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현대인을 위한 고대의 지혜 아날로그 아르고스 4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제임스 롬 엮음, 김현주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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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현대인을 위한 고대인의 지혜

세네카는 고대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이다. 얼마전 읽었던 세네카의 에세이집 글들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세네카의 글을 모은 책이다.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는 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질문들이다. 그 지혜를 오랜 세월 전해져온 고대인의 글에서 배워볼 수 있기를...

그는 삶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일 뿐이며 인간은 태어나는 날부터 매일 죽어가기에 살아가면서 죽음을 연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세네카의 사상이 담긴 여덟 권의 저작에서 가려 엮은 것으로, 이 글을 통해 세네카는 자신의 편지 수신인과 인류에게 죽음, 즉 사람의 생이 끝나는 지점을 받아들일 필요성에 대해 당시나 지금이나 유례없을 만큼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 (p. 10)

이 책은 세네카의 에세이 전문을 실은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내용을 옮겨와 엮은 것이다. 그 엮은 주제는 하나 '죽음' 이다.

철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였던 세네카는 AD30년대 말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미쳐가며 잔인하게 굴던 시대에 젊은 원로원 의원을 지냈다. 40년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정치적 여론 조작용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로마로 환송 명령을 받고 어린 네로의 스승이 된 세네카는 50년대부터 60년대 초까지 황실에서 지냈다. 그는 점점 정신이 이상해져 심지어 가족들까지 죽이려는 네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미수에 그쳤던 황제 암살 음모에 공모했다는 혐의로(아마도 잘못된 혐의였을 것이다) 네로의 분노를 사서 AD65년, 60대의 나이에 자살하라는 형을 선고받았다. (p. 12)

세네카가 살았던 시대는 그야말로 광적인 황제들의 시대였다. (한마디로 멀쩡한 정신의 황제를 경험해보지 못했다고나 할까) 죽음이 난무했고 고문과 사형이 아닌 자살형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고전을 전공하고 그리스문학과 역사를 가르치는 저자는 세네카가 '그리스의 선대 철학자들과 로마의 교사들로부터 스토아철학의 체계를 물려받았지만 죽음의 방법, 특히 자살에 관한 원칙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했다. (p. 14)' 고 말한다. 하지만 세네카가 말하는 자살과 현대적 의미의 자살은 구분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네카는 '자신의 글에 쓴 것과 같은 자살을 실제로도 자주 목격했다. 칼리굴라와 네로를 포함하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모든 황제들이 정적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자주 명령했고 명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세네카는 그런 강요된 자살을 많이 목격해다. 그래서 다른 동료 스토아 학자들보다 훨씬 자주, 더 열정적으로 고통이나 정치적 압력에서 탈출할지 말지의 여부와그 시기에 관한 주제로 다시 돌아갔다. (p. 15)' 과거의 모든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스토아철학자로서 정치계에 있었던 세네카의 현실은 그의 철학적 주제를 그가 경험하고 목격하는 현실속에서 찾게 만들었다.

세네카의 글은 죽음에도 존엄성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잘 죽는 것'의 의미가 본인의 죽음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든 떠나는 시간과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든 아니면 무자비한 원수가 육체에 가하는 폭력을 용기 있게 참아내는 것이든, 그에게는 잘 죽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p. 17)

세네카의 현실은 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늘 마음 졸이며 위기의식 속에 살았다기 보다는 스토아철학자로서 '잘 죽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했다. 저자는 '세네카가 약25년에 걸쳐 쓴 산문 중 죽음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 여덟 편의 산문에서 발췌하여 모은 이 책의 구절들은 죽음에 관한 교훈을 속성으로 가르치려는 그의 노력이다. (p. 18)' 라고 말했다. 그가 처했던 현실을 상상해보고 그가 남긴 말들을 읽어보며 그가 선택한 죽음에 대해 그는 과연 죽음을 잘 맞이했는지 판단해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의미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같다.

