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9
이경희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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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사이버펑크 액션 스릴러

치밀하게 채워진 암투와 반전, 첨단 과학과 철학적 사유의 흥미로운 결함 (표지 中)

 

 

그래비티북스의 새로운 SF시리즈인 GF시리즈 중 <꿈을 꾸듯 춤을 추듯> 을 읽었었는데, 신선하고 좋았었다. 그런데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보고 바로 흥미가 일었다. 그리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책이었다.

테세우스는 알겠는데,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일까?

테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속 인물이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 왕의 혼외 자식으로 성장하면 아버지가 정해놓은 미션을 수행후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떠났고 테세우스는 미션을 성공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고구려 왕 주몽과 아들 유리왕의 일화와 흡사한 셈이다. 왕자의 성장기 랄까.

왕자 테세우스는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크레테의 왕을 찾아가 미로 속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귀환하지만, 떠나기전 자신이 살아돌아오면 흰돛을 펼치고 오고 죽으면 검은돛을 펼치고 오겠다고 말한 것을 깜빡하고 승리감에 취해 검은돛을 바꿔달지 못한채 돌아오는 길, 멀리서 돛의 색깔만 보고 좌절한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 바다가 아이게우스의 바다 즉 에개해 이다. 이 신화 속 배가 테세우스의 배 일텐데... 배가 무슨 의미가 있었나? 내가 아는 신화에서 배에 대해 별다르게 언급한 것을 읽은 기억이 없다.

이 배에 대한 의미는 1장 / 2장 / 3장 을 구분하는 검은 속지 속의 내용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1장 앞 검은 속지의 글자는 희랍어 같긴 해지만 뜻모를 글자였고, 2장 앞 검은 속지의 글자는 영어였지만 패스했고, 3장 앞 검은 속지에 와서야 한글로 된 내용을 읽으면서 앞의 두 검은 속지 내용도 같은 내용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장의 제목이 컨티넘 CONTINUUM, 2장의 제목이 BODY, 3장의 제목이 MEMORY 인 것도 그 의미도 그제야 나름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멋진 발상이다.

아테네인들은 젊은이들과 함께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오래되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온전한 새 판자로 교체했고, 그 결과,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성장과 변화에 관한 논쟁의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배가 처음과 같은 배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장 앞 검은 속지 내용)

위 인용 문구는 2장의 초반 내용과 연결되고 이 책의 핵심질문과도 연결된다.

그는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생일 선물로 받은 블록 조립 장난감에 관한 기억이었다. 어린 아이였던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블록들을 쌓아 배를 만들었다. 손수 바느질한 돛을 달고, 해적 깃발도 올렸다. 자신만의 배를 갖게 된 그는 기뻤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뻐해주지 않았다. '누가 이따위 것에 시간을 써도 된다고 했지?' 아버지는 배를 집어 던졌다. 조각조각 블록들이 산산히 흩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블록을 주워 담은 그는 이불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펑펑 눈물을 쏟다 잠이들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 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영문을 묻자 가사 안드로이드는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엄마가 밤을 꼬박 새워 산산이 조각난 배를 다시 하나하나 조립했다는 거였다. 가사 안드로이드의 메모리까지 확인해가며 재현해낸 해석선의 조립상태는 완벽했다. 하지만 더는 기쁘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그 배가 전혀 다른 배처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p. 123~124)

 

이 소설은 SF이면서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연속성? 몸? 기억?

트라이플래닛이라는 거대 기업의 화장 석진환은 어느날 사고를 당하고 6개월 후 눈을 뜬 순간 온몸이 기계화 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를 죽이고자 하는 여동생 석미진은 오빠의 신체조직들로 몸을 부활시키고 그 몸의 석진환은 백지상태로 깨어난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해둔 절차에 따라 비밀리에 저장해둔 메모리기억은 실체는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이 진짜 석진환이라고 주장한다. 세 명의 아니 세 종류의 석진환, 그 중 진짜 석진환은 누구인가?

트라이플래닛의 주요 사업은 크게 두가지 갈래다. 플래닛 전자와 바이오메디컬 로 의족, 의수, 인공장기 같은 의체를 개발하는 전자 쪽과 DNA 조작이나 신약개발을 하는 바이오메디컬은 둘다 인간과 관련된 첨단산업의 결정체이다. 뇌는 그대로 두고 인공신체를 갖는 것과 병든냉동보관신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존재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으며, 동시에 거대재벌기업이 독점하는 사회의 폐단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서야 블록체인금융에 대해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뉴럴링크 니 실리카나노셀 이니 등에 대해, 그외 여러 신기술들에 대해 꼼꼼이 달린 주석을 읽으며 이런 기술까지 있었나 싶어 놀라하며 읽었다. 과학적 근거가 분명한 SF는 현실감을 높인다. 중국 SF작가 류츠신의 소설을 읽을 때 신빙성 높은 기술들에 대한 해박한 묘사에 감탄했었는데, 우리나라 SF소설도 그에 못지 않은 묘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고 이제껏 알지 못해 미안했다. 탄탄한 과학적 근거들에 대한 설명에 푹 빠져들어 읽느라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의체를 교환하는 동안 그는 영생의 꿈을 꾸었다 사실 꿈이라기보단 상상에 가까웠다. 그는 잠이 들지 않는 뇌를 가졌으니까. 상상과 꿈의 경계 속에서 그는, 몸이라 부를만한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고, 작디작은 뇌만이 블랙박스에 갇힌 채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죽음을 정복한 그의 정신은 상자 속에서 영원히, 끝없는 미래까지 존재를 이어갔다. 하지만 더는 이 상황이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알았다. 영겁에 가까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온전히 세계를 누빌 육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그 육체를 매만져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p. 148)

소설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로맨스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아무리 인공화되어 가고 기계화되어가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포스트 휴먼'을 등장시킴으로써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는 포스트휴먼의 사랑.

이 소설은 외부적 묘사보다는 내부적 묘사가 많아서 미래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지금과 같은 듯 다른 방식으로 벌어지는 기업내부에서 벌어지는 친족들간의 암투, 인간과 직결된 미래산업에 대한 전망, 인간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SF가 이렇게도 상상하게 만들 수 있구나 싶어 놀라웠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프로그래밍을 배웠고, 철학을 좋아했지만 결국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젊은 작가답게 뒤에 붙여진 '작가의 말은' 시작부터 참신했다. '작가의 말' 을 읽어보며 웃어보긴 또 처음이다.

[강력 경고] 세상에는 책을 펼치자마자 맨 뒤로 달려와 후기부터 읽어대는 폭주족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는 강력한 스포이러가 포함되어 있사오니, 부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첫 장부터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p. 312)

이런 발랄한 경고를 보았나 ㅎㅎㅎ

작가는 작품으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믿음이 세간에 널리 퍼진 듯합니다만, 30년 남짓 독자로 살아온 저는 항상 이런 전통이 불만이었습니다. 무릇 작가라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태산보다 높게 쌓인 사람들이며, 독자라는 사람들은 작가의 깊은 마음을 캐내고 싶어 안달 난 광부들이 아니겠습니까. 블루레이 디스크마다 담겨있는 코멘터리 영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오늘은 저만의 공간을 얻은 기념으로 마음껏 길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p. 312)

이어지는 작가의 말 또한 이 책을 상상해온 작가의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책 내용은 진지하게 읽었는데 작가의 말에서 웃어가며 읽은 것도 처음이지 싶다.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해준 책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다 좋았다.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면 찾아 읽고 싶고, 다른 GF시리즈도 읽어보고 싶다는, 독서의 폭을 넓혀준 좋은 SF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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