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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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 『먼 곳에서』가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미국 문단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젊은 거장 에르난 디아스. 그가 두번째 장편소설 『트러스트』로 국내에 첫선을 보인다. 1920년대 월 스트리트를 주요 배경으로 한 『트러스트』는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대해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경제, 금융, 돈, 권력, 계급 등 오늘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트러스트’라는 제목이 신뢰와 믿음이라는 가치뿐 아니라 기업합동이라는 경제적 개념을 의미하듯, 이 소설 또한 여러 영역의 ‘트러스트’를 모두 탐구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텍스트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어떤 내러티브를 믿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의 결혼생활을 통해 부부 사이의 신뢰를 이야기하며, 인간사 전체에서 신뢰와 배신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 알라딘 책소개 글 中 -

유명인사들이 무슨 책을 읽었네하며 화제에 오른 책들을 굳이 찾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영화평론가로서의 이동진의 평론이나 유투브를 즐겨 보는 편도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알레고리로 추천된 영상이 이동진의 책 추천영상이었다. (아니, 어쩌다보니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추천인가?! ;;;)

누가 추천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읽는 편이 아닌지라, 아니 오히려 의문을 품고 좀더 살펴보고 선택하는 편인지라, 검색을 좀 해보았는데... 왠걸 이 책 아주 구미가 당기는데?!

차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4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각 글의 제목마다 그 글을 쓴 사람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도 적혀있다. 그리고 책소개글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 4개의 글은 '앤드루 베벨'이라는 금융사업가의 삶에 대해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다른 사실을 말한다. 무엇이 진실인가는 중요치 않다. 무엇이 사실인지 판별하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울테니. ㅎㅎㅎ

-채권- 장편소설 (해럴드 배너)

태어났을 때부터 거의 모든 이점을 누려온 벤저민 래스크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몇 안 되는 특권 중 하나는 영웅적으로 부상할 특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회복력과 끈기에 관한 것도 아니고, 티끌로 황금의 운명을 만들어낼 불굴의 의지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p. 13)

이 책의 첫번째 글은 '소설'이라고 분류되어 있으므로 실존인물을 그려냈다할지라도 인물의 이름이나 설정등은 허구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문장에서부터 소설은 '벤저민 래스크'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과 폄하를 숨기지 않는다. 이어지는 내용도 비슷하다. 벤저민의 집안은 졸부에 가까웠고 부모님은 각자의 향락에 빠져 부부사이도 좋지 않아 하나뿐인 아들에도 무관심했으며 그 하나뿐인 아들 벤저민은 지극히도 사회성이 떨어져 대인기피증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모님 사후 물려받은 유산관리에도 큰 관심이 없었으나 우연히 채권으로 이득을 본 벤저민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이제야 발견한다. 아주 우연히 말이다.

벤저민은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 - 돈을 뒤틀면,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었다.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그의 성격과 잘 맞았고, 경이감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목표였다. 벌어들인 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또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사치란 천박한 부담이었다. 새로운 경험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고립된 영혼이 갈망하는 바는 아니었다. 정치와 권력 추구도 비사교적인 벤저민의 마음에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p. 23)

벤저민은 돈을 많이 버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돈으로 누리는 것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짐은 여행가방 두 개에 다 들어갈 정도였으며 호텔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았다면, 벤저민은 금융계에 끌린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를 어려워했을 것이다. 금융계의 복잡성이 한 가지 이유였던건 사실이지만, 그밖에도 벤저민에게 자본은 균 하나 없는 생물로 보였다는 이유도 있었다. 자본은 움직이고 먹고 자라고 새끼를 치고 병들며 죽을 수도 있지만, 깨끗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저민에게 이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투기의 규모가 커질수록 벤저민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과 멀어졌다. 그는 단 한 장의 지페도 만질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의 거래로 영향을 받는 사물이나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 (p. 24)' 그러니까 벤저민은 시작부터 괴물스러웠던 것이다. 금융괴물. 그가 수익을 더해갈수록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 존경심을 담아 언급하기도 했으나 '까다로울 정도로 아무 특징 없는 외모와 검소한 습관, 수도승과도 같은 호텔 생활(p. 26)' 로 인해 무수한 뒷담화의 주인공으로 더 널리 회자되었다. 그가 탐욕스러움과 사치스러움을 과시했다면 아마 더한 소문에 시달렸을테지만 여하튼 벤저민에 대해 소설 속 소설가 '해럴드 배너'는 가차없다. 이러한 시선은 벤저민의 부인과 부인의 집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브레보트 부인이 첫 시범을 보인 다음 딸에게 두 책의 문장을 번갈아가며 읊으라 하고, 이어 뒤에서부터 똑같이 해보라고 하면, 잘난 체하며 미소 짓던 손님들은 언제나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곤 했다. 이건 헬렌의 일상적인 묘기 중 첫번째에 불과했다. 그녀의 묘기에는 다양한 정신적 곡예가 포담되어 있었고, 이런 묘기는 늘 웅성거림과 환호 속에 끝났다. 머잖아 사람들은 헬렌을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종의 "아이템"이 되었다. (p. 50, 51)