친밀한 편지글 형식을 띠고 있지만 [도덕적 서간집]은 애초에 출판을 위해 쓰인 글이며 수신인인 '너'는 루킬리우스 일 때도 있지만 로마 시민이나 모든 인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p. 23)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연습하라'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전달하자면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딱 한 번만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일이 쓸모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죽음을 연습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알기는 해도 경험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항상 연구해야 한다. '죽음을 연습하라' 이렇게 충고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자유를 연습하라고 명령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노예가 되는지를 잊는다. (p. 24) [도덕적 서간집]

죽음에는 연습이 있을 수 없다. 죽음에 기술이 필요하다면 그야말로 단 한번의 기회에 사용되는 단 한번의 기술일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유일하게 경험해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러니 연습해야 한다고 세네카는 말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연습하는 것이 곧 무엇에도 노예로서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될 것이라 말한다. 죽음을 연습하는 것은 곧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네카는 폐결핵을 포함하는 호흡기 질환과 천식으로 평생 고통받았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 불편함 때문에 청년기에 자살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는 일평생 아래에 묘사되는 발작을 경험했을 테지만 특별히 의사들이 그 발작들에 붙여준 이름이 (세네카에 따르면) 메디타티오 모티스, 즉 '죽음을 위한 연습'인 점을 고려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질병에 의미가 더해진 셈이다. (p. 30)

세네카의 정치적 상황속에서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세네카는 평생 폐질환으로 고통 받았고 그 병을 '죽음을 위한 연습' 이라고 불렀다.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질병을 평생 앓으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도 언제 어느때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삶이라니 당연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을 것 같다. 이렇게보면 철학자로서 '잘 죽는 법'에 대해 고뇌하고 고뇌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나는 준비되어 있다. 앞으로 남은 모든 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것이 즐겁더라도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칭찬하거나 따라 하지 말라. 내쫓기듯 떠나는 것에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도 덕이 있으니, 나는 내쫓길 테지만 그럼에도 나의 떠남을 받아들인다. 내쫓긴다는 것은 떠나는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추방당하는 것이기에 현자는 절대 내쫓기지 않는다. 현자는 모든 일을 본의 아니게 하지 않는다. 그는 필연에서 벗어난다. 왜냐하면 그는 필연이 강요하는 죽음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p. 33)[도덕적 서간집 54]

이 책에 자주 인용되는 [도덕적 서간집]은 세네카가 죽기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에세이라고 한다.(p. 141 참고) 네로에게 퇴출당하고 칩거하는 동안 당연히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어차피 죽을 거 편안하게 최선을 다해 잘 맞이하고 싶지 않았을까.

죽음은 관습적으로 경멸당하는 것 이상으로 경멸당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많은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수많은 재주꾼은 죽음에 관한 나쁜 평판을 퍼뜨리려고 노력하며 지하감옥, 영원한 밤으로 뒤덮인 왕국 등으로 죽음을 묘사한다. (p. 55)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우화에 불과하며 사후세계에는 죽은 자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해도 또 다른 공포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지하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만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중략) 죽음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신은 덕을 얻지 못하겠지만 죽음을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여긴다면 가능할 것이다. (p. 56) [도덕적 서간집 82]

세네카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들은 다 우화이고 거짓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잘 죽는 것은 사후세계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은 악한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니다. 세네카는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젊었을 때는 잘 사는 것에 관심을 두었고 늙어서는 잘 죽는 것에 신경쓰고 있다. 잘 죽는 것이란 기꺼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이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을 기대하며, 무엇보다 슬픔을 배제하고 죽음을 응시하기로 마음을 가다듬자. 우리는 삶을 준비하기 이전에 죽음에 대비해야 한다. 삶이 이미 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우리는 더 채워 넣으려고 욕심낸다. 항상 무언가 부족해 보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 보일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살았음을 결정하는 것은 햇수도 아니고 날수도 아니고 정신이다. 소중한 루킬리우스,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았다. 나는 마음 가득 죽음을 기다린다. (p. 67) [도덕적 서간집 61]

