (p. 48)'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동안 지켜온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중에 나온 말이었다. 그는 아테네시민들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다. (p. 53)' 따라서 그가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했던 건, 아테네 시민들이 후회할줄 알면서도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건, 수많은 사유와 성찰끝에 스스로 터득한 바를 후대에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에게 죽음은 삶과 반대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 많은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슬퍼할 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슬픔을 겪고 그 애도의 힘을 길어 올려 죽음이라는 심연과 마주하는 담대함일 것이다. 그렇게 맞짱을 뜨다 보면 우리 또한 장자처럼 생사의 순환이라는 경이로운 이치를 깨우칠 수도 있지 않을까. (p. 66)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자는 생로병사의 흐름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낮과 밤이 교차하듯, 겨울과 봄이 서로 갈마들 듯,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역시 쉼 없이 교체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p. 70)' 장자가 살던 시대는 혼란과 혼탁이 난무했고 죽음또한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모든 것에 연연해서는 살아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삶과 죽음 그 '사이'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한 결과 그는 '자연은 나에게 몸을 주어 태어나게 하고 삶을 주어 애쓰며 살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p. 101)'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운명에 대한 무한긍정이랄까.

그가 시도한 모든 정치적 결단과 실천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런던에서 [바가바드기타]를 만난 이후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끼고, 붓다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그리고 자이나교에서 비폭력을 배우고, 존 러스킨과 톨스토이에게서 무소유와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배웠다. 그는 배움에 관한 한 거의 '물 먹는 하마'에 가깝다. 모든 진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즉시 실행에 옮긴다. 물론 달팽이의 속도로 한 걸음씩! (p. 121)

'간디의 죽음은 아이러니투성이다. (p. 108)' 비폭력적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얻어낸 사상가로만 알고 있던 간디의 삶은 생각보다 굉장히 오묘했다. 그어떤 투옥과 단식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폭력적 현장의 가운데서 맨발로 걸어가도 다치지 않았던 그가 노년의 나이에 기도 시간에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간디다웠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그가 평생을 걸고 수행했던 사탸그라하, 아힘사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패배는 증명하고 말았다. 그의 진리 실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그가 걸어간 길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p. 134)' 간디는 그의 삶으로 그의 죽음도 설명했달까.

이 정도면 그가 왜 양자역학에 그토록 거부감을 보였는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그것은 결코 자신이 누리는 최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과학적 탐구와 종교적 원리를 일치시키고자 한 자신의 세계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은 혁명가도, 권위자도 아닌, 다만 '아인슈타인'으로 살았을 뿐이다. (p. 172)

상대성이론으로 물리학계에서 뉴턴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이었지만 그가 말년에 노력한 것은 양자역학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그를 꼰대취급하기도 했다지만 그는 성정상 그럴 수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가 추구한 진리는 명확해야 했고 양자역학의 이럴수도있고저럴수도있다는 그의 신념에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는 꾸준히 비폭력과 반전운동에 힘을 더했고 과학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한쪽편으로 몰아붙여 판단하는 건 오롯이 후대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이론에도 자신의 삶에도 크게 연연해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죽음이 몇이나 될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음이 원초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건 실로 요행이요 축복이 아니락. 매일, 매 순간이 기적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p. 192)

연암 박지원은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의 무수한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가 그 슬픔을 다루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그는 그 죽음들마다 진심을 다한 그만의 글쓰기로 애사를 지어 바쳤다. 그렇게 수많은 글을 올리고 묘비명을 지었지만 정작 그의 죽음 후 묘비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애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애도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수많은 죽음을 겪었고 묘비명을 쓰면서 죽음과 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달리 말하면, 늘 '오늘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p. 214)' 그는 죽을때까지 벗들과 이야기하며 생각하고 글을 씀으로써 그의 삶도 죽음도 자연스럽게 주변에 두었다.

'너희들이 독서하지 않으면 이 아비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왜?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해놓은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들을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못한다면 내 책들은 더는 전해질 수 없을 것이며,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핵심은 바로 여기다. 나의 독서, 나의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려면 너희들이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를 해야 문장을 쓸 수 있고, 문장을 남겨야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래야 아비인 나의 명예도 복권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에도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나를 평가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영원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 (p. 225)

다산 정약용은 일흔다섯에 결혼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을 앞둔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다사다난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다시 요약하면 무엇하겠나. 다만 그의 '문장'에 대한 집념은 알아둘만 했다. 그의 삶은 긴 시간 유배지에서 보냈고 집안 형제들은 모두 풍비박산났다.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은 '문장'이었고 그는 현재가 아니라 후대에 자신이 어떻게 남을지 아니 어떻게 남아야할지 내다보고 준비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죽음을 준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독서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것.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찬묘지명]도 미리 써두었다. 참으로 길게. 그는 그가 살았던 당시보다 그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더 생각했다. 그러니 그 현재에서의 죽음이 그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었을까.