앞서 (p. 26) 에서 소설가는 벤저민을 일종의 "캐릭터" 라고, 그러니까 좀 많이 이상한 캐릭터라고 표현했었는데, 헬렌의 성장기를 묘사하면서 헬렌의 똑똑함은 "아이템"으로 표현했다. 헬렌의 아버지는 신비주의에 빠져 미쳐가고 있었고, 헬렌의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면서도 자기과시를 놓치지 않았으며 헬렌은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와중에 친구하나 없이 책에 빠져사는 무감하고 무표정한 소녀로 자랐다고... 그러니 이렇게 이상한 괴짜들이 서로 만난다면? 나름 천생연분 아니었겠는가! 소설상에서는 그야말로 운명적 로맨스랄까. (강조하자면 이 소설은 소설속의 소설이니까)

헬렌은 어머니의 계략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상적인 구혼자가 발견되는 순간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헬렌 자신은 결혼생활이나 물질적 생활에 대해 아무런 야심이 없었으나 좋은 결혼을 통해 어머니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결혼은 다른 사람들의 돈에 의존하는 생활을 그만두고 마침내 정착할 유일한 기회였다. (p. 61)

헬렌은 어머니가 이겼다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 그대로 가만 놔두기만 하면 벤저민 래스크가 자신을 아내로 맞아들이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렇게 놔두기로 결정했다. 벤저민이 본질적으로 혼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벤저민의 어마어마한 고독 속에서 그녀도 자신의 고독을 찾게 될 터였다.-고독과 함께, 고압적인 부모가 늘 허락하지 않았던 자유도 찾게 될 것이다. 벤저민의 외로움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는 헬렌을 무시할 테고,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헬렌이 좋은 동반자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 고마움을 느낄 터였다. 어느 쪽이든, 헬렌은 남편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토록 갈망하던 독립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리라고 확신했다. (p. 66)

벤저민과 헬렌은 결혼했다. 파티도 없이 거실에서 증인만을 세운 단촐한 예식이었고,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다. 둘은 집이 제일 편했다. 집안 곳곳을 여행하며 각자의 공간을 안정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혼식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벤저민의 재산은 비범할 정도로 증식했다. 벤저민의 부하 직원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관들을 상대로 충격적인 규모의 거래를, 벤저민의 동료 다수가 기묘하다고 느낄 만큼 정확하게 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래가 반드시 극적인 성취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합쳐보면, 얼마 안되던 수익률이 더해져 어마어마한 숫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p. 76)

<트러스트>라는 책을 읽는 과정은, 첫번째 글인 '소설'과 나머지 세개의 이야기를 대조하며 사실을 골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 읽고나면 깨닫게 된다. 이 첫번째 글인 '소설'에 어느정도의 사실과 어느정도의 허구가 섞여 있었는지를. 중요한건 그러니까 마냥 다 허구는 아니었다라는 점이랄까. 그런 점에서 두번째 글로 이 첫번째글 소설에 대한 반감을 써내기로 아니 나름 진실을 알리겠다는 포부아래 회고록을 쓴 '베벨'이라는 금융사업가가 왜 그토록 [채권]을 격렬하게 싫어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여하튼, 첫번째 글 '소설'은 아직 진행중이다.