세네카는 내내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머릿속에선 자신의 삶이 스쳐지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사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래 살게 돕는 것은 운명이지만 충분히 살게 돕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삶은 충만하다면 길 것이며, 정신이 자신의 선을 스스로 되찾고 통제할 때 삶은 충만해진다. 느리게 지나가는 80년 세월이 어찌 특권이겠는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것이다. 늦게 죽는 것이 아니라 오래 죽어가는 것이다. (p. 78) 얼마나 살아야 완전하겠느냐고 네가 물었다. 지혜를 얻을 때까지 사는 것이다. 그 목표에 도달한 사람은 가장 먼 지점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지점에서 인생을 끝맺는다. (p. 80) [도덕적 서간집 93]

세네카는 수명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짧게 살다간 이의 죽음을 슬퍼할 것도 없고 장수하는 이의 삶을 부러워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충분히 충만하게 사는 것이다. 세네카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한 만족감으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결국은 죽음이 두려웠기에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용기를 가지려 했던 것이 아닐까. 고찰하고 또 고찰하며 용기와 지혜를 갖춘 현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소크라테스는 독을 마시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며 금욕함으로써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30일 동안 죽음을 기다렸다. 모든 가능성을 열려 있다는 - 그렇게 긴 기간이라면 온갖 종류의 희망의 방이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믿음에서가 아니라 법에 복종하며 친구들이 자신의 최후의 날에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해 서였다. 죽음을 경멸하면서도 독배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일은 없으리라. (p. 114) [도덕적 서간집 70]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경멸하지도 않았고 독배를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앞서서 '죽음은 관습적으로 경멸당하는 것 이상으로 경멸당해야 한다. (p.55)' 라는 문장을 보면 세네카는 죽음을 경멸했던 것도 같다. 경멸하는 것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 죽음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려 했던 것일까.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더 살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기가 힘들었던 것인지도...

도둑과 적군 모두 네 목에 칼을 꽂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권력자는 물론이거니와 노예에게도 네 삶과 죽음의 권한이 있을 수 있다. 공공연한 공격이든 비밀 모의를 통해서는 집안에서 배신당해 몰락한 자들의 일화를 생각해보라. 왕보다 노예의 증오에 의해 무너졌던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 144) [도덕적 서간집 4]

왕뿐만 아니라 노예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하던 시대였다. 세네카는 네로황제에 의해서도 죽음을 당할수 있고 집안에서 부리던 노예에 의해서도 죽음을 당할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네카는 노예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가졌던 철학자였다. '노예상태는 정신의 상태가 아닌 육체의 상태이며, 노예는 영혼의 자유를 통해 육체의 예속을 초월할 수 있다' 고 말했던 세네카가 두려워 했던 존재는 결국 자신을 내친 네로황제 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잔인한 처형이 아니라 자살형이 내려졌을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견줄만한 모습으로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세네카는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각색한 장면 중 죽음을 차분하게 마주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매우 동경했다. (중략) 타키투스의 역사서 [연대기]에 실린 아래의 본문에 세네카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전해져 내려온다. 세네카의 자살은 복잡다단했고, 타키투스의 기록은 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이야기만큼 긍정적이지는 않다. 세네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내내 생각하고 준비했던 그 죽음을 실제로 이루어냈는지는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p. 154~155))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 세네카의 죽음 장면만 찾아 읽어봤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것처럼 세네카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같은 감동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세네카가 알려주는 고대의 지혜는 결국 인간은 누구나 다 거기서거기라는 것 아닐까? 평생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현인이 되고자 했던 세네카와 죽음을 생각지 않고 삶에 치중하는 현대인은 다를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니 우리가 세네카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메멘토 모리' 가 아닐런지.

우리는 어느 순간 부득이하게 삶을 떠나야 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어야 하기에, 조금 더 거창한 이유로 죽는 것은 일종의 기쁨이다. 우리는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죽는다. (p. 152) [자연 연구 6]

그저 오래 사는 것에 대해 세네카는 '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것이다. 늦게 죽는 것이 아니라 오래 죽어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산다는 것이 오래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얼만큼 살든 충만하게 사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세네카의 문장에서 지혜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죽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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