사리뿟따는 한자로는 사리불 또는 사리자로 불린다. 사리불? 사리자? 불자들이야 익히 아는 이름이지만 불자가 아닌 이들도 종종 들어보긴 했다. 어디서? 바로 [반야심경]에 등장하신다. [성경]이 인류 모두의 고전이듯, [반야심경]역시 신앙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읽히는 고전이다. 그런 명망 높은 고전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리불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p. 268) 붓다, 관세음보살, 사리자, 이 세분의 앙상블로 불멸의 화음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울려 퍼지게 된 것. (p. 269)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있고, 예수에게 베드로, 공자에게 안회가 있다면, 붓다에겐 사리뿟따가 있었던 것이다. (p. 279)

사리뿟따는 붓다의 '상수제자'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가장 스승과 같은 경지에 오른 제자 혹은 으뜸제자 라고나 할까. 이 상수제자는 전생에 수없이 많은 인연으로 붓다와 얽혀있었고 그렇게 붓다와 상수제자가 되어 태어나 다시 만난 이제야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었는데, 상수제자가 붓다보다 반드시 먼저 열반에 들어야 한다고 한다. 붓다가 열반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했으니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도 자신의 열반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마지막 제자로 어머니를 선택한다. 평생 아들의 선택을 비난했던 어머니를. 이제 사리뿟따는 윤회의 업이 없으므로 어떤 인연으로도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참된 길로 이끌어야 했다. 자신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겐 죽음또한 그저 구도의 길로 이끄는 하나의 가르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일뿐이었딸까. 사리쁫따는 그렇게 윤회의 수레바퀴를 마침내 멈추게 하고 열반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어떤 잉여도, 여지도 없는 열반. 해서 '무여열반'이다. 붓다는 지금 생을 마감하려 한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붓다에겐 '죽음'이 없다. 아니, 죽음이라는 사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생도 사도 없는'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이다. 번뇌와 집착 속에서 몸부림치다 문득 죽음에 이르고 그 회한과 애증을 품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윤회라면, 욕망과 번뇌의 모든 불꽃이 꺼져 지극히 고요와 평정에 이르는 것이 열반이다. (p. 299)

붓다는 열반을 준비하는 여행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마지막까지 한명에게라도 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사리뿟따때처럼 붓다또한 자신의 오픈된 죽음은 가르침을 전하는 마지막 방법일뿐이었다. '당연히 애증도 미련도 없고, 회한도 즐거움도 없다. 오직 평화와 자유만이 있을 뿐. 그래서인가, 붓다의 몸은 화장 이후 '표피와 속 살갗과 살점과 힘줄과 관절 활액은 모두 다 타고 재도 먼지도 없이 오직 사리들만 남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소멸이다. (p. 333)' 그러나 모두가 붓다같지 않았으므로 죽음이후 혼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경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전하러. 여하튼 붓다에겐 자신의 죽음도 제자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이 8인의 현자들은 문명권도 다르고, 살아간 시대도, 또 타고난 품성도 서로 달랐다. 하지만이들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극히 평온하고, 지극히 유쾌했다는 것. 하여 남은 자들에게 절망과 비탄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을 선사했다는 것. 우리는 이 모든 과정에 동행했다. 그리고 이제 묻는다. 어떻게 해야 저런 죽음의 형식이 가능할까?

먼저 이들의 죽음은 삶과 대립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생사는 다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삶, 그런 죽임이 가능할까? 역시 간단명료하다.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면 된다. (p. 338, 339)

그럼 또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욕망은 생의 원초적 동력인데,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물론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이 현자들의 비전과 방법은 언뜻 결이 다르게 보이지만 깊은 차원에서 상통한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누구를 멘토로 삼든 우리는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고 선을 행하며 지혜를 연마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자, 이제 마지막 관문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목격한 바 현자들의 죽음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다. 자유를 향한 비상이다. 다시말해 죽음은 생의 종결이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 (p. 340)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소박한 윤회론에서 시작하여 윤회론의 최고 경지인 붓다의 열반에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윤회와 열반, 이것이야말로 현재 인류가 창안해 낸 죽음과 다음 생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 아닐지. (p. 341)

현세의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윤회론이 힘이 될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사회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해본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기에 이런 책이 그리 널리 읽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8인의 현자의 죽음은 그들이 생애 성취한 업적이 있기에 더 빛을 발하는 평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평온한 죽음이 이렇게 회자될수도 없을터, 이렇게 생과 사의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윤회설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빈곤하기 이를 데 없다. 공포와 무지,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새로운 상상력이다. (p. 348)

사유와 성찰까지 가지 않아도 좋다.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애초에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들 하지 않은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인간만의 이 능력을 좀더 발휘해보자. 지금과 달리 생각해보는 것, 시작은 일단 그거면 족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