둘은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유난히 잘 어울린다는 걸 알았다.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각자의 특이함을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세상 밖에 나가서 하는 모든 행동에는 늘 어떤 형태의 타협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야 둘은 생전 처음으로, 대부분의 상호작용에 내재되어 있는 부담과 절차에 적응할 필요 없이, 혹은 그런 관습에 따르지 않을 때마다 팽배해지는 어색함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없이 안도감을 경험했다. 더 중요하게, 둘은 이 관계에서 서로를 향한 고마움이라는 기쁨을 찾았다. (p. 86)


모든 소설의 비극은 대개 '짧은 행복'에서 온다. 소설[채권]에서도 그랬다. 둘은 서로에게 이상적인 짝이었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헬렌에게 병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소설속 소설은 나름 1920년대를 전후한 뉴욕 증권가의 굵직한 사건들속 벤저민의 수익에 대한 의혹을 내비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리고 그런 페이지 분량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만 내 개인적 취향으로 그런 페이지들을 너무 쉽게 넘겨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놓친 페이지들 때문에 뒤이어 읽은 '회고록' 부분에서 앞부분을 여러번 들춰봐야 했다;;;)

벤저민의 수익은 끝없이 치솟았지만 그로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보며 헬렌의 정신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설가는 그렇게 헬렌의 발병원인마저 벤저민 탓으로 돌리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죽음까지도. 이후 헬렌의 치료과정에서는 이 책 속 4개의 글 중 유일하게 당대의 '정신치료'에 대한 설명을 길게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의도(당대 뉴욕 증권가의 광적 투기?!에 대한 은유)이자 소설속소설가 해럴드 배너의 전문분야를 유추하게 하는(혹은 당대 인기 있는 소설의 소재를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었다.

여하튼, 부부의 말로는 비참했다. 특히나 헬렌의 경우 끔찍한 죽음이었다.

-나의 인생- (앤드루 베벨)

차례 : 서문 Ⅰ.가문 Ⅱ.교육 Ⅲ.사업 Ⅳ.밀드레드 Ⅴ.번영과 그 적 Ⅵ.우리의 가치관을 회복하자 Ⅶ.유산

소설 속 소설 [채권]에 이은 두번째 글은 소설에서 벤저민으로 표현됐던 캐릭터의 실존 인물 '앤드루 베벨'의 회고록이다. 차레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베벨이 회고록 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내 업적을 아는 사람은 적고, 내 삶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한 번도 이 점에 괘념치 않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거둔 성취의 총계이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러나 최근에 나는 나의 과거가 우리 나라의 과거와 여러 차례 중첩되었던 만큼 내 이야기의 결정적인 장면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나이의 남자들에게 너무도 자주 나타나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욕망을 마음껏 충족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기나긴 세월 내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 점만으로도 내가 나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성향이 아니라는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내 인생 대부분은 소문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런 소문에 익숙한 채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굳이 뜬소문이나 이야기를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부정은 언제나 긍정의 일종이다. 하지만 나의 사랑하는 아내, 밀드레드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이러한 허구에 대처하고 반박하고자 하는 충동을 유난히 억누르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p. 153)

아마도 해럴드 배너의 소설 [채권]이 앤드루 베벨의 말년에 나와 상당히 주목을 끌고 있었나보다. 수십년간 침묵을 유지하던 베벨이 이토록 즉각적인 반박에 나선 것을 보면.

시작은 자신의 부인에 대한 폄하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뒤이어진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베벨은 자신이 회고록 쓰는 이유에 '나라의 산업뿐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의 정신에도 애석한 퇴로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며 '이 책이 지금껏 우리 국민의 특징이었던 지칠 줄 모르는 대담성을 일깨우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p. 154)' 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회고록은 중간중간 비어있고 간단한 메모로 대체되기도 한 미완의 글이었다. 즉 발표되지 못한 글이었다. 참고로 '회고록'의 내용은 당연히 소설[채권]의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다. 회고록의 '차례'에 적힌 순서대로 차근차근. '회고록'에서 핵심부분은 '밀드레드' 부분이다.

