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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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진영은 '우리'라는 단어를 '불행의 연대로 이루어진 무리'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작가다. 삶이 무서워서 얼어붙은 사람에게 서슴없이 다가가서 짧은 칼날로 얼음을 깨뜨리는 작가다. 아마 최진영은 끝까지 우리 삶의 전부를 써낼 것이다. 그렇게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이 모든 불행의 연대를 일인칭의 노래로 외우고 있을 것이다. - 황현진 소설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소설가였다.

'이제야 언니에게' 라는 제목을 이제야 / 언니에게 로 읽고 책을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

이제야-언니에게 라는 의미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야 는 과거의 어느 시점이기도 하고 소설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 읽고 나서

최진영 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이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언니 라는 호칭은 사실 여성이 여성인 타인을 부를 때 자주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래서 '이제야' 는 시간의 이름이자 소설속 화자의 이름이자 우리들 주변의 언니 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제야 알게된 이제야의 아픔을 공유하는 언니에게 보내는 글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제야 작가가 언니에게 말하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이어질 것임을 속삭이듯 강인하게 다짐하는 글이기도 하다.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2008년 7월 14일,

그날 이후로 제야의 모든 세상이 부서졌다.

소외된 자들을 끈기 있게 소설의 자리로 초청하는 작가 최진영

이제야 말할 수 있는, 끝낼 수 없고 끝나서는 안 되는 이야기 (표지 문구 中)


소설은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기의 시점에 따라 어린이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하고 아가씨이기도 한 제야의 속내를 읽다보면 그 내면에 함께 침잠해 들어간다.


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 지을 때도 있었다. (p. 9)


소설의 첫장 부터 채 한페이지도 넘기기전에 제야가 어떤 성격인지 느껴졌다.

하루를 묻는 시간,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필요한 제야는

작가의 한 단면이자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읽는 이로 하여금 글자가 아닌 마음으로 언어를 전달받게 하고 있었다.


내게 모든 걸 떠밀고 나를 없애버리고 있다. 지금의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찢어버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지고 있다. (p. 49)

어째서 내가 변명을 하나. 변명은 가해자가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에게 나는 가해자인가.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 (p. 51)

찢을 수 없다. 찢으면 안 된다. 찢어버리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중요하다. 아름다운 과거보다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보다 중요하다. 지금 나는 살아 있다. 그러니 다음이 있다. 내게도 다음이 있을 것이다. (p. 84)


성폭력 피해자들은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고 한다.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생존자다.

피해자는 피해를 해결하면 끝나는 거지만, 생존자는 그렇지 않다.

살아가는 내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온힘을 다해야 하는, 그렇게 살아내야 하는, 그래서 살아남은, 그런 생존자다.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p. 164)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는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p. 217)

난 선택했어. 그것을 비밀로 두지 않겠다고. 설명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도망치거나 숨는 대신 말하겠다고. 고통스럽겠지. 오해받을 거야. 어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근데 말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야. 난 고통스러울 테고 오해받을 거야. (p. 226)


[ 나는 어린 여자애여서 무시당했다가 젊은 여자여서 의심받고 늙은 여자여서 무시당하게 될 거야]

라는 제야의 말은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여지껏 그래왔다는 것을.

그래서 제야의 선택은 정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여태껏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읽을 수록 마음 아프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이었지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제야의 마음을 들여다 본 순간부터 제야가 어떻게 살아남을지 너무 걱정되서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야보다 어른된 사람으로서

미안했다.


비록 소설속 인물일지라도 강릉이모 같은 어른이 제야 옆에 있어서 고마웠다.

내가 제야의 당숙모같은 쓰레기는 아니지만, 강릉이모 같은 어른으로 품어안을 수 있을지 반성했다.


제야가 상상했던 그 모든 복수의 방법들과 자책감에 빠져 고민했던 그 모든 죽음의 방법들은 낯설지 않았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뉴스를 들었을 때

그 가해자들에게 나는 속으로 그 모든 복수의 방법들을 상상하고

그 생존자들에게 나는 속으로 그 모든 죽음의 방법들이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제야의 선택이 대견스러웠다. 존경스러웠다. 잔잔한 물결이 파도보다 더 크게 마음을 치는 느낌이었다.


작년에 강화길 작가의 '다른 사람' 이라는 소설을 읽었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도 제야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제야와 다른 선택을 했다.

그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던 그녀들의 선택보다 온전한 자신이길 바란 제야의 선택이 정말 빛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언니에게

살아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고 싶다. 응원하고 지지한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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