세상에는 예외적으로 눈이 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불가사의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해답이 이처럼 개명된 소수에게는 빤히 보인다. 세상에 대한 이들의 접근법은 아주 쉽고 간단하면서도 틀림없이 옳다. 이들은 거짓된 복잡성을 꿰뚫어보고 인생의 단순한 진실을 발견한다. 밀드레드는 바로 그런 명석함이라는 축복을 받았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시련과 언제나 허약했던 건강 때문에 그녀는 어린아이나 노인처럼, 존재의 경계선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짐오한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도 약하고 너무도 착한 사람이었고, 너무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 그녀는 인간성과 온기로 나를 구원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친절함으로 나를 구원했다. 나에게 가정을 만들어줌으로써 나를 구원했다. (p. 183, 184)

'회고록'에서 베벨의 부인 밀드레드는 명석하지만 허약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베벨을 구원해준 천상여자 천상아내 뭐 그런 이미지였다. 밀드레드의 가장 큰 관심분야였던 후원에 있어서도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을 품고서 명분을 고르고 기관을 선택했으나, 이성에 귀기울이라는 내 요청도 귀담아듣고 자신이 내린 선택이 재정적으로 불건전할 때마다 내 안내에 따랐다. 나의 질서 있는 접근법이 그녀의 이해할 만한 열정을 통제했다. (p. 195)' 음... 상대를 낯춤으로써 자신을 올리는 것 같은, 이 돌려까기식 표현이 왠지 거슬렸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여하튼, 베벨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이 글을 통해 내가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자세히 밝히겠지만, 1920년대 내가 했던 행동은 우리가 20년대 내내 경험해온 성장을 만들어냈을 분 아니라 연장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나의 행동은 우리 나라 경제의 건전성을 지키는 데도 일조했다. (p. 202)' 그리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데이는 또 다... 이유가 있다.

내가 경력을 쌓는 내내 직관은 늘 큰 도움이 되었으며, 내가 명성을 얻은 건 많은 부분 그 덕분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려는 투자자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나의 이익은 직관에 과학과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에 대한 객관적 해석을 더한 데서 나왔다. 그 결과는 너무도 자주 "예지력"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내가 늘 티커 테이프보다 한발 앞서도록 해준 방법론과 본능의 독특한 조합이다. (p. 208)

1920년대가 시작될 때 취미로 투기를 하는 사람 중 여성의 비율은 1.5퍼센트에 불과했다. 1920년대가 끝날 때에는 여성의 수가 거의 40퍼센트에 이르렀다. 재앙이 닥치리라는 지표로 이보다 분명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집단적 환각에서 히스테리로 후퇴하는 건 그저 시간문제였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의무라는 걸 알았다. (p. 211)

나의 행동이 미국의 산어과 영업을 수호했다. 나는 우리 경제를 비윤리적 투기꾼들과 신뢰를 파괴하는 자들로부터 지켜왔다. (p. 214)

책속 4개의 글 중에서 가장 사실을 담고 있어야 할 '회고록'이 가장 허구적으로 읽혔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강조하니까 뭔가 강렬하게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달까. 베벨이 '내 말만 믿어' 라고 하는 부분부분마다 속으론 '네 말만 안 믿으면 될 것같다'라는 생각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회고록'에 대한 의문들은 세번째 글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회고록을 기억하며-(아이다 파르텐자)

수십년 동안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닫혀 있던 양판문이 지금은 화요일에서 일요일, 오전 열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개방된다. 나는 매디슨 애비뉴와 피프스 애비뉴 사이에 있는 87번가의 베벨 저택 현관을 몇 년째 피해왔다. (...) 오랫동안 계속되던 소송이 끝나고, 앤드루 베벨이 사망한 이후의 계획에 따라 저택을 박물관으로 바꾸는 작업이 마침내 시작됐다는 내용이었다. (...) 1981년 봄에 뉴욕의 모든 간행물은 이 도시에 최근에 세워진 "보석"이자 역사적 "보물", 문화적 "보배"인 베벨 저택에 관한 기사를 냈다. (...) 그러다가 몇 달 전 일헌번째 생일 즈음에 나는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에서 베벨 재단이 최근 앤드루와 밀드레드 베벨 부부의 개인서류를 소장품에 추가했다는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 어쩌면 내가 막 일흔 살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이 소식은-그런 서류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은-내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p. 223, 224)

베벨의 회고록에서 서문의 날짜는 1938년 이었다. 1981년의 아이다 파르텐자가 일흔살이니까 1938년에는 이십대였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작가가 된 것은 베벨 부부 때문이다. 내가 처음 앤드루를 만난 건 밀드레드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였지만 말이다. (p. 225)' 아이다는 앞서 읽은 '회고록'의 대필비서였다. 그렇다면 아이다는 왜 수십년동안 베벨저택을 피해다녔을까? 아이다는 왜 베벨부부의 서류를 볼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흥분하게 되었을까? 책 속 세번째 글부터는 약간 추리소설 읽는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최악의 문학은 늘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쓰이기 때문 (p. 233)

아이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이민자로 가난한 식자공이었고 본국에서 무정부주의단체활동을 했으며 지금도 그 단체들을 위한 전단과 광고지를 인쇄해주고 있었다. 또한 하나뿐인 딸 아이다의 글들을 어려서부터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책으로 엮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한 신념은 아이다의 일상을 피로하게 할 뿐이고, 자본가를 혐오하는 아버지는 금융사업가인 베벨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한 저 말은 (어쩌면 이 책에서 유일한) 진리에 가까웠다. 아이다는 베벨의 회고록을 대필하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해야 했다. 그렇게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쓴 문학이 바로 베벨의 회고록 이었던 것이다.

일 년쯤 전에 나온 책일세. 해럴드 배너라는 그 작가는 거의 잊힌 사람이었어. 내 알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들 말이 해럴드 배너는 별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더군. (...) 그러다가, 내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자가 이걸 쓰기 시작한 걸세. (...) 좌우간, 그자는 책을 썼네. 호평을 받았지. 내가 아는 사람은 모두 그 책을 읽은 것 같아. (...) 이 책이 공공연하게 내 아내와 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를 나빠 보이게 썼기 때문이야. (...) 모두가 이 책이 우리 얘기라는 걸 알지. (...) 사람들은 이게 믿음직한 정보라고 생각한다네. (...) 그 허구의 글에 나오는 상상 속 사건들이 이제는 내 삶의 실체적 진실보다도 현실 세상에 더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네. (...) 나는 이 상스러운 위작이 내 인생의 이야기가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걸세. 이 더러운 공상이 내 아내의 기억을 더럽히게 놔두지 않을 거야. (...) 해럴드 배너는 내 변호사들이 이미 처리하고 있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할 시간이야. (...) 내가 자서전을 쓰도록 도와줬으면 좋겠군. (p. 272, 273, 274)

아이다는 베벨에 대해서 잘 모르는 가난한 이민자2세였고 [채권]이라는 책은 듣도보도 못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베벨의 자서전담당 비서로 뽑히게 된 이유라는 걸 아이다는 몰랐다. 아이다는 그저 취직된 것에 감읍했고 평균보다 두툼한 급여봉투에 아찔해지며 그렇게 '돈'의 위력를 '자본가'의 위세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채권]은 그냥 문학작품이 아니라 증거물이었다. 나 역시 그냥 독자가 아니라 탐정이었다. 그 안에 실마리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소설 속 몇몇 요소는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 베벨처럼 큰 권력을 가지고 있고 바쁜 사람이 문학작품에 문제를 제기하는 수고를 들이는 이유가 뭘까? 소설에는 베벨이 억누르고 반박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p. 283)

자료 모두가 소설에서 (약간 부정확하고 파격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나 베벨이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약간 포장하고 손질해) 내게 직접 해준 설명 둘 다에서 발견되는 금융거래 대부분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고,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배너와 베벨이 둘 다 각자의 이야기에서 그런 자료들을 조금만 바꾸어 거의 비슷하게 인용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p. 286)

베벨은 배너의 소설이 사실인것 마냥 유표되는 것에 제대로 반박하고자 자서전을 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금융거래 관련된 내용은 모두 긍정했다. 자, 소설가 배너가 허구로 쓴 것은 어떤 부분들일까? 금융가 베벨이 반박하고자 하는 허구는 과연 허구이기만 한 걸까? 둘다 같은 내용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 금융거래 대부분은 과연 사실인걸까? 누구의 긍정도 누구의 부정도 전적으로 믿을 수 없게 만든 것, 그게 이 책의 묘미인것 같다.

현재의 아이다가 박물관이 된 베벨의 저택에는 <위대한 개츠비>책은 있어도 [채권]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런데... <위대한 개츠비>를 등장시킨 저자의 의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는 나오는 대로 이야기하겠네. 자네는 그 이야기를 받아 적고, 필요하면 문장을 다듬어 전체적으로 말이 되게 만들게. (...) 일반 독자가 보기에 지나치게 거슬리거나 난해한 내용은 절대 없어야 하네. 때때로 윤색을 해도 되고. 뭐랄까, 조금씩 바꾸는 것 말이야. 그냥 잘 읽히게 하게. 당연히 이야기는 내가 해주겠지만, 세부사항 하나하나의 정리는 전부 자네에게 맡기겠네. (...) 또 베벨 부인을 다루는 문단에는...... 여성적인 손길을 더해주리라고 믿네 (p. 296)

비밀유지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일을 시작하후 아이다의 글을 통해 드러나는 베벨의 모습은 앞선 두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여하튼, 아이다는 배너의 책을 처음 읽으며 그 내용보다도 문체적 매력에 빠져들어 그의 작품세계를 좀더 알고 싶어졌고 무엇보다 베벨에 대한 글을 쓰는 데 있어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서관에 갔는데, '배너는 없었다. 아무것도. 단 한 권도. (...)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종합적인 장서 목록 중에 하나에 해럴드 배너의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배너의 초기 작품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채권]은 다양한 평을 받았다. 설명은 하나뿐이었다. (p. 363)' 아이다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녀의 작가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었다. '더이상 베벨의 목소리를 포착하지 않기로 (...) 그 대신 (...) 베벨이 가지고 싶어하는 목소리,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를 만들어내기로 (p. 310)'

책의 핵심은 아내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가 가진 사업가로서의 출중한 능력을 주장하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투지가 늘 국가의 성장을 동반했으며, 사실상 국가의 성장을 촉진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 자네에게 고백할 게 있는데, 밀드레드가 내 청혼을 받아준 건 뜻밖이었다네. 나는 밀드레드가 이 모든 것에....... 이것에 관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 (...) 나는 밀드레드 없이 내가 무엇을 해냈을지 모르겠네 (p. 315)

현재의 아이다는 박물관에서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밀드레드의 서류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아이다는 베벨의 일을 하면서부터 밀드레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껴왔었다. 기묘한 아버지 아래 자란 성장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베벨의 이야기를 그의 속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몇 안되는 사람이라서이기도 했고 알게될수록 베벨이 감추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다. 밀드레드 라는 숨겨진 인물에 대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빈약한 서류를 통해 알게 되는 밀드레드는 '천진난만하고 어린애 같으며 '여성적'이라고 깔볼 만한 그림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p. 342)

나는 그녀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사교계 사람들이-그녀의 문화생활에 대해 알았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베벨이 자서진 집필을 맡길 사람으로 브루클린 출신 여자애인나를 선택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든다. (...) 앤드루가 묘사한 아내의 가정적이고 어린애 같은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모습의 베벨 부인은 (비록 혼자서일지라도) 정치적 논평에 참여하거나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시사에 관심을 두는 사람과는 양립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스크랩북은 배너가 표현한 밀드레드와도 맞지 않는다. 조용한 탐미주의자인 헬렌 래스크라면 시사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지 않을 터다. 이 스크랩북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두 남자가 내놓은 초상과 너무도 극적으로 달랐기에, 나는 이번이 진짜 밀드레드 베벨을 처음으로 일별하는 순간이라고 느낀다. (p. 343, 344)

밀드레드 관련 서류들을 살펴보며 아이다는 깨닫게 된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존재가 그보다도 더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 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어쩌면 해럴드 배너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왜 소설에 밀드레드의 망가진 모습을 그린단 말인가? 이건 [채권]을 처음 읽은 이후로 내가 자문하고 또 자문한 질문이었다. (p. 346)' 이 책속에는 4편의 글이 실려있다. 앞의 두 글은 남성의 글이고 뒤의 두 글은 여성의 글이다. 우연일까?!

대체로 그는 사업 거래애 관한 부정확한 내용을 교정하고 밀드렏에 관한 문든들을 계속해서 편집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금융 투자와 아내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일반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수학적 재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 재능이 경력을 쌓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p. 401)

베벨이 편집하는 밀드레드에 대한 묘사는 아이다에 의해 점점 더 윤색에 윤색을 거듭하게 되고 그 글을 읽은 베벨은 심지어 글의 내용이 마치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처럼 아이다 앞에서 웃으며 떠벌리는 지경에 이른다. 그야말로 가짜 이야기였다. '내 기억을 표절당하는 데는 엽기적인 폭력성이 있었다. (p. 406)'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다의 회고록 창작은 멈추게 된다.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던 때 베벨이 돌연사한 것이다. 하지만 비밀유지각서 때문이기도 했고 배너의 책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는 아이다로서는 이후에도 베벨과 무엇으로도 연결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칠십이 되어서야 진실?!에 다가가보기로 결심한것이다.

나는 장부 중간에 끼워져 있는 얇은 노트를 발견한다. 그 노트를 꺼내자 줄이 쳐진 종이에 어렴풋한 직사각형 자국이 남는다. 노트의 표지에는 밀드레드의 글씨로 "선물先物"이라고 적혀 있다. (p. 416) 나는 서류 사이에 그 일기장을 숨겨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나 자신에게 놀란다. (...) 하지만 이건 절도가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이것은 수십년이라는 시간 지연을 거친 대화다. 이 페이지들은 평생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다려왔다. 읽힐 수만 있다면 말이다. (p. 417)

책의 앞부분 차례에서는 '선물'이라고 한글로만 적혀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글 제목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선물先物. 그 선물이야기가 밀드레드 베벨의 목소리로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어 풀리기 시작한다. 밀드레드의 진짜 일기.

-선물先物-(밀드레드 베벨)

1926년에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그 시절에, 나는 그게 우리 결혼 생활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가 정말로 결혼생활이 시작된 때라는 걸 알았다. 맹세를 한 상대보다는 맹세 자체에 더 헌신하게 될 때가 진정한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p. 447)

어떤 책은 읽을 때보다 정리할 때 시간을 더 많이 쓰게 되곤 한다. 이 책이 그랬다. 반나절에 다 읽은 책을 정리하느라 하루를 꼬박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이게 뭐라고;;; 여하튼,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읽고 나서 더 많이 시간이 필요한 책.

앞 세개의 글에서 생겨난 의문점들을 마지막의 짧은 글 하나가 답지처럼 해결해주지만, 물음표는 사라졌어도 마침표까지 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마지막 글에 대한 스포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아두길. 이 책의 모든 반전은 마지막글, 4번째 글에 있다는 것을. ㅎㅎㅎ)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사실, <트러스트>의 마지막 부분이자 4부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마지막 부분이 그런 의구심을 더욱 키운다. (p. 482)'라고 하면서,

해럴드 배너의 다소 감상적인 작품과 앤드루 베벨의 거창하지만 완성되지 못한 자서전, 밀드레드 베벨의 이야기를 쓰되 미국의 인종적 다양성과 페미니즘의 이슈 등 자기 현실의 문제를 함께 다룬 아이다 파르텐자의 이야기등은, 그러므로 밀드레드 베벨의 삶을 탐구하거나 재구성하려는 노력일 뿐 아니라 해럴드 배너, 앤드루 베벨, 아이다 파르텐자나 그들이 살아간 시대에 관한 추리를 하게 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p. 483)

라고 했다. '단서'라기엔 추상적일 수 있을것 같은데 여하튼 문제지점들을 많이 박아놓은 작품이긴 하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등단작으로 유수한 상을 받았던데, 과거에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더, 늦은 등단과 완벽한 작품이 마치 세트인것처럼 느끼게 하는 작가들이 종종 눈에 띈다. 여러모로 자극이 되는 작품이었다.

"말했지만, 그게 시작이었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살펴봐야 할 때는 1926년이야. 금융의 세계사 어디를 보든 1926년에 내가 거둔 것 같은 성공이 있나? 놀랍지도 않지만, 내가 사기를 쳤다는 비난이 있었어. 그런 비난이 머리가 단순한 기자들이 내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예비 소설가들이 내가 거둔 전례 없는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네. 좋은 얘기지만, 취소. 그해 내가 한 투자는 시장 전체에 걸친 거래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얘기를 해야겠나? 어떻게 사기꾼이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주식을 떠안을 수 있지?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모든 회사를 누군가가 뒤흔들거나 침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스꽝스럽네. 나는 나와 함께 이 나라 전체를 부양했어. 그런데 언론은 나한테 감사하기는 커녕 나를 비방했지. 나는 그 시절의 번영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상당 부분 선도했네. 그러니 공매도자들의 음모론적 합의에 관한 새대가리 같은 생각은 전혀 듣고 싶지 않아. 나한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시간이나 그럴 마음이 있는 줄 아나보지. 이 말은 취소"

(p. 355 -[회고록을 기억